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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韓国陸軍本部 発刊 刊行物 軍史研究 128号</title><script language="java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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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 onload="javascript:gotoAlbum();"><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amp;vmode=full">1page</a><br><br> 第 127 輯 2009. 8. 軍 史 硏 究 陸 軍 本 部 PRIDE &amp; TRUST, ROK ARMY 발 간 등 록 번 호 36-1580317-000432-0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amp;vmode=full">2page</a><br><br>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軍史硏究 ● 호기(虎旗) : 조선후기 가로 : 116cm,  세로 : 155cm 영문(營門) 밖 양편에 세우는 군기로서 검은색 바탕에 날개달린 호랑이가 화염을 쥐고 있는 모습 ● 영기(令旗) : 조선후기 가로 : 60cm,  세로 : 80cm 진중에서 명령을 전달하는데 쓰였던 기 표지설명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amp;vmode=full">3page</a><br><br> 軍 史 硏 究 陸 軍 本 部 .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amp;vmode=full">4page</a><br><br> 육군 고급간부들의 군사전문지식 함양과 능력계발을 위한 『軍史硏究』誌는 1951년 창간된 이래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추구해 왔으며, 최근에는 육군의 역사 및 전사연구와 군사관리 분야를 주관하는『軍史전문 학술지』로 개편되었습니다. 이제 『軍史硏究』誌는 군 역사 및 전쟁사 등 軍事史 分野를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육군의『軍史전문 학술지』로서 그 역할과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군내·외 軍事史 分野 전문가를 대상으로 홍보 및 촉탁, 감수 등 우수원고 게재를 위한 다각적인 활동과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軍史硏究』誌는 군사연구소가 추구하고 있는 육군 명예선양 및 호국 의식함양,  그리고 정통성 있는 육군의 역사편찬과 전투사 중심의 전쟁사 연구 등 군사사 분야 학술연구와 토론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보다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軍史硏究』誌가 지향하는 ‘전쟁사' 연구발전을 위해 지난 6월 5일 개최된『현리-한계전투』발간 기념세미나는 군내·외 군사전문가들의 많은 참여 속에 전투사 연구의 개념정립과 당시 전투의 역사적 사실규명 등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와 호응을 받은 바 있습니다. 금번에 발간되는 『軍史硏究 第127輯』은 이와 같은 육군역사 및 전사분야 등 군사연구 및 관리분야 군내·외 전문가들의 수준 높은 원고를 선별 게재함으로써 軍事史 분야의 연구발전을 촉진하고 간부들의 역사의식 함양과 전투적 사고 및 창의력 개발에 기여하고자 하였습니다. 앞으로 본『軍史硏究』誌가『軍事史 연구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軍事史 학술 토론의 장으로 계속 발전될 수 있도록 군내·외 전문가 여러분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특별히 금번『軍史硏究 第127輯』에 기고해주신 집필자 여러분과 감수 및 편집 등 발간을 위해 노력해주신 관계관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2009. 8.  陸 軍 軍 史 硏 究 所 長 准 將 申 錫 鉉 발간사 | Message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amp;vmode=full">5page</a><br><br> 목 차 &lt;a href="#6"&gt;군사연구소 동정 / 화보&lt;/a&gt; &lt;a href="#6"&gt;육군의 역사편찬 및 관리 ………………………………………………………… 6&lt;/a&gt; &lt;a href="#8"&gt;전쟁사 연구 및 편찬 ……………………………………………………………… 8&lt;/a&gt; &lt;a href="#10"&gt;육군 명예선양 / 호국의식 함양 ………………………………………………… 10&lt;/a&gt; &lt;a href="#12"&gt;전적기념물 / 군사재 관리………………………………………………………… 12&lt;/a&gt; &lt;a href="#14"&gt;군사업무 발전 ……………………………………………………………………… 14&lt;/a&gt; &lt;a href="#15"&gt;투고 내용&lt;/a&gt; &lt;a href="#15"&gt;특&lt;/a&gt; &lt;a href="#15"&gt;집&lt;/a&gt; &lt;a href="#16"&gt;『현리-한계전투』발간의 의의 (준장 신석현)…………………………………… 16&lt;/a&gt; &lt;a href="#40"&gt;군역사 및 역사일반&lt;/a&gt; &lt;a href="#41"&gt;한국 근현대사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대령 이내주) …… 42&lt;/a&gt; &lt;a href="#53"&gt;전 쟁 사&lt;/a&gt; &lt;a href="#54"&gt;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전문연구원 반기성)………………………… 56&lt;/a&gt; &lt;a href="#78"&gt;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대령 석영준) ………………………………………… 80&lt;/a&gt; &lt;a href="#108"&gt;6&lt;/a&gt; &lt;a href="#108"&gt;·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중령 최용성, 소령 이연호) …………… 110&lt;/a&gt; &lt;a href="#123"&gt;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전 특성 연구 (5급 계운봉) ………………………… 125&lt;/a&gt; &lt;a href="#146"&gt;군사관리&lt;/a&gt; &lt;a href="#147"&gt;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학예연구관 박재광) …………………… 150&lt;/a&gt; &lt;a href="#190"&gt;군사사 및 기타&lt;/a&gt; &lt;a href="#191"&gt;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명예교수 정토웅)………………………………… 194&lt;/a&gt; &lt;a href="#205"&gt;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교수 이재범) …………………… 208&lt;/a&gt; &lt;a href="#221"&gt;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대위 양태석) ……………………………… 224&lt;/a&gt; &lt;a href="#246"&gt;전쟁사 연구실태 및 발전방안 (대령 김상원) …………………………………… 249&lt;/a&gt; &lt;a href="#274"&gt;「軍史硏究」誌 원고 모집안내……………………………………………… 277&lt;/a&gt;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amp;vmode=full">6page</a><br><br> 군사연구소 동정 / 화보 6 군사연구 제127집 陸軍의 歷史編纂 및 管理 ◀ 참모총장은 군사외교 활동 일환으로 1월 이라크 국방 장관 접견하고 양국 간 군사교류 협력 활성화 및 방산 협력 강화 방안 등을 논의하였으며 지난 2월 14일 레바 논에 파병된 동명부대를 순시하여 병들을 격려하고 2 월 15일부터 22일까지 미국을 공식 순방하였다. (사진 右上 : 이라크국방장관기념패 전달,  左上 : 미 육군총장 기념패 접수,  左下 : 레바논 동명부대순시) ◈ 육군의 주요 역사 ◈ 작전 및 근무기강 확립 추진 실태 평가회의 / 훈련장 현장지도 ▲ 참모총장은 1월 20일 1군사령부에서 작전 및 근무기강확립 추진실태 평가회의 후 혹한기 훈련장을 찾아 현장지도 및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사진 左 :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 장병 격려,  右 : 작전 및 근무기강 추진실태 평가회의)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amp;vmode=full">7page</a><br><br> 군사연구 제127집 7 육군사 51집 / 참모총장기 발간 ▲ 육군역사의 전통성 계승을 위한 육군사 51집 발간 ▲ 제37대 육군참모총장기 제6집을 발간 ◈ 자전거 이용 활성화 발대식 ◀ 육군과 해군, 공군본부는 5월 20일『저탄소 녹색 성장』 이라는 국가비전구현을 위해 각 군 총장을 비롯한 1,000여명의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3군 합동으로 자전거 이용 활성화 발대식을 가졌다. ◀ 참모총장은 5월 4일 계룡대 인근지역과 도서 및 벽지 어린이 ,  장애어린이들을 초청하여 격려하고 나라를 빛내고 알리는 주인공이 되어 줄 것을 강조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amp;vmode=full">8page</a><br><br> 군사연구소 동정 / 화보 8 군사연구 제127집 戰爭史 硏究 및 編纂 ◈ 『현리 - 한계전투』발간기념 학술세미나 ▲ 군사연구소에서는 지난 6월 5일『현리 - 한계전투』발간기념 학술세미나를 가졌으며 이날 참모총장, 백선엽 육군발전협회 위원장, 홍성태 전략문제연구소장 등 각계인사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려대 정태현 교수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선임연구위원이 주제발표를 하였다.  참모총장 환영사 백선엽 대장(예) 축사 정태현 교수 주제발표 ◈ 세계전쟁사 디지털북 CD 제작 / 배부 ◀ 군사연구소에서는 지난 3월 육군 인트라넷 홈페이지에 탑재되어 있는 세계전쟁사 디지 털북을『세계전쟁사 CD』 로 제작하여 대대급 이상 제대에 배부하였다. (사진 左 : 전쟁사 CD, 右 : 디지털북 일부내용) 군사연구소장 인사말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amp;vmode=full">9page</a><br><br> 군사연구 제127집 9 ▲ 지역분쟁사 연구는 '07년 6월 연구에 착수 '08년 10월까지 집필하여 연구소 자체평가회의와 전사전문가의 원고심사과정을 거친『지역분쟁 사 연구』로서 세계 각 지역의 분쟁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기본개념서로 활용토록 8월 중 인쇄 및 배부할 계획이다.  ◈ 칭기스칸 전쟁술 발간 ◈ 『지역분쟁사 연구』발간 ◈ 병과전사 발간 ▲ 칭기스칸 연구의 최고전문가 몽골 칭기스칸대 학 교수“샥달”(예. 대령)이 저술한『칭기스칸 전쟁술』 을 지난 3월 번역/발간하여 여단급 이상 부대에 배부하였다. ◀ 한국군 기갑부대 태동 및 6·25전쟁시 기갑부대 운용과 6·25전쟁 및 대침투 작전시 정보통신 전사사례집 발간 ▲ 군사연구소는 주요 전쟁 기념일에 맞추어 육군 간부들이 전사연구 및 군사전문지식 함양을 위해 육군인트라넷 공지사항에 탑재하고 있다. (사진 左 : 쿠르드족 문제, 右 : 미국 남북전쟁)  ◈ 다시 보는 전쟁사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amp;vmode=full">10page</a><br><br> 군사연구소 동정 / 화보 10 군사연구 제127집 陸軍 名譽宣揚 / 護國意識 涵養 ◈ 참모총장 국립 대전 현충원 참배 / 대전 보훈병원 방문 영국군 한국전쟁 참전용사 전적비 추도식 ▲ 참모총장은 54회 현충일을 맞아 충남·대전지역 장군들과 함께 국립 대전 현충원을 찾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 결의를 다졌다. (사진 : 국립 대전 현충원 참배) ▲ 참모총장은 6월 18일 대전 보훈병원 상이용사 병실을 찾아 투병중인 환자를 위로 및 쾌유를 기원하고 국가보훈일선에서 수고하는 병원 관계자를 격려했다. (사진 : 대전 보훈병원 상이용사 위로) ◀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영국군 전적비에서 한국 전쟁 참전 영국군 노병과 가족, 영국대사, 뉴질랜 드, 캐나다, 호주의 국방무관,  제25보병사단장을 비롯한 지역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5 월 18일 행사가 거행됐다.  ◀ 개성 송학산 3개 고지를 탈환하고자 적 진지에서 장렬히 산화한 육탄 10용사의 살신구국의 호국정 신을 기리고자 김양 보훈처장, 윤종언 육탄10용사 기념사업회장, 박세직 재향군인회장, 황중선 제1 군단장, 일반시민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60주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amp;vmode=full">11page</a><br><br> 군사연구 제127집 11 ▲ 육군명예의 전당에 인적자원개발 정책자문위원 회, 서울대 교수단 등 '09년도 전반기 2,540여 명 이 견학,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고귀한 희생정신 을 기리고 호국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기회를 가 졌다. (사진 左上 : 인적자원 개발 정책자문위원회,            右上 : 서울대교수단, 左下 : 미8군견학) ◈ 6·25 전사자 유해발굴 ◀ 참모총장은 6월 15일 모락산 능안고개 일대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방문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 받 친 유해를 발굴하여 국립현충 원에 안장함으로써 유가족의 한을 풀어드리고 나라사랑과 호국 보훈의식 함양에 앞장 설 것을 당부하였다. 총장 유해발굴현장지도 한미공동 유해 유전자 감식 유해발굴현장 ◈ 명예의 전당 운영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amp;vmode=full">12page</a><br><br> 군사연구소 동정 / 화보 12 군사연구 제127집 ▲ 부대의 주둔역사 및 뿌리찾기 등 역사보존을 위해 '08년 부대창설지 기념표지석을 6개 부대를 대상으로 설치하였다. ◈ 전적기념물 관리 戰跡기념물 / 軍史材 관리 ◈ 육군 부대창설지 기념표지석 설치 ▲ 2군단과 50사단은 작전지역 내 전적기념물에 대하여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전적기념물 관리실태 지도 방문을 통해 주변 환경정리 및 시설보수 등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참전전우회, 유가족 방문 시 대군 신뢰 도를 증진하고 장병들의 호국의지를 고양시켰다 (사진 左 : 다부동 전적비, 中 : 대성산지구 전적비, 右 : 자유수호의 탑) 제1보병사단(서울 중구 예장동) 제6보병사단(충주시 문화동) 제3보병사단(부산시 중앙동) 제5보병사단(서울 은평 수색초교 내) 제62보병사단(충남 연기군 사단 내) 제70보병사단(경북 안동시 사단 내)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amp;vmode=full">13page</a><br><br> 군사연구 제127집 13 ▲ 안중근 의사가 일본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날 지은 장부가를 새긴 비석이다. (사진 안중근 의사 장부가 비석) ◈ 육군 박물관 군사재 소개 창검류 ▲ 조선초기의 군무를 담당하던 의흥삼군부를 약칭 하는 것으로 고종 2년(1865)에 건립 (사진 청헌당 : 서울시 유형문화재 16호) 마제석검 석부 청동검 궁시류 활각궁 각궁 삼시수노기 총포류 세총통 고포총통 조총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amp;vmode=full">14page</a><br><br> 군사연구소 동정 / 화보 14 군사연구 제127집 ◈ 군사업무 순회교육 ◀ 군사연구소는 각 부대별 부대사 및 부대계 보 작성 담당관의 업무수행에 필요한 직무 지식 배양을 위해 군사업무의 중요성과 관 련규정, 제대별 역사기록방법 및 절차,  부 대사 / 부대계보 작성의 중요성에 대해 중 점을 두고 2009년 군사업무 순회교육을 실시하였다. ◀ 군사연구소는 全 연구소원의 전문지식 함양과 업무의 전문성 제고를 위해 지난 6월 10일 연기대첩 전적지와 개미고개 전투 (6·25 전쟁) 전적지를 답사하여 지역 향토학예사의 설명과 함 께 현지에서 활발한 학술토의가 이루어 졌다. (사진 左上 : 연구소원 학술토의 현장, 右上 : 연기대첩 사료, 左下 : 연기대첩비) 軍史業務 發展 ◈ 전사적지 답사 및 학술토의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amp;vmode=full">15page</a><br><br> 특 집 &lt;a href="#16"&gt;16『현리-한계전투』발간의 의의&lt;/a&gt;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amp;vmode=full">16page</a><br><br> .. 준장    준장    신 신 석 석 현 현 육군본부 군사연구소장  Ⅰ.    서        론 Ⅱ.    발간배경  및  의의 Ⅲ.    주요내용과  연구성과 Ⅳ.    향후  추진 Ⅴ.    결        론 16 군사연구 제127집 특    집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amp;vmode=full">17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17 Ⅰ. 서      론 지난  6월  5일  군사연구소는  2007년부터  시작한  6․25전쟁  전투사  연구의  산물 인  『현리-한계전투』1)  발간을  기념하는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책은  전쟁의  간접경험을  통한  전투적  사고력  배양2)과  군사전략  및  전술,  교리연구  등을  위한  수요자  중심의  전쟁사  연구편찬을  위해  시작한  전투사  연구의  첫  작품이라는데  그  의의가  크다. 본인이  군사연구소장으로  부임한  이후  각급제대  전쟁사  연구기관  및  병과학교  등에서  발간해  온  6․25전쟁  관련  자료들을  전반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기존의    6․25전쟁사  연구는  야전과  학교기관  등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여러  가지  측 면에서  제한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보다  구체적인  면에서  볼  때    국방부  및  육군  산하  전쟁사관련  연구소3)나  사관학교  등에서  발간한  6․25전쟁 사는  전투단계별  주요전쟁의  군사적  관점에서의  집중적인  연구분석보다는  전쟁  진행일자별  주요전쟁의  원인,  경과,  결과  등  전  분야를  거시적  관점에서  통사4)형 태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본인은  2006년도에  확대  개편5)된    육군  군사연구소의  1)  현리전투(’51.5.16∼22)는  중공군  5월공세  당시,  인제  남방  가로리에서  가리봉  간을  방어중 이던  국군  제3군단(제3,  9사단)이  중공군  2개  군(제20,  27군)과  북한군  3개  사단(제6,  12사 단,  32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  철수작전 이다. 2)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의  불확실성(Fog  of  War)을  극복하고,  전장상황을  직시해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자는  ‘군사적  천재’ 로서  이는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교육에  의해  양성된다”고  했다,  클라 우제비츠,  『전쟁론』,  이종학(역),  (서울:  일조각,  1995). 3)  현재  국방부  산하  전쟁사  연구기관  및  부서로는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전쟁사부),  합참  군사연구과나  육군  군사연구소(전쟁사연구과)  육사  및  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육대  전쟁사 학처  등을  들  수  있다. 4)  통사  :  역사  기술법의  한  양식으로서  한  시대나  지역에  국한한  특수한  역사에  대하여  전 시대  전지역에  걸쳐  통관한  종합적인  역사. 5)  육군은  창군초기인  1949년  육군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공비토벌작전  등에  대한  전사자료 를  수집  편찬하고  이후  전사감실  및  군사감실을  설치하여  6․25전사자료  등을  수집해  왔 을  뿐만  아니라  1971년  군사연구실을  창설한  이후에는  파월전사와  소부대전례집  등  매년  10여권의  전사․전례집을  자체  연구편찬  해왔으나  1995년  교육사로  전사업무기능이  이관 된  이후에는  이마저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2004년  육군차원의  전사업무기능이  요구됨에  따라  전사연구과를  신편하고  이를  모체로  ‘전사연구소’  설립을  추진하는  등  전사연구부서  확대증편과  자체  연구편찬  활동을  강화하는  등  육군  전사업무의  중심역할을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amp;vmode=full">18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18 군사연구 제127집 ‘한국전쟁과’를  중심으로  ‘전투사’에  대한  개념정립6)과  아울러  야전부대와  병과학 교  등에서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전투사  중심의  6․25전쟁사를  연구  편찬하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그  실행방안으로서  6․25전쟁의  주요작전  유형별  1-2 개의  전투사례를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결론에  도 달하였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고려된  전투사례로  6․25전쟁  중  중요한  방어작전 의  하나로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주도권을  확보하고  유리한  휴전  협상을  이끌어낸  『현리-한계전투』를  그  첫  번째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후  약  2년여의  기간  동안  6․25전쟁  당시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보고서7)  등  각종  전사자료  수집으로부터  연구  집필,  현장  답사  및  정찰,  그리고  자문  검증  등  체계적인  절차를  거쳐  비로소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현리-한계전투』는  우 리  육군의  6․25전쟁에  대한  공간사로서  학계와  군  그리고  미국,  중국측  대사관  등의  검증을  통하여  객관성과  공신력이  담보된  연구노력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현리-한계전투』의  발간  배경과  의의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 펴보고  새롭게  밝혀진『현리-한계전투』의  주요내용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어떠한  방향으로  6․25전쟁  전투사  연구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발간배경 및 의의 1.『현리-한계전투』발간의 배경 6․25전쟁사  연구는  상위의  정치적․전략적  측면의  거시적  연구로부터  대대,  중대급의  전투,  전례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이  요구된다.  또 한  야전과  학교,  연구기관  등  다양한  계층의  수요자를  고려하여  차별성  있는  접 근이  필요하며  이에  따른  연구방법과  서술방식의  적용도  차별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간되어온  6․25전쟁사는  이와  같은  수요자를  고려한  연구  및  서술방식,  분석  방법  등을  차별성  있게  고려하지  않고  개괄적,  통사적인  관점에서  6) 정명복,  “6․25전쟁사  연구방안에  대한  고찰-전투사를  중심으로”,  『군사연구』  제124집 (2008). 7)  중공군의  전투보고서와  중공군  제12,  20,  27,  60군  전사  및  ‘항미원조전쟁경험총결’  등을  참 조하였다.  본  논문  3～4쪽  참조.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amp;vmode=full">19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19 기술하는  방식을  적용해  왔다. 따라서  이러한  기존의  6․25전쟁사와는  다른  육군의  야전과  병과학교  등에서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군사적  관점에서의  분석적인  수요자  중심의  전투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6․25전쟁  전투사  연구의  첫  번째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  바로  이  현리-한계전투이며,  이를  선정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6․25전쟁  사료의  기존문헌과  최근  공개된  각국의  1차  사료를  검토하 던  중  1951년  5월  현리,  한계리  일대에서  진행된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투를  주목 하였다.  그  이유는  중공군의  6차례  공세  중  유일하게  동부  축선에  주력이  지향된  전투로서  전쟁의  원칙뿐만  아니라  작전술과  전술의  교훈이  다양하게  내포된  역동 적인  전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현리-한계  전투라고  하는  1951년  5월의  유 엔군과  공산군의  전역은  야전과  학교기관에서  연구해야  할  다양한  전훈이  도출될  수  있는  전쟁  원칙  및  전략전술  연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현리-한계전투의  내용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각급기관의  연구자들 에  의해  연구되어온  성과를  새로  발간되고  있는  러시아,  북한  등  공산권  국가의  6․25전쟁  관련  사료와  비교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해  볼  필요성이  있다.  따 라서  선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느  한쪽의  주장이나  연구관점에  치 우치지  않고  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  사실규명과  이에  기초한  전 투사  연구  및  서술이  절실하게  요망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  군사연구소가  전쟁사  연구의  기본  축으로  삼고  있는  수요자  중심의  전쟁 사  연구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본  현리-한 계전투의  연구를  통해  앞서  언급한  문제를  다루어  보는  것  자체가  향후  육군의  전쟁사․전투사  연구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본다. 2.『현리-한계전투』발간의 의의 그동안  6․25전쟁의  연구는  주로  한국과  미국의  공식문서에  초점을  맞추어  진 행되어  왔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이  6․25전쟁  관련  비밀  공식문서를  공개한  이 래  6․25전쟁의  원인,  수행,  영향  등에  걸친  전반적인  연구가  활발해졌다.  반면  중국과  북한의  공식문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적 의  상황,  배치,  의도  등에  대한  세부검증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런데  최근  국 내  연구기관들이  중국의  사료들을  수집,  번역하여  6․25전쟁  연구에  상당한  성과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amp;vmode=full">20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20 군사연구 제127집 있었다.8)  여기에  북한의  자료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속속  입수되는  등  6․25전쟁  관련  사료가  풍부해지면서  사실에  대한  실체적  검증과  분석,  입체적  조명이  가능 해졌다. 군사연구소에서는  이  중에서도  가치  있고  권위  있는  기존의  연구문헌을  선별했 다.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위원들이  연구의  큰  틀을  잡고,  내외에  두루  자문 을  구하는  과정에서  6․25전쟁에  대한  중국측의  미공개된  사료를  획득했다.  이것 이  이  연구의  추동력이  되었다.  특히  중공군의『제12군  전사』9)  (1965),『제20군  전사』(1965),『제27군  전사』(1955),『제60군  전사』(1958)와  『항미원조전쟁경험 총결』(1956)  시리즈를  입수하고  번역하여  그동안  ‘인해전술’로  치부되거나  ‘운동 전’10)으로  과대평가된  중공군의  전법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확인,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자료  부족과  참전자  증언의  한계  때문에  공산군의  정확한  규모와  제대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제한되었으나  이번에  입수한  중공군측 의  1차  사료를  통해『현리-한계전투』는    당시의  공산군  투입규모,  편제,  공격  시 간과  방향  등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현리-한계전투』는   ‘현리전투’와  ‘한계리전투’에  관한  제각각의  연구들을  8)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중국군의  한국전쟁사』제2권,  박동구(역),  (서울:  군사 편찬연구소,  2005),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편,  『한국전쟁과  중국』제2권,  (경기:  행정 자치부,  2002),  홍성태  외,  “한국전쟁의  중공군  작전  분석  :  덕천․용천․설마리․금천  전 투  중심”,  『연구보고서』,  (충남:  육군교육사령부,  1994),  홍성태,  “한국전의  기동전  분석”,  『연구보고서』,  (충남:  육군교육사령부,  1996),  황재찬  외,  “한국전쟁의  작전술적  분석  :  중공군  5대공세중심”,  『연구보고서』,  (충남:  육군교육사령부,  1992),  민병성,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기동전  수행간  나타난  문제점”,  『연구보고서』,  (충남:  육군교육사령부,  2002),  김세환,  “한국지형에서의  기동전  수행방안”,  『연구보고서』,  (충남:  육군교육사령부,  2001). 9) 사료에  대한  목록은  본  논문  17쪽〈표  2〉참조. 10)  ‘운동전  전법’은  6․25전쟁에서  중공군이  사용한  전술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정의한  것이 다.  중공군이  6․25전쟁에서  사용한  전술은  ‘운동전’,  ‘기동전’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기습,  집중,  돌파,  종심기동,  차단,  우회,  포위  등의  다양한  요소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한편  중공군  전술의  공통점은  ①  시간  면에서  빠른  돌파  이후  즉각  종심으로  기동하고  우회하 여  포위에  가담함으로써  상대에게  전  정면에서의  동시전투를  강요하고,  ②  공간  면에서  정면돌파,  종심기동에  의한  후방차단,  양익측  공격에  의한  포위로  상대에게  지휘통제와  대응이  불가능하도록  압박하며,  ③  전투력  면에서  일정한  정면에  가용한  병력을  최대한  집중하고,  상대방의  전투력은  분산시켜  전투력의  압도적  우세를  달성하는  것  등이다.  마 오쩌둥은  ‘국공내전’  시기부터  “중국이  승리를  하려면  반드시  고도의  ‘운동전’을  해야  한 다”고  강조해  왔고  이  때  형성된  ‘운동전’의  전술원칙이  6․25전쟁에도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1&amp;vmode=full">21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21 하나로  묶어  재구성하고  이를  평가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적  의의를  가진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리전투’와  ‘한계리전투’로  각기  알려진  두  대 조적인  전투가  하나의  전투사적  관점에  의해  통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거가  전투내용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국가의  공식문서를  통해  발견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군사연구소에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학계와  미국,  중국측에  이번에  발간하는  『현리-한계전투』의   검증을  직접  의뢰하여  학문적  가치와  대외적  공신력을  높이 는데  힘썼다.  2008년  12월부터  2009년  2월까지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고려대  한 국사연구소,  연세대  사학과의  교수들이  참여하여  『현리-한계전투』의    사실  복원 에  사용된  방법론,  논의  전개의  적절성  등에  대해  검증했다.  특히,  주한  미  제8군 사령부의  역사  담당관인  밀러(Ronney  Z.  Miller)  및  주한  중국대사관  중국  무관 과의  특별인터뷰를  실시하여  1차  사료의  가치와  신뢰도를  재확인하여  『현리-한계 전투』에   반영했다. Ⅲ. 주요내용과 연구성과 금번에  발간된  『현리-한계전투』는  신뢰도  높은  1차  자료에  근거하여  관련사 실을  실제와  유사하게  재구성한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전투사의  객관 성을  기존  자료에  비해  높였다는  것이다.  연구에  사용한  1차  자료는  6․25전쟁  당시  혹은  직후에  작성된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보고서와  전사  기록물  등이며  전 투에  참가한  한국군  사단의  부대사와  참전자  인터뷰도  참고했다.  특히  전투상황 을  주요  국면별로  설명함으로써  전투과정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독자들의  이 해를  높이는데  노력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육군군사연구소는  ‘수요자  중심의  전쟁사  연구’를  중점적으 로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리-한계전투』는  전투내용을  피아  군사교리에  의거하여  분석함으로써  야전부대와  학교기관에서  교육훈련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현리-한계전투』는     총  5개장  12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장  개관에서는  발간  배경과  의의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제2장  상황평가에서는  공산군과  유엔군의  상 황평가와  당시의  전장상황을  평가하여  관련사실  재구성의  밑거름을  조성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2&amp;vmode=full">22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22 군사연구 제127집 제3장에서는  전투경과를  중동부  전선의  전황과  중동부  전선을  집중  돌파한  중공 군,  한국군  제3군단의  퇴각,  돌파구의  견부를  확보한  유엔군,  유엔군의  반격여건  조성  등으로  나누어  분석함으로써  전투상황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하였다.  제4장에 서는  작전적․전술적  차원의  분석을  통해  현리-한계전투에  대한  평가  및  교훈을  도출하였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6․25전쟁  기간  중  현리-한계전투가  차지하는  비 중과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투상황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군사사  연구자들  책무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발간된  책의  주요내용과  연구성과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요내용 가. 제1장 개관     본  장은  2개  절로  구분하여  『현리-한계전투』발간의  배경과  의의에  대하여  설명 하고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본  논문  2장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나. 제2장 상황평가     상황평가는  공산군과  유엔군의  상황평가와  전장환경  평가로  구분하여  분석하 였다.  당시  공산군은  평더화이11)가  1951년  5월  17일  예하부대에  보낸  전문에서  “기회가  되면  한국군을  소멸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미군을  고립,  분산시켜  차후  미군을  소멸할  수  있는  유리한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중 동부  산악지역에서  한국군  사단들을  격멸한  후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 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 전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12) 한편,  유엔군  지휘부는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과  미  제8군사령관  벤  플리트  장 군이  4월  11일  동시에  부임하여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새로  부임한  벤  플리트  장군은  1951년  5월  이전  중공군의  배치상황에  근거하여  제5차  제2단계  공세  역시  11)  펑더화이(彭德懷)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으며  6․25전쟁  당시  항미원조지원군(중공군)  총사령관  직책을  수행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유 엔군의  38선  북진을  저지하고  현  휴전선  부근에  전선을  고착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전 선이  교착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시에는  중공측  대표로서  서명하였다. 12) 中國人民志願軍第十二軍編, 『中國人民志願軍:第十二軍戰史』(中國人民志願軍第十二軍,  1955.  12),  p.11.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3&amp;vmode=full">23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23 &lt;그림  1&gt;  중공군의  공세계획  및  연합군  작전계획 서부  또는  중부  축선에  지향될  것으로  판단했다.13)  그러나  5월  3일부터  14일  어 간에  수집된  각종  첩보자료에  의하면  중공군의  주력이  미  제10군단  정면,  즉  중 동부  전선에  집중될  것이라는  징후들이  나타났다.14)  이에  유엔군은  작전계획이나  전선을  조정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기존의  방어계획은  그대로  두 고  미  제1군단의  예비로  있던  미  제3사단을  미  제8군으로  배속  전환하여  군  예비 로  운용할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중공군이  돌파구를  형성하여  진격해오는  동안  스스로  작전한계점에  도달하게  한  뒤  전투력을  보존한  미군으로  하여금  반격을  가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15) 또한  전장환경  평가는  상황평가  중  당시의  작전여건을  고려하는데  중요한  사항 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책임지역  내  주요고지는  울창한  삼림지대로서  도로망 이  발달되지  않아  병력과  장비  모두  기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51년  5월  5일부터  25일까지  인제,  현리,  창촌,  하진부리  지방의  기상은  전반적으로  흐리고  가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침에는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서북 풍이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5℃ 미만이었다.  이러한  기상조건은  전투원들이  저 체온증으로  많이  사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3) Eight  United  States  Army  Korea  Headquarters,  Command  Report,  Section1  :  Narrative(1951),  p.7. 14)  X  Corps  G-2  Section,  Enemy-Tactics  :  Battle  of  Soyang  River(1951),  p.2. 15) Thomas  S.  Grodecki,  From  Powder  River  to  Soyang  :  The  300th  Armored  Field  Artillery  in  Korea(1989),  p.6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4&amp;vmode=full">24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24 군사연구 제127집 다. 제3장 전투경과     제3장은  총  5개  절로  구성하였다.  제1절  중동부  전선에  감도는  전운에서는  1951년  4월  29일  중공군의  제5차  제1단계  공세가  중지되자  미  제8군사령관  벤  플 리트는  중공군이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5월  7일  반격을  개시한  것 을  분석하였다.  또한  중동부  전선의  한국군  6개  사단이  미주리선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공군이  집결하는  등  공세의  징후가  감지되었던  사실  등을  8군  자료16)를  인용해서  분석하였다. 제2절  중동부  전선을  집중  돌파한  중공군에서는  한국군  제7사단의  상황과  제5 사단의  상황에  대해서  중공군자료와  제7사단과  제5사단의  자료를  이용해서  분석 하였다. 우선  제7사단  지역의  상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5월  16일  16:30부터  중공군 은  소양강  남안  한국군  제7사단의  방어진지일대에  1시간에  걸쳐  강력한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했다.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서  17:30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 다.17)  중공군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인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한  제7사단은  너무 나도  쉽게  무너졌다.  중공군은  공격을  개시한  지  2시간  반  만인  5월  16일  20:00경  이미  방어선을  돌파했다.18)  이렇게  제7사단이  초기에  대량  피해를  입은  것에  대 해  피․아19)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①  중공군  공격준비 사격의  정확함,  ②  중공군  공격준비사격의  치열함,  ③  방어준비  부족  등이다.  중공군  제20군의  강력한  돌파로  제7사단  제8연대의  예하  부대들은  중대  단위로  각개  격파되어  갔다.  그러나  지휘통제체제가  마비된  제7사단  사령부는  5월  16일  22:00  이전까지  전방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미  제10군단장은  5월  17일  01:00경  제7사단장과  제5사단장에게  현  방어진지에서  철 수하여  노네임선  일대로  방어선을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시각  제7사단 과  제5사단은  이미  조직적으로  철수할  수  있는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하고  소부대  단위로  퇴각하는  중이었다. 16) Eight  United  States  Army  Korea  Headquarters,  Command  Report,  Section1  :  Narrative(1951),  p.9. 17) 中國人民志願軍第十二軍編,  『中國人民志願軍  :  第十二軍戰史』(1965),  中國人民志願軍第 二十七軍編,  『中國人民志願軍  :  第二十七軍戰史』(1955) 18)  제9사단,  『부대사』(1982),  p.115.  19)  中國人民志願軍抗美援朝戰爭經驗總結編寫委員會,  『抗美援朝戰爭經驗總結  :  二,  戰術經驗 總結』(1956),  pp.9～11,  제7사단,  『부대사』(1999),  pp.152～154.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5&amp;vmode=full">25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25 &lt;그림  2&gt;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의  철수  상황 한국군  제7사단  제5연대  역시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에  이은  집중  돌파 로  초전에  제대로  된  방어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5월  16일  16:30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준비사격에  의해  통신이  두절되어  부대가  장악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21:30경,  제5연대는  중공군이  정면에서  파상공격을  계속  해오고  측후방 을  위협하자  조직적인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  제81사단과  제79사단은  5월  16일  23:00경  구만리,  창막동  일대를  완전히  점령했 다.  급기야  23:45경에는  소치리에  위치한  연대지휘소가  중공군에  의해  습격을  받 은  후  더  이상  전투지휘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5월  17일부터  18일까지  중공군의  집요한  ‘운동전  전법’으로  후퇴와  교전을  반복 하던  제7사단은  18일  02:00경  미  제10군단으로부터  풍암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풍암리에  도착한  이후  제7사단은  필사의  각오로  이  일대를  방어했다.  특히,  5월  20일  12:30경  중공군이  풍암리,  태월리  방면으로  공격해  왔으나  이를  격퇴하였으며  22:00경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재차  공격하였으나  막아냈다. 한편,  한국군  제5사단의  상황은  제7사단  지역  보다는  조금  나아  보였다.  이는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6&amp;vmode=full">26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26 군사연구 제127집 한국군  제5사단이  5월  7일부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이래  미주리선으로  진출하 여  단독으로  홍천-인제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고  논리  북쪽의  고지군을  점령 하는  전과를  올릴  정도로  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중공군  제12군은  한국군  제5사단의  전방에  5월  15일  밤부터  돌격부대를  진출시 켜  소양강  도하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20)  5월  16일  16:30경  제7사단  지 역과  마찬가지로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했고,  17:30경  내평리  일대에서  공격을  개 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21)  정면에서  중공군의  파상공격이  계속되고  인접  한국군  제7사단의  퇴각으로  후방이  노출되어  고립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5월  17일  03:30경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한편,  중공군  제12군  제31사단은  5월  16일  23:00경  한국군  제5사단  제35연대의  일부를  돌파한  후  우회,  종심기동을  실시하여  5월  16일  24:00경  자은리  북쪽  삼거 리까지  진출했다.  자은리에  도착한  중공군은  2개  연대규모로  계속  진출한  후  자 은리  남쪽에서  장수원  일대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중공군  제31사단은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탱크  12대를  만나  격전을  벌인  뒤  차후  작전방향을  재선정하 지  못하고  자은리  일대에서  2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또한  제5사단의  예비였던  제36연대는  장남리,  가마봉을  연하는  선에서  신장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매봉일대에서  5월  16일  대략  3～5시간,  가마봉  일대 에서  5월  17일  대략  9～10시간을  중공군과  교전하여  중공군의  종심기동을  지연시 켰다.  이러한  지연은  결과적으로  중공군  제5차  제2단계  공세의  포위  소멸계획의  핵심인  중공군  제31사단의  주력  진출을  저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중공군  제12군은  이틀에  걸친  강력한  야간공격에도  불구하고  제5사단이  저지진 지를  점령하고  지연전을  펼치며  선전하자  목표22)달성에  차질을  입게  되었다.  제5 사단(제36연대)은  미  제10군단의  항공화력과  미  제2사단  제9연대의  포병지원을  받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친  끝에  5월  19일  15:00경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 다.  한국군  제5사단의  승리는  미  제2사단이  인제-홍천  축선과  ‘벙커고지  전투’23)로  20)  中國人民志願軍第十二軍編,  『中國人民志願軍  :  第十二軍戰史』(1965),  p.13. 21)  中國人民志願軍第二十七軍編,  『中國人民志願軍  :  第二十七軍戰史』(1955),  p.37. 22)  중공군  제12군의  목표는  자은리,  장수원  등을  차단한  후  속사리로  종심기동하고  이  일대 를  차단하여  포위  소멸의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23)  미  제2사단  제38연대  제3대대는  778고지  전체에  걸쳐  견고한  엄체호를  구축하였다.  이를  시찰한  미  제8군사령관이  ‘미  제10군단에서  가장  견고한  방어진지’라  언급하면서  778고지 는  ‘벙커고지’로  불리었으며,  후일  이  곳에서의  전투가  ‘벙커고지  전투’로  불리게  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7&amp;vmode=full">27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27 잘  알려진  77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유엔군  반격의  발 판을  마련하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lt;그림  3&gt;  한국군  제3군단의  철수 제3절은  한국군  제3군단의  퇴각에  관련된  내용을  관련사실에  입각해서  분석하 였다.  우선  주목할  것은  군단  내  좌측사단인  9사단이  미  제10군단  우측사단(한국 군  7사단)과  정보교환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제9사단은  전반적으로  상급  및  인접부대와의  협조  및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중공군의  공세  내내  중공군은  물론  한국군에  대한  적절한  정보도  얻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24)  이는  당시  제9사단  제30연대장이던  손희선의  아래와  같은  증언을  통 해서도  알  수  있다.  “현리지구  철수전에서  왜  우리가  힘없이  무너졌는지  지금  생 각해도  잘  모르겠다.(5월  17일  오전에야  용포로  이동하라는  한국군  제9사단장의  24)  일례로  제9사단의  부대사에는  당시  제7사단이  거의  철수한  시점에서도  관련된  상황을  다 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단은  적의  공격이  개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접적이  없었다.’  제9사단,  『부대사』(1982),  p.115.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8&amp;vmode=full">28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28 군사연구 제127집 지시를  받은  상황에  대해서)  ‘아침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지금  지시를  하느냐’고  하니까  ‘지금  시간이  없으니  빨리  철수하라’고  하면서  ‘아마  한국군  제7사단  지역 이  공산군에게  돌파당한  것  같다’고  했다.” &lt;그림  4&gt;  5월  18~20일  중 ․ 동부  축선의  상황 다음은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3군단  간의  협조  부족과  마찰이  제3군단의  퇴 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당시  미  제10군단장은  5월  18일  08:00경  미  제8군사령관과의  통화에서  미  제2사단  책임지역으로의  중공군  공격에  대해서는  조치할  수  있지만  우측의  한국군  제3군단  지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입 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제3군단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25) 어찌  되었든  한국군  제3군단의  철수는  군단이  해체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미  제8군사령관은  한국  육군본부의  작전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인 사,  군수,  교육훈련만  담당할  것을  지시했다.26)  이에  동해안에서  운용  중이던  육 군본부  전방지휘소도  폐쇄되었다. 25)  Headquarters  X  Corps,  Battle  of  The  Soyang-River(1951),  p.8. 26) Eighth  United  States  Army  Korea  Headquarters,  Command  Report,  Section  1  :  Narrative(1951),  p.22.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9&amp;vmode=full">29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29 &lt;그림  5&gt;  유엔군의  반격작전(1951.  5.  23~6.  15) 제4절에서는  돌파구의  양쪽  견부를  확보한  유엔군의  역할에  대해서  분석하였 다.  우선  미  제2사단이  23연대의  인제-홍천  축선  전투,  38연대의  가리산  전투,  38 연대  3대대의  벙커고지  전투  등을  통해  중공군의  작전템포를  빼앗은  내용에  대해  전투  상황도를  통해  선명하게  재조명하였다.  그리고  한국군  제1군단이  제11사단  제20연대의  횡계리  전투,  수도사단  제1연대의  대관령  전투  등을  통해  대관령을  확보하면서  우측  견부를  지켜낸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하였다. 제5절에서는  한국군  제1군단의  임무가  전환되고  미  제8군의  예비대인  미  제3 사단  등을  미  제10군단  지역으로  투입하여  미  제3사단이  운두령을  마침내  확보 함으로써  유엔군의  반격여건을  조성하는  과정에  대해  관련  자료를  이용하여  분 석하였다. 라. 제4장 평가 및 교훈     제4장에서는  작전적  차원의  현리-한계전투를  분석하고  전술적  측면에서의  관 련  당사자들의  승패요인을  제시하였다.  우선  작전적  차원에서는  최종상태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0&amp;vmode=full">30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30 군사연구 제127집 작전목표,  중심,  결정적  지점과  작전한계점을  도출하였다.  그리고  전술적  측면에 서는  중공군,  미군,  한국군의  승패요인을  그들이  수행했던  작전경과  속에서  분석 하였다.  이를  세부적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작전적  차원  /  전술적  측면  분석 구  분 내    용 세  부  내  용 작전적  차원  분석 최종상태/작전목표 중동부  한국군  4개  사단  포위  소멸로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기  조성 중심 한국군  4개  사단  후방의  퇴로  및  병참선  차단 결정적  지점 오마치  고개  /  제7사단  방어지역 작전한계점 작전기간  :  5～10일  작전거리  :  50～100km 전술적  측면  분석 중공군의  승패  요인 ․강력한  공격준비  사격 ․집요하고  맹렬한  돌파 ․돌파,  종심기동,  후방차단의  다양한  조합 ․전술적  사고의  경직성 ․취약한  전투근무지원 미군의  승패요인 ․공산군  주력  지향축선에  대한  오판 ․방어,  특히  측후방  공격시  방어에  취약 ․돌파구  확장  방지를  위한  신속한  지휘조치 ․효과적인  예비대  운용과  화력지원 한국군의  패배요인 ․미군과의  협조체계  미흡 ․작전을  위한  준비부족 ․지휘관,  참모의  작전수행  능력부족 마. 제5장 결언     현리-한계전투는  한국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중공군은  제5차  제2단 계  공세에서  유엔군의  성공적인  저지에  이은  강력한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과연  자신들의  승리가  가능할  것인지,  그리고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지  의심하게  되었다.  현리-한계전투는  중 공군이  대규모  공세를  단념하고  유엔군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한  중요한  전투라  평가할  수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1&amp;vmode=full">31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31 2. 연구 성과 가. 전투사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 정립     6․25전쟁  기간은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역사에  남을  성공적  상륙작전 과  공수작전,  공중전이나  전차전  등  다양한  형태의  전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산악지역에서  소부대  단위로  이루어졌던  전투가  많았다.  따라서  6․25전 쟁은  전략․작전술적  차원  보다는  전술적  측면의  공격․방어에  있어서  많은  전훈 을  얻을  수  있는  전투사례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당시  전쟁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공군의  편제와  규모,  전투가  벌어진  장소와  시간은  이를  연구하고  집필한  연구자마다  상이하였다.  관련  사실을  실제 와  가장  유사하게  재구성하여  육군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  현리-한계전투  연구의  출발점이며  『현리-한계전투』를  발간한  배경이기도  하다. 나. 현대의 군사교리를 적용한 전투사 분석     대부분의  역사가  그렇듯이  전쟁사,  전투사  역시  그  시대에  맞는  관점에  따라  다시  써야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역할27)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6․25전쟁사,  전투사례,  전례연구  등  6․25전쟁과  관련된  연구들은  6․25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6․25전쟁의  연구가  지금  현 재  우리  군의  전투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현재의  관점에서  다시  분 석하고  재평가하는  새로운  작업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현리-한계전투』는  『지상군  기본교리』, 『작전술』,『전술』,『보병사단』,  『보병연대』, 『소부대  전투기술』등과  같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국군  교범은  물론  중공군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다양한  연구서,  북한군  교범을  통해  당시의  전투상황을  현재의  시각과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평가했다. 27)  이  내용은  역사가  가지는  의미이며  그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콜링 우드(R.G.  Collingwood)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상호  대화하는  것이라는  표현으 로  역사의  오늘날  역할을  간곡히  언급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2&amp;vmode=full">32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32 군사연구 제127집 다. 1차 사료분석을 통한 사실 재구성     현리-한계전투에  관한  기록은  공산군과  유엔군의  규모,  일진일퇴의  복잡다단 함,  중공군의  종심기동  속도의  민첩성,  한국군의  퇴각에  대한  부정적  시각  등으로  인해  연구물이나  문헌마다  중요한  전투의  내용(시간,  장소,  부대,  주요사건  등)이  각기  상이했다.  이에  『현리-한계전투』는   다음과  같은  미국,  중국  측의  공식문서 를  전투사  작성의  기본  자료로  하여  전투사  작성시  갖춰야  하는  전투사례의  신 뢰도와  정확성을  높이는데  노력하여  관련사실의  재구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 고  있다. 【표  2】  연구에  사용된  1차  사료  목록 구     분 세    부     내     용 미군 자료 Eight  U.S.  Army  Korea  Headquarters,  Command  Report(1951.5) Headquarters  Ⅹ  Corps,  Command  Report(1951.5) Headquarters  Ⅹ  Corps,  Battle  of  the  Soyang-Rive(1951) Ⅹ  Corps  G-2  Section,  Enemy-Tactics(1951.6) 중공군   자료 抗美願朝戰爭經驗的總結  :  一,  戰爭簡史』(1956.10) 『抗美願朝戰爭經驗的總結  :  二,  戰術經驗總結』(1956.10) 『抗美願朝戰爭經驗的總結  :  三(下),  步兵團,  營,  連,  排戰例選輯』(1956.10) 『抗美願朝戰爭經驗的總結  :  四,  對敵軍硏究』(1956.10) 『中國人民支援軍  :  第十二軍戰史』(1955.12) 『中國人民支援軍  :  第二十軍戰史』(1965.5) 『中國人民支援軍  :  第二十七軍戰史』(1955.12) 『中國人民支援軍  :  第六十軍戰史』(1958.7) 抗美援朝全爭史畵券(2005) 한국군   자료 보병제5사단  부대역사(1979) 제9사단  부대사(1982) 제7사단  부대사(1999)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역사(198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3&amp;vmode=full">33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33 라. 피ㆍ아 전술을 중심으로 전투내용 재해석     기존에  발간된  전쟁사나  전례는  역사기술의  방식28)인  편년체를  사용,  전투의  경과가  시간  순으로  기술되어  있어  전투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전투력  향상으로  연계시키는  데에는  적절치  않은  점이  있었다. 이에  『현리-한계전투』는  전투의  경과를  주로  시간과  공간순으로  기술하되  주 요한  국면이나  교리적  가치가  있는  상황은  중공의  전술과  미군의  작전술적  차원 에서  그러한  국면이나  상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특히,  중공군의  전술적  특성을  분석하여  ‘운동전  전법’의  관점에서  중공군의  정 세를  설명하고,  미군의  작전술적  특성을  분석하여  ‘작전술  차원에서의  전술지도’ 로  미군의  방어와  반격을  설명한  것은  당시의  정황과  전투내용을  입체적으로  이 해함으로써  육군의  구성원이  공동의  전술관을  갖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마. 새롭게 얻은 연구 성과 1)  미  제8군의  중공군  주력방향  판단         기존의  연구  산물이나  문헌들은  미  제8군이  중공군의  제5차  제2단계  공세 시  주력의  지향방향을  서부축선으로  잘못  판단하고  대비를  잘못하여  미  제2사단 과  한국군  제3군단이  맡고  있던  책임지역에  거대한  돌파구가  형성된  것으로  분석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번  연구결과,  미  제8군  및  미  제10군단은  적어도  중공군의  공세개시  12일  전인  5월  4일에는  중공군의  동부  축선  공격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에  따라  작전계획이나  전선을  조정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기존의  방어계획은  그대로  두고  미  제1군단의  예비로  28)  동양에서의  역사  서술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전체로서  이는  왕조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여기에  속한  신하들의  전기,  통치제도,  문물,  경제실태,  자연현상  등을  분류,  서술하여  왕조전체의  체제를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편년체로서  연월에  따라  기술하는  역사편찬의  체제이다.  세  번째는  기사본말체로 서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과  발단,  전개과정,  후에  미친  영향까지  일관되게  서술하여  대 상  사건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체제이다.  네  번째는  강목체로서  큰  글씨로  쓴  줄거리  기사의  강(綱),  보다  작은  글씨로  쓴  구체적  서술의  목(目)으로  기본틀을  이루는  편년체  형식을  말한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4&amp;vmode=full">34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34 군사연구 제127집 있던  미  제3사단을  미  제8군으로  배속  전환하여  군  예비로  운용할  수  있도록  조 정하였다.  이는  중공군이  돌파구를  형성하여  진격해오는  동안  스스로  작전한계점 에  도달하게  한  뒤  전투력을  보존한  미군으로  하여금  반격을  가하게  하려는  의도 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2)  중공군의  공격개시와  한국군  제7사단의  퇴각         한국군  제7사단이  중공군의  공격개시와  동시에  일거에  무너진  원인에  대해 서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또한  중공군이  공격준비사격  및  공격 개시  시간에  대한  기술이  연구물  및  문헌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번  연구에서  찾아낸  사실은  중공군의  공격준비사격  시간과  공격개시시간을  중공측의  자료를  참조하여  명확히  제시했으며,  중공군이  한국군  제7사단  전방에  모든  화력을  일거에  집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중공군이  6개  사단의  전투력을  한국군  방어  전단  일부에  집중하 여  돌파한  뒤  우회에  의한  종심기동,  차단,  포위로  한국군  제7사단의  지휘통제와  방어체계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상세히  기술했다. 3)  중공군의  ‘운동전  전법’과  우회에  의한  종심기동         기존의  전쟁사,  전례가  중공군의  운동전,  돌파,  우회,  차단,  포위,  종심기동 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전술적  관점에  의해  일관되게  이를  설명하기  보다는  드러난  현상을  하나하나  기술하는데  그치고만  아쉬움이  있었다. 『현리-한계전투』는  중공군이  방어하는  부대의  전방을  강력히  돌파한  후  빠른  속도로  우회하여  종심기동을  하면서  각  부대가  돌파와  차단을  결합한  포위  소멸 에  참가함으로써  다중  포위에  의한  방어부대의  격멸을  기도하는  ‘운동전  전법’이 라는  중공군  특유의  전술로  묶어  전투경과를  일관되게  설명했다.  4)  중공군의  공격과  한국군의  퇴각,  철수를  입체적으로  설명     『현리-한계전투』는  수많은  부대가  참가한  ‘현리-한계전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전훈을  염출할  수  있도록,  시간대별로  기술하 거나  부대별로  기술하는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일정  지역에서의  전투행위나  교전상황을  중심으로  피ㆍ아  쌍방의  공방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주안을  두고  작성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5&amp;vmode=full">35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35 특히,  한국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5사단이  중공군과  교전하면서  철수와  퇴각을  한  사실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가운데,  중공군이  종심  기동하여  약속된  시간에  포위  격멸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이들  한국군  사단의  선전(善戰)에  의한  것으로  재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이번  연구에서  찾은  점이  무엇보다  귀중하다  하 겠다.  5)  한국군  제3군단의  퇴각을  객관적으로  재구성         ‘현리-한계전투’에서  한국군  제3군단  예하의  한국군  제3사단,  한국군  제9사 단의  퇴각과  철수는  한국군  제3군단의  해체와  한국  육군본부의  작전지휘권  박탈 로  이어지는  치욕적인  패주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현리-한계전투』에서는  패주,  패퇴로  불리는  한국군  제3군단의  퇴각에  관련된  사실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주목하고  전훈을  얻을  수  있도록  이를  세부적으로  재구성했다.  6)  미  제2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의  반격작전  여건  마련         소양강에서  속사리에  이르는  75km의  대돌파구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미군 이  반격작전을  통해  북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  미  제2사단의  벙커고지  전투 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돌파구의  우측  견부를  확 보한  한국군  제1군단의  방어에  대한  주목은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 이다. 『현리-한계전투』에서는  ‘현리전투’,  ‘한계리전투’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을  하나 로  묶어  미  제8군,  더  나아가서는  유엔군의  작전  차원에서  당시의  전황을  통합적 으로  조직했다.  한국군  제7사단의  퇴각과  한국군  제3군단의  퇴각은  비판되고  미 군의  선전만  부각되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고  한국군  제1군단이  1951년의  전역 에  기여한  점을  확인하고자  했다.  7)  군사교리에  근거한  분석과  평가            연구  및  집필진이『현리-한계전투』의  집필과정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현 리-한계  전투사가  동어반복적인  사실의  나열이  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전투력이  약해서  패배했다  하고  준비가  미흡하여  기습을  당했다고  기술이  되면,  전투력을  강화하고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6&amp;vmode=full">36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36 군사연구 제127집 따라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전쟁사(戰爭史)의  학문적  원칙29)보다는,  있었 던  사실을  찾아내고  반복되는  현상을  분석하여  그  원인을  찾음으로써  그것을  평 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전투사(戰鬪史)적  관점30)을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전투 중심의  사고에  의한  전투력  강화’라는  뚜렷한  목적성을  가진  이  책이  군  구성원 의  전술관에  기여하기  위해서  기술과  설명의  기준을  군사교리에  두었다. 8)  지명(地名)과  시간(時間)의  정밀한  검증          집필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소요된  부분은  중국과  미국  양측의  문서를  대 비,  부대와  지명,  시간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재구성하여  이해하는  작업이었다.  시 간과  공간은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양측의  문서들이  주장하는  공격과  방어의  시간 이나  장소가  각기  달랐다.  이러한  각기  다른  주장을  합치시켜  실제의  사실을  재 구성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점에서  『현리-한계전투』는  후속연구나  이  책을  놓고  벌이는  전술토의  등 에  객관적인  자료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바. 군 원로 및 일반학계 전문가들의 의견     한계리전투의  주역이자  한국전쟁의  영웅이셨던  백선엽  예)대장은『현리-한계 전투』추천사에서  그동안  부정적이기만  했던  ‘현리-한계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소 나마  시정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하면서  “해가  갈수록  6․25전쟁의  본질과  역사의  소중함이  퇴색되어  가고  있는  이때에  육군에서  어려 운  연구를  통해  본서를  발간하게  됨을  의미있게  생각한다.  이  책과  같은  전쟁의  29) 리델하트는  그의  저서에서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단순하게  진실이라고  답 변했다.  즉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으로  진실을  꼽았다.  역사가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임무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전쟁사  연구의  학문적  원칙은  진실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Liddell  Hart,  Why  Don't  We  Learn  From  History?(London:  Allen  and  Unwin,  1946),  p.15. 30) 특히,  군사적  교훈을  도출하는  것은  해당  전투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다  심층  깊게  연구 하거나  관련되는  또  다른  전투사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동기가  됨을  전투사  연구  관점 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전투사나  전쟁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역사가로서의  입장 뿐만  아니라  군사평론가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해야  함을  주문하였다.  John  Votaw,  "An  Approach  to  The  Study  of  Military  History",  A  Guide  to  the  Study  and  Use  of  Military  History,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  Washington  D.C.,  198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7&amp;vmode=full">37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37 연구,  전투의  기록이  지속되어서  국가가  강건하고  국민들의  역사관이  바로  서게  되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당부하였다. 한편  군내의  중공군  전법과  전술에  대한  권위있는  전문가이자  군  원로인  전 략문제연구소장  홍성태  장군은  세미나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중국측  사료 들의  가치와  6․25전쟁사  연구의  상관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공군의  전법 과  전술에  대한  연구는  향후  벌어질지도  모를  전쟁에서  중국군의  전술을  이해 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금번  연구  발간된  『현리-한계  전투』는  중공군의  전술과  작전술적  차원의  분석을  중국측  자료를  인용하여  실시한  것에  대해  아주  높은  신뢰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현리-한계전투』 발간  기념  학술  세미나시  주제  발표자로  나섰던  고려대  정태헌  교수는  육군이  한국  전사  연구  맥을  계승하고  있음을  대외에  알리고  대 내적으로는  전사연구  종사자들의  자긍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전 쟁사,  전투사는  흔히  사회과학만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인문사 회과학이다.  사실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여  교훈을  도출함으 로써  인문학적인  의의는  물론  야전과  학교에서  활용성을  크게  높였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한다.  특히,  군과  학계가  공동으로  인문학분야에서  전쟁사를  연 구하여  이처럼  매우  훌륭한  산물이  탄생한  것을  보니  대단히  기쁘고  앞으로도  상호  연계하여  더  많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사  연구  전 문가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집필  자문위원으로  연구에  참여한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박사는  수요 자  중심의  전사  연구를  통한  군  전투력  향상과  관련해서  “현리-한계전투는  중 공군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전투로  한국전쟁의  10대  중요 전투의  하나로  주제선정과  연구방법,  시기  등이  적절하였다.  중공군과  미군의  1 차  사료를  바탕으로  전사를  재구성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등  지금까지  시도 되지  않았던  새로운  전투사  연구  방법을  적용한  첫  산물로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연구방법  면에서도  각종  사료의  비교분석과  미8군  역사관이나  중국  대사관  국방무관  인터뷰  및  항공정찰,  도보답사  등  실증적인  자료를  많이  활용 하여  연구  산물의  질을  높였다.  계속해서  전투사  시리즈가  더욱  발전된  모습으 로  연구되어  발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8&amp;vmode=full">38page</a><br><br> .. 현리-한계전투 발간의 의의 38 군사연구 제127집 Ⅳ. 향후 추진 『현리-한계전투』의    연구  및  집필에는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한국전쟁연구과의  집필진을  비롯하여  참전  군  원로,  학계전문가,  사관학교와  학교기관  전쟁사  교수 는  물론  야전부대의  작전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수차례의  지형정찰,  자체토 의  및  워크숍,  자문회의를  거치는  등  2중,  3중의  검증과정을  거쳐  신뢰도는  물론 이고  전투내용의  객관성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은  향후  육군의  공간사로써  계속  발간될  ‘6․25전쟁  전투사  시리즈’의  제1 권으로  기획되었다.  첫  시도이니  만큼  이전과는  다른  관점과  방향성을  가지고  추 진되었다.  이  책에  적힌  여러  가지  주장과  밝혀낸  사실들에  대한  이견과  문제제 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육군의  전투사  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육군  구성원의  전투중심의  사고를  위해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의미 가  있을  것이다.  육군  군사연구소에서는  금번  연구에  사용된  1차  사료  및  번역본,  2차  자료,  사 진  및  동영상  자료  등을  존안하여  육대  등  교육기관에  제공함으로써  좀더  깊이있 는  6․25전쟁사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현리-한계전투』는   지속적으로  보완될  것이다.  동시에  전투력  발전 을  위한  Case  Study식  교육을  병행하기  위해  야전  및  학교기관을  대상으로  순회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7월  3일에는  3군단  간부들을  대상으로  교 육을  실시하여  현리-한계전투에  대한  재조명과  전투사례가  내포하는  중요성  및  의미에  대해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제2권  ‘화천-파로호  전투’  연구  및  발간을  위한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1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구는  총  7단계(준비,  자료수집  및  분석,  연구  및  초안작 성,  감수  및  토의,  집필,  검증,  최종보완)에  걸쳐서  진행될  예정이며  준비단계에서 는  연구위원  위촉,  토의,  연구방향  및  집필주안점  등을  토의하여  내실있는  전투사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인트라넷이나  웹메일을  통한  육군  구성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이  있다면  ‘6․25전쟁  전투사  시리즈  ’는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의  전투사가  될  것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39&amp;vmode=full">39page</a><br><br> .. 1 특 집 군사연구 제127집  39 Ⅴ. 결      론 지금까지  『현리-한계전투』발간에  따른  그  의의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리-한계전투’의  내용은  전쟁사,  전투 사  연구에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단지  ‘현리-한계전투’가  산악지형에서  이루어진  전술적인  차원의  공방전이었지만,  전투의  승패여부가  때로는  작전적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전례31)라는  것이다. 군사연구소에서는  책의  발간에  즈음하여  『현리-한계전투』발간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여  6․25전쟁  전투사  연구의  의의를  제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러 한  세미나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연 구  네트워크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전사  연구의  붐이  조성되고  공감대  형성에  크 게  기여했다. 이렇게  볼  때  금번  연구  산물  『현리-한계전투』는  군과  학계가  한  목소리로  6․25전쟁  연구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판단된다.  즉  이  책자의  발간은  ‘한국적  전쟁수행  방식’  연구를  위한  뿌리를  제공하고  전사  연 구의  학문적․군사적  의의를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손자는  그의  병법(兵法)  제1편  시계(始計)  첫  구절에서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 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라  하여  전쟁을  국가의  존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쟁을  연구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겠다.  미국의  먀살  장군은  “전쟁사  연구는  모든  군인들이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과업이며  이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조국과  부하 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전쟁사  연구는  군인의  본분임 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육군의  역사  및  전쟁사를  연구․편찬하는  군사연구소장으로서  이번  『현리-한계전투』의  발간을  계기로  소홀해져가는  간부들의  전사연구  분위기를  일대  쇄신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봄과  동시에  전쟁사  탐독  및  학습을  통해  ‘강한군대  강한전사’  육성의  기반이  조성된다는  것을  강조하 고  싶다. 31) 최용호,  “한국전쟁의  작전술  사례  연구”,  『군사평론』제352호  부록,  (대전:  육군대학,  1999),  p.9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0&amp;vmode=full">40page</a><br><br> 군역사 및 역사일반 &lt;a href="#41"&gt;42 한국 근현대사&lt;/a&gt; &lt;a href="#41"&gt;-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lt;/a&gt;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1&amp;vmode=full">41page</a><br><br> .. 대령    이 내 주  육군사관학교 군사학과 교수  Ⅰ.  머  리  말  Ⅱ.  본        론       1.  역사의  제  유형       2.  한국현대사의  쟁점 Ⅲ.  맺  음  말 &lt;필자 약력&gt; 육군사관학교, 서강대학교 대학원, 영 서섹스 대학교 / 대학원 졸업(역사학 박사),  육사 군사학 교수, 육군박물관장(현) &lt;저서&gt; 서양무기의 역사, 처칠, 키치너, 그리고 해밀턴의 삼중주, 전시 리더십 연구, 제1차 대전은  왜 대량살육전이 되었는가? 세계대전과 영국 과학기술교육의 발전 42 군사연구 제127집 군역사 및 역사일반 한국  근현대사  한국  근현대사  -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2&amp;vmode=full">42page</a><br><br> .. 2 군역사 및 역사일반 군사연구 제127집  43 Ⅰ. 머  리  말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E.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로  정의하였다.  극과  극이  공존할  정도로  아니면  모든  것들이  극단으 로까지  치달렸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시대였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상당한  정도 로  타당성이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  문명을  이루며  살아온  수천  년의  세월들  속 에서  지난  20세기만큼  엄청난  변화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전개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특히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과거  세기의  100년에  걸친  변화 가  20세기의  10년에  이루어진  발전보다  못하다는  평가까지  내려질  정도이다. 국내의  한  학자는  홉스봄의  정의를  좀  더  쉽게  풀어서  20세기를  ‘커다란  역설 의  세기’로  단정하였다.  다시  말해,  서로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극단들 이  공존한  세기였다는  것이다.  우선,  20세기는  ‘전쟁과  평화’의  세기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1945년  이후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총성이  들려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20세기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인류가  평화를  만끽하면 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두  번째로,  20세기는  ‘독재와  인권’이  공존한  세기였다.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 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  등  수많은  독재자들이  출현하여  인류를  학살하고  억압 한  시대였던  반면에,  20세기만큼  사람들의  인권이  신장되고  보장을  받은  시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지금도  세계에는  독재자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자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지만,  19세기처럼  집단적인  농노제(農奴制  :  농민이  봉건  지주 에게  예속되어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부역과  공납의  의무를  지던  사회  제도)나  노예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  번째로,  20세기는  ‘풍요와  빈곤’이  공존한  세기(世紀)였다.  ‘살과의  전쟁’  또 는  ‘다이어트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20세기는  물질적  풍요가  넘쳐난  시대였다.  심지어는  개들도  엄청난  호강을  누리며  사는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동시에  지구 의  다른  구석에서는  극단적  빈곤이  도사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에서도  화려한  외관을  한  꺼풀만  들추어  봐도  밥  세  끼니를  제대 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20세기의  끝 자락에  와서  진행된  세계화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의  상태는  더욱  심화되어  빈곤 층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3&amp;vmode=full">43page</a><br><br> .. 한국 근현대사 -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44 군사연구 제127집 마지막으로,  20세기는  ‘문명과  반  문명’이  공존한  시대였다.  20세기만큼  인간의  이성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운  시기도  없다.  서구  사상의  한  축인  합리주의가  각종  획기적인  발명과  특허  등으로  우리의  삶의  조건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반면에,  인간의  이성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상호파괴로  점철(點綴)되었고,  뒤이어서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학살  및  스탈린 에  의한  자국민  숙청  등과  같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하였 다.  이처럼  우리가  얼마  전까지  살았던  20세기는  서로  극단적인  요소들이  공존 한  ‘역설의  세기’였다. 그렇다면  20세기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우리나라  역시  세계사의  흐름 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동  시대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한  변화를  경험 했다고  볼  수가  있다.  1910년에  조선왕조  5백년이  끝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 작되었다.  3․1운동과  같은  거족적  민족운동과  각지에서  각양의  모습으로  독립운 동을  전개한  결과  1945년에  해방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깐,  한반도 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을  경계로  들어왔고,  일시적일  것처럼  보였던  남북 분단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인해  고착화되었다. 전후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에  하나였다.  배고픔이  철철  넘쳐나던  나라였다.  바야흐로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빠른  경제성장에  성공한  덕분에  오늘날에는  OECD  회원국이자  세계  11대  무역국가로  발전하였다.  제2차  대전  이후에  독립한  140여개의  국가들  중에서  이른바  ‘산업화’  및  ‘민주화’라는  쌍두마차에  올라타는데  성공한  거의  유일한  국가로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쓴  ‘위국헌신  군인본분’처럼  과연  이  나라는  내가  목숨을  바쳐서  지킬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과거  우리의  역사를  보면,  명암이  교차되어  왔 음을  알  수가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사업  및  신라의  화 랑도  활동,  고려의  금속활자  및  팔만대장경,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및  이 순신  장군의  거북선  등은  우리  역사를  밝게  비추는  기분  좋은  사실들이다.  이에  비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민비  시해사건과  같은  한말의  각종  굴욕적인  사건 들,  그리고  한일합방  등과  같이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영광이 든  치욕이든  간에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온몸으로  맞서면서  이  강토를  지켜왔고,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를  잘  가꾸고  보존하여  후손에 게  전해  줄  사명이  있다.  더구나  우리는  국가와  영토  수호를  주  임무로  삼고  있 는  군인들이  아닌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4&amp;vmode=full">44page</a><br><br> .. 2 군역사 및 역사일반 군사연구 제127집  45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역사를  어떠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가?  최근에  한국근현 대사,  특히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한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역사  이해에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역사를  바 라보는  다양한  시각들  중에서  군인  신분인  나는  어떠한  관점으로  한국현대사를  이해해야  하는가?  바로  이러한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 적이다. Ⅱ. 본      론  1. 역사의 제 유형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E.  H.  카는  명저『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카는  역사가의  기본  임무는  과거 의  사실을  밝히는  것이지만,  그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는  근원적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  역사는  현재에  살고  있는  역사가가  과 거에  일어난  사건을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해석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과정 에서  역사가  자신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학이  객관적인  반복  실험이  가능한  자연과학  분야의  학문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역사를  ‘좌’로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려던  ‘참여정부’시대가  끝나고,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이해하려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도  어느새  1년이  지나 가고  있다.  그동안에  우리가  각종  언론매체들을  통해  접하였듯이,  현  정권은  국정 의  제반  측면에서  과거  정권과의  단절을  꾀하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  중에서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찬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바로  1945 년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이다.  원래  역사학의  속성이  갖 고  있는  재해석의  가능성에  ‘민족’이라는  코드까지  더해지면서  한국현대사는  매우  복잡한  스펙트럼(Spectrum)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역 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를  보는  자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과거에  일어난  동일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다르 게  이해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라볼  때  끊임없이  반추(反芻)해야  할  핵 심적인  두  가지  질문은  ‘누가  그랬을까?’와  ‘왜  그랬을까?’이다.  바로  이  두  가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5&amp;vmode=full">45page</a><br><br> .. 한국 근현대사 -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46 군사연구 제127집 질문  속에  역사를  보는  시각과  설명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인간집단들  속에  특정한  계층이나  개인이  나름대로의  기준과  목표를  갖고서  엮어 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과거  역사를  보는  관점을  세  가지로  대별(大別)할  수가  있다.  첫째,  자유주의  사관이다.  이는  역사의  흐름을  개인  자유의  확대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 하는  중산층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온  과정으로  해석한다.  이에  의하면  1896년경 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과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은  ‘동학혁명’이  되는  것 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기본적  자유를  탄압하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 정(虐政)에  대해  정당하게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섰기  때문이다. 둘째,  이와  대비되는  관점으로  보수주의  사관을  들  수가  있다.  이는  역사의  흐 름을  저명한  정치가나  장군,  외교관  등과  같이  해당  사회의  엘리트들이  이끌어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서  변화의  핵심은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이 해관계이며,  이  와중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엘리트들의  몫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동학운동은  혁명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 항하여  전봉준과  농민들이  국가의  질서를  파괴한  ‘동학란’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사관,  즉  민중사관이  있다.  이는  역사적  변화의  주체 를  힘없는  일반대중(또는  민중)으로  보고,  변화의  핵심  요소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계급갈등으로  설정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역 사의  전개과정을  자유의  확대로  본데  비해  이들은  이를  평등의  확대라고  주장한 다.  이에  의하면,  동학운동은  혁명도  반란도  아니고  착취계층인  양반층과  피착취 계층인  농민층  간에  갑오년에  벌어진  ‘계급전쟁’인  것이다.  한마디로,  보수주의사 관이  ‘위로부터의  역사’라면,  민중사관은  ‘아래로부터의  역사’이고,  자유주의사관은  ‘옆으로부터의  역사’라고  규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근현대사를  어떠한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유감스럽게 도  우리나라  근현대사  설명에는  좀  더  복잡한  요소들이  스며져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근현대사  해석  시에  긴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아킬레스건(Achilles腱) 적  사건들은  1945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있었던  일제  식민통치의  경험과  그  이 후의  남북분단이라고  볼  수가  있다.  즉,  전자에서는  하나의  민족이  독립국가를  이 루지  못하고  식민지배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고,  후자에서는  한  민족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Ideology)를  가진  두  국가로  분열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에서  공통되는  요소인  ‘민족’이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6&amp;vmode=full">46page</a><br><br> .. 2 군역사 및 역사일반 군사연구 제127집  47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해석에서  민족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서  현대사를  보 는  관점이  상이해지고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민족주의  사관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에  형성  및  성장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채호와  박은식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학자이자  독립운 동가들이  정체성,  사대성,  타율성  등을  강조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 의  자주와  독립을  외치면서  우리의  과거역사를  이러한  기준으로  해석하였던  것 이다.  우리가  국가도  없이  일제식민지  통치하에  놓여있던  터인지라  이러한  관점 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이  되었고,  단일하 다고  믿었던  민족이  타의에  의해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갈라지게  되었 다는  점이다.  그것도  서로  대립되는  이데올로기를  각자의  국가  이념으로  표방하 면서  말이다. 민족이라는  키워드(Key  Word)로  한국현대사를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이  세  가 지  세력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우파  민족주의  진영을  들  수가  있다.  이들 은  역사해석에서  민족을  강조하지만,  이들이  민족이라는  코드로  추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민족의  과거이다.  역사  속에서  민족의  영광이나  민족의  힘이  과시된  부분을  중점적으로  찾아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권위와  질서가  확고하 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칫하면  국수적인  경향으로  흘러서  과 거의  역사를  당장에  믿고  싶은  사실들만을  선택하거나  필요에  따라  과장하는  우 (愚)를  범할  수가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와  대비되는  세력으로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은  역사해석에서  민족을  내세우는  면에서는  우파  민족주의  진영과  유사하지만,  남북 한이  분단된  현실에서  국가보다  민족을  우선시함으로써  대한민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  공산정권을  옹호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인권 이나  빈부격차,  노동운동  등을  강조하기에  자칫하면  국민들  사이에  화합보다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따라서  분열보다는  단합을,  갈등보다는  화합을  강 조하는  우파의  노선과  충돌할  수가  있다.  아무래도  군인들의  경우에는  기본  임무 가  국가의  안위와  질서  유지이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해야  할  관점이라고  볼  수 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진영을  들  수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들은  역사해석에서  민족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의  영광이나  민족의  통합보다는  국가의  법치  하에서  누리는  개인자유를  더  소중한  것으로  내세운다.  한마디로  탈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7&amp;vmode=full">47page</a><br><br> .. 한국 근현대사 -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48 군사연구 제127집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들은  최근에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좌(左)  편향적  현대사  해석에  대응하여  ‘뉴라이트’란  이름으로  대안교과서 를  발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에는  민족이란  화두 가  일종의  ‘선’으로  인식되었던  일제식민  통치기에  대한  해석에서  경제적인  측면 에만  집중한  나머지  민족  독립운동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반면에  일제의  식민 통치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할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2. 한국현대사의 쟁점 한국현대사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결정적  계기는  고등학교에서  교재로  사 용하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2004년  10월  초에  교육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한나라당의  모  국회의원이  고등학교  역사교재  시장 의  약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금성출판사의  &lt;한국근현대사&gt;  교과서  내용을  문제  삼았고,  이것이  교육계를  넘어서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에  의하면,  이  교과서의  내용들  중에서  특히  1945년  직후에  대한  서술이  너무  좌 편향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lt;조선일보&gt;  및  &lt;동아일보&gt;와  같은  보수  성향의  언론매체들이  가세하면서  문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얼마  후에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2005년  초경 에  ‘뉴라이트’라고  불린  일단의  연구자들이  좌파적  경향에  대항하여  &lt;교과서  포 럼&gt;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조직의  결성  목적을  알리는  자리에서  자신들은  ‘좌편 향도  우편향도’  아닌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을  천명하였지만,  이후  이들의  활 동  내용을  추적해  보면  다소  후자의  성향이  강함을  알  수가  있다.  바야흐로  기존  교과서에  대한  학문적  비판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2006년  11월에  &lt;교과서  포럼&gt; 이  준비한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대안교과서  시안이  언론에  발표되면서,  다소  진 정되려던  논쟁의  열기가  새롭게  가열되었다.  2008년  3월  말경에  정식으로  대안교 과서가  발간되면서  다시한번  논쟁의  열기가  정치권까지  망라될  정도로  국가적  관 심을  유발하게  되었다. 대안교과서는  금성출판사의  기존  고교용  한국근현대사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 적  성과를  달성했다고  평가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우선  일제식민  통치와  관련 하여  대안교과서는  ‘차별과  억압은  있었지만  경제발전과  시장경제  기반이  형성’된  시기로  파악하였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해서도  ‘농민  수백만  명의  토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8&amp;vmode=full">48page</a><br><br> .. 2 군역사 및 역사일반 군사연구 제127집  49 권리를  강탈한  만행’이라는  기존  평가와는  달리  ‘토지거래를  활성화시키고  재산권  구축으로  금융  발전에  기여’한  사건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해방  이 후의  역사에  대한  평가도  적극적이다.  예컨대,  ‘남북분단을  초래한  단초를  제공한  것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었다’는  좌파  진영의  해석과는  달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기반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 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  여건  하에서  친일파  처리  문제의  불가피성과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졌다.  이는  1960년대에  핵심사건인  5ㆍ16 군사정변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키워드(key  words)는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까지에는  ‘민족’과  ‘국가’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1960년대  이후 의  경우에는  ‘산업화’와  ‘민주화’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키워드를  통해  분단책임,  해방정국의  두  대표적  인물인  이승만과  김구의  위상,  이 승만  정권의  성격,  박정희  통치의  명암,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공과에  대한  다양 한  평가가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든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배타적,  폐 쇄적인  민족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계는  점점  더  혈연적  민족의  잣대보다는  인류  보편의  잣대인  ‘개인자유의  신장  및  복지의  증진’ 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한마디로,  민족은  20세기의  한국사를  조 망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기준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이처럼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근본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이미  역사학의  본질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역사학은  시간의  흐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에  대해  알  수가  있는가?  이는  바로  과 거에  남겨진  기록물이나  유물,  즉  통칭하여  사료(史料)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사 료  스스로는  말을  못한다.  여기저기  사료들에  기록되어  있는  관련  내용들을  수집  및  선별하여  이를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하는  주체는  현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역사가 이다.  사료와  일반대중  사이에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역사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현재에  발을  딛고  있는  역사가가  사료라는  매개 를  통해서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살려내는  것이  역사적  작업인데,  이때  역사가가  어떠한  성향의  사람인가  그리고  현실의  영향에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과거에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49&amp;vmode=full">49page</a><br><br> .. 한국 근현대사 -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50 군사연구 제127집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경우에는  과거에  일어났던  현 상을  동일한  조건을  투입하여  반복  실험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과거  경험 을  다루는  역사학의  경우에는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여  재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 면  주체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에  대한  해석이  역사가에  따라서  또는  그가  처한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 다.  심한  경우에는  해당  사건에  대한  왜곡이나  과장  및  축소도  배제할  수가  없다. 역사학의  객관성과  주관성에  대한  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대  역사 학이  등장한  19세기  중엽이래로  줄기차게  제기되고  고민해온  문제이다.  근대  역 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는  역사학의  객관주의를  주장 하였다.  그의  유명한  격언인  “본래  일어난  그대로(wie  es  eigentlisch  gewesen)” 가  이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그대로  현재 에  재현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고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극 (極)’  사실주의라고  볼  수  있는  그의  주장  덕분에  역사학은  철학이나  문학  등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과거  사실 을  밝히는  것이  역사학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랑케의  객관주의는  후속  학자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크로체(B.  Croce),  콜링우드(R.G.  Collingwood),  베커(C.  Becker),  그리고  베어드(C.  Beard)  등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은  역사가의  주관  개입의  불가피성을  내세우면서  랑케의  입장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사’라고  하여  역사가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의  관점이  역사해석에  투영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였고,  심지어  베커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역사 가’라고  하여  주관성  개입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인  표 현은  베어드의  ‘저  고상한  꿈(That  Noble  Dream)’이라는  글의  제목일  것이다.  베 어드는  미국  역사학회장  취임연설에서  랑케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엄정한  객관성  유지가  가능하다’는  견해는  하나의  꿈에  불과할  정도로  너무  순진한  발상 이라고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역사해석에서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객관성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여  카(E.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지만,  역사적  작업에서  역사가의  주관성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입장이  다양한  것 은  당연하다고  볼  수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쪽에서는  역사해석에서  민족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0&amp;vmode=full">50page</a><br><br> .. 2 군역사 및 역사일반 군사연구 제127집  51 및  민주화를  강조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  및  산업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역사작업이라고  볼  수가  있다.  역사를  보는  눈은  다 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나  과장을  허용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은  인정될  수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역사적  사 실  자체를  훼손하는  일은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  학자들이  추구해  온  ‘실 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 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은  당분간은  기분  좋지만  머지않아서  ‘부메랑’이  되 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에까지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일본의  교 과서  왜곡사건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부터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    Ⅲ. 맺  음  말 지금까지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전문역사가나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논의로  생각될  수  있다.  그저  단순히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변적인  얘기들은  구태여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따라서  좀  더  실제적인  문제는  ‘그렇다면  나는  어 떻게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즉,  일반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현대사를  어떠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역사를  학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균형된  역사의식’을  함양하기  위함이 다.  성서에  보면,  “너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표현이  있고,  유교에 서는  ‘중용’을  강조하고  있다.  공평한  입장에서  역사를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균형감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나는  역사  이해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가지  유용한  방법 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다름  아니라  ‘운전론’으로  ‘역사  이해는  운전과  같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운전할  시  좌우  구분선의  중앙으로  반듯하게  가려고  노력  하듯 이  역사  이해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좌나  우로  치우치는  경우에라도  좌우의  구분선  경계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운전  실력이  부족한  내가  운전할  시  ‘웬지  자꾸만  우측으로  붙는  고벽’을  갖고  있듯이,  약간  우측으로  붙는다는  자세 로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군인들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1&amp;vmode=full">51page</a><br><br> .. 한국 근현대사 -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52 군사연구 제127집 직업  특성상  보수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운전론’은  역사의  유용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우리는  왜  역사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가?  무엇보다도  과거  우리  조상들의  삶의  기록인  역사로부터  무엇인 가  현재  및  미래의  나의  삶에  유용한  교훈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는  운전할  시  간혹  좌우측에  달려  있는  빽밀러를  쳐다본다.  다시  말해,  간혹  과거를  뒤돌아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운전자가  뒤쪽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과거  역사를  공부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거  조상 들의  삶의  기록인  역사학은  상당한  유용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는  정직하게  잘  활용하면  개인이나  민족에게  ‘좋은  약’이  되지만,  만일  이 를  왜곡하거나  과장한다면  언젠가는  ‘나쁜  독’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능한  한  균형감각을  갖고서  역사에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민족의  영광을  드높인다’는  미명  하에  또는  ‘같은  민족인데  좋은게  좋 은  거지’라는  얄팍한  동정심  하에  우리  역사에서  믿고  싶은  사실들만을  추려내어  교육하는  문제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20세기  전반기에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의  국수주의,  그리고  최근의  지나친  좌  편향적  역사해석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역사의  왜곡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해당  민족에게  치명 상을  입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2&amp;vmode=full">52page</a><br><br> .. 2 군역사 및 역사일반 군사연구 제127집  53 1.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기파랑,  2008) 2.  김광동  외,  『한국현대사  이해』(경덕출판사,  2008) 3.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푸른역사,  2000) 4.            ,  『‘단단한’  근대와  ‘부드러운’  근대』『역사와  문화』창간호(2000)  5.  김영호,  『건국  60년의  재인식』(기파랑,  2008) 6.  김일영,  『건국과  부국  :  현대한국정치사  강의』(생각의  나무,  2004) 7.  김현식,  『역사,  위험한  거울』(푸른역사,  2001) 8.  손영호,  『역사의  이해  :  역사의  의미에서  인식까지』(학지사,  1999) 9.  안병직,  『한국사회에서의  기억과  역사』『역사학보』193집(2007) 10.  양병우  편,  『역사가와  역사인식』(민음사,  1989) 11.  이기백,  『한국사를  보는  눈』(문학과  지성사,  1994) 12.  이성무,  『대한민국  60년』,『군사연구』126집(2008) 13.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2008) 14.  이주영,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배재학당  총동창회,  2008) 15.  정경희, 『역사교육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이념논쟁  비교』『미국학논집』  40/3(2008) 16.  정두희,  『하나의  역사,  두개의  역사학』(소나무,  2001) 17.  차하순,  『역사의  본질과  인식  :  개정판』(학연사,  2007) 18.  한국  근현대사  간행위원회  편,『사실로  본  한국  근현대사』(황금알,  2008) 19.  한배호,  『한국정치사』(일조각,  2008) 20.  한영우,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우리  역사와의  대화』(을유문화사,  1991) 21.  Bloch,  M.  (정남기  역),  『역사를  위한  변명  :  역사가의  사명』(한길사,  1981) 22.  Carr,  E.  H.  (김택현  역),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1996) 23.  Iggers,  G.  (임상우․김기봉  역),  『20세기  사학사』(푸른  역사,  199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3&amp;vmode=full">53page</a><br><br> 전쟁사 &lt;a href="#54"&gt;056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lt;/a&gt; &lt;a href="#78"&gt;080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lt;/a&gt; &lt;a href="#108"&gt;110 6·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lt;/a&gt; &lt;a href="#123"&gt;125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전 특성 연구&lt;/a&gt;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4&amp;vmode=full">54page</a><br><br> .. 전문연구원    반 반 기 기 성 성 연세대학교 지구환경연구소 연세대학교 지구환경연구소 Ⅰ.  서        론 Ⅱ.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아프리카의  정세 Ⅲ.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대비 Ⅳ.  동아프리카  전쟁발발과  초기전투 Ⅴ.  탕가전투 Ⅵ.  탕가전투  이후의  동아프리카  전투 Ⅶ.  기상의  영향 Ⅷ.  결        론 &lt;필자 약력&gt;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신학석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수료 &lt;저서&gt; 날씨토픽, 전쟁과 기상, 그림과 시, 날씨이야기, 태풍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자연은 몸으로  날씨를 말한다, 저녁에 수탉이 울면 비가 올까 외 다수 56 군사연구 제127집 전쟁사   1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5&amp;vmode=full">5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57 Ⅰ. 서      론 “압도적인  적  앞에  굴하지  않고  싸워  전투마다  승리한  장군,  영국을  납작하게  만든  장군,  게르만  민족의  영웅  포르베크(Vorbeck)  장군!” 포르베크(Vorbeck)  장군은  1차  대전  때  동아프리카  전투에서  영국군과  싸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장군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가  아프리카에서  귀국하 자  독일은  브란덴부르크에서  대대적인  승전  퍼레이드(Parade)를  벌여주었다.  전 쟁에서  진  독일이  퍼레이드를  벌여준  것은  그가  국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20년이  지난  후  히틀러(Hitler)는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 해  포르베크  장군을  이용했다.  독일이  1차  대전에  패한  것은  작전의  실패였기  때 문이지  독일민족이  열등했기  때문에  패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포르베크를  활용 한  것이다.  그만큼  포르베크는  전략,  전술뿐  아니라  리더십(Leadership)에서도  보 기  드물게  뛰어난  장군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페인을  침공한  프랑스군에  맞선  영국의  웰링턴 (Wellington)  장군은  스페인의  지형과  기후를  적절히  활용하여  프랑스군에  막대 한  타격을  주었다.  정면  승부로는  이길  수  없었기에  웰링턴  장군은  공격한  후  후 퇴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프랑스군은  웰링턴의  영국군을  잡으려고  스페인의  척박 한  산악과  황야를  행군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프랑스군은  추위와  무더위와  갈증,  그리고  스페인  국민의  게릴라전으로  무수히  죽어갔다.  결국  나폴레옹은  패 배를  자인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동아프리카  전투에서  웰링턴이  스페인에서  사용했던  방법을  활 용하는  장군이  나온다.  독일의  포르베크  장군이다.  그는  전력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  막강한  영국군에  맞서  웰링턴식  히트  앤드  런(Hit  and  Run)  전술을  사용했 고,  철저히  동아프리카의  지형과  날씨를  전투에  활용하였다.  ‘온고이지신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1)’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어났던  전사를  살피고  공부하는  것은  예전의  것을  알아야  현재나  미래의  전투에  응용할  수  있으며  그것 이  전쟁에  승리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요소는  1)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6&amp;vmode=full">56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58 군사연구 제127집 무수히  많다.  병력의  수와  질,  전략,  전술,  보급의  정도,  제너럴  십(Generalshin),  병사들의  사기,  무기체계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외에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 다.  날씨와  지형이다.  열세인  병력과  무기체계로  강한  군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연을  나에게  가장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포르베크  장군은  이 를  철저하게  활용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던  정말  위대한  장군이었다.    Ⅱ.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아프리카의 정세 1914년  6월  28일  19살의  세르비아  대학생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독일과  터키,  불가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고,  나머지  국가가  이에  대항하여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2)  전쟁이  시작되자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  단기전으로  승리하기  위한  슐리펜(Schlieffen)계획3)으로  밀고  나갔다.  슐리펜(Schlieffen)계획 은  먼저  파리를  함락시키고,  프랑스를  항복시킨  후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러시아 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의  저항이  거세어  서부전선은  고착상태로  들어갔고,  러시아의  동원이  빨리  이루어지면서  장기전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에  돌입했다.  엄청 난  물량을  쏟아  붓는  가운데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유럽이  전쟁에  빠졌을  때  이들  나라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고민에  빠져  버렸다.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  아프리카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다.  특 히  동부지역을  보면  북쪽으로부터  남쪽까지  직선으로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잠비아,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거의  모든  국가가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  중간에  위치한  탄자니아가  독일의  식민지였고,  말라위와  모잠비크는  포르투갈 의  식민지였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유럽  본토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영국과  독일이 었다.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를  다스리던  영국과  독일  총독들은  본국과  달리  평화  롭고  사이좋게  지냈다.  특별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영국과 2)  미야자키  마사카츠,  오근영  옮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2,  랜덤하우스,  2002,  p.178. 3)  노병천,  세계도해전사,  연경문화사,  1996,  p.162.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7&amp;vmode=full">5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59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벨기에 독립  국가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lt;그림  1&gt;  1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를  지배한  식민지  국가영토 독일  본국의  정책도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까지  전쟁을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 았다.4)  유럽  전쟁에  투입할  전력도  모자라는데  아프리카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 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이곳 아프리카 식민지 는  1차  세계  대전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이오. 다만  한  가지  이곳이  독일령  탄자니아와  아주  가깝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오.”  (영국령  케냐의  총독이었던  콘웨이  벨필드  경) 마찬가지로  독일령  탄자니아  총독이었던  하인리히(Heinrich)도  같은  생각을  가 지고  있었다.  영토  확장에  눈  먼  유럽  사람들의  전쟁에  아프리카인들을  끌어들이 고  싶지  않았다.  또  현실적인  판단도  작용했다.  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의  군사력이  독일에  비해  월등했다.  게다가  해군력을  영국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만일  전쟁이  벌어진다면  독일  본국에서의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4)  윌리엄  위어,  이덕열  옮김,  세상을  바꾼  전쟁,  시아출판사,  2005,  p.156.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8&amp;vmode=full">58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0 군사연구 제127집 독일  총독  하인리히(Heinrich)는  1885년  베를린에서  맺었던  합의5)를  영국에  제 시했다.  하인리히(Heinrich)는  아프리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과  영국뿐이라 고  생각했다.  포르투갈과  벨기에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인리히는  영국  영사를  통해  영국을  설득했다.  영국도  아프리카에  있는  독일  식민지가  엄격 하게  중립을  유지한다면,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중립성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아프리카에  평화가  유지되는  듯  보였다.  Ⅲ.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대비 동아프리카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대표적인  나라는  영국과  독일이었다.  영국은  남부아프리카에서  보어전쟁과  줄루족과의  전투를  통해  원주민을  무시하고  잔학하 게  대했다.6)  “영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영국  사람들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보는 일은 절대 없다.”               (카렌 블렉센) 덴마크인  블렉센(Blixen)의  말처럼  영국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열등한  민족이며  개․돼지처럼  취급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영어를  읽고  쓰는  교육에  반대했다.  이에  반해  하인리히  총독이  다스리던  탄자니아의  독일령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독일 인들도  영국인처럼  아프리카  원주민  위에  군림한  것은  같았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보다  인간적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백인들과  같은  정도로  재능을  갖고  있 으나  계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하다고  보았다.  탄자니아에는  학교가  1천  여  개  세워졌다.  독일령  탄자니아의  원주민들이  글을  읽는  수준은  아프리카에서  가 장  높았다.  독일은  탄자니아에  열대  생태학과  열대  농업  연구  기관을  세웠다.  대 규모  커피  농장을  만들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향상시켰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원주민들이  농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땅이  개간되고  개발되었다.  5)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합의에  동의한  나라들이  동의할  경우  아프리카의  모든  식 민지들은  중립으로  남는다는  내용. 6)  정토웅,  전쟁사  101장면,  가람기획,  1997,  p.261.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59&amp;vmode=full">5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61 전쟁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에도  양국의  차이가  있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몇  차례  전쟁을  치렀던  영국은  독일이  상대가  되리라 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  안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주 민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영국군은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가장  나쁜  소총을  지급했다.  영국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  병사들의  소총  성능이  좋아지는  것을  원 치  않았다.  영국군은  원주민들이  영국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도  있는  무기로  무장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좋은  무기를  줄  경우  원주민들이  백인  상관을  존경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보유한  군  장비는  거의  고물이었고  원 주민  병사들은  제대로  훈련되지도  않았다.  이에  비해  독일령에  살던  아프리카  원주민이  가진  소총은  영국령  원주민과  비 슷했지만  많은  훈련을  받았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의  식민지  전쟁에  참여했던  프 린츠(Prinz)라는  군인이  전역한  후  탄자니아에서  흑인과  백인  지원병부대를  창설 했다.  그는  수백  명의  흑인  아스카리스7)를  강인하게  훈련시켰다.  흑인  원주민들 은  독일  정규군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프린츠(Prinz)는  동아프리카의  독일령  탄 자니아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파울  폰  레토우-포르베크(Paul  von  Lettow-  Vorbeck)  대령(후에  장군으로  진급되었음.  다음  문장부터는  장군으로  기재)에게  훈련시킨  아스카리스(Askaris)  부대를  인계했다.  &lt;그림  2&gt;  포르베크  장군의  모습 7)  아랍  군인이라는  뜻의  아스카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군이  흑인  원주민을  훈련시켜  만든  부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0&amp;vmode=full">60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2 군사연구 제127집 독일  병력은  초기에는  백인  장교  몇  명과  수백  명의  아스카리스(Askaris)  원주민  병사들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들이  보유한  무기는  형편없었다.  이들은  구식  모젤  1871  소총으로  무장했다.  이  소총은  단발식이며  흑색  화약을  사용했는데  한  발  쏠  때마다  흰  연기구름이  생겼다.  구식  모젤  소총은  전쟁에서  쓰기에는  형편없는  소총이었다.  포르베크  대령은  베를린에  새로운  소총을  보내달라고  끊임없이  청원 했고  숫자는  적지만  기관총과  성능  좋은  소총을  구할  수  있었다.  Ⅳ. 동아프리카 전쟁발발과 초기전투 독일  총독  하인리히가  꿈꾸던  동아프리카의  평화는  독일의  순양함  때문에  깨져  버렸다.  독일  순양함  쾨니스베르크(Konigsberg)호가  영국의  시티  오브  윈체스터 (City  of  Winchester)호를  공격한  것이다.  분노한  영국은  즉시  쾨니스베르크 (Konigsberg)호를  찾아  출동했다.  영국  해군의  중순양함  2척은  쾨니스베르크호 (Konigsberg)가  출항했었던  탄자니아의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8)에  진입했다.  그 곳에  독일  순양함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영국  해군은  그곳에  있는  무선  송 수신  탑을  포격했다.  하인리히  총독의  평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동아프리 카로  옮겨  붙은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하인리히  총독은  내륙  깊숙이  도망쳤다.  이젠  영국에  대응하거나  항복하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동아프리카  독일령  식민지에서  군사지휘관은  포르베크  장군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상당  부분  배려하는  총독의  정책에  찬성했었다.  다만  앞으로  동아프리 카에서  전쟁이  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총독과  달랐다.  총독에게  싫든  좋든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건의는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  군인이라면  적국에게  타격과  부담을  주어 야  한다고  믿었다.  유럽에서  독일과  대치하고  있는  영국의  군사들을  아프리카로  끌어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믿었다.  그는  프린츠  등을  시켜  소수이긴  하지만  원주민과  독일  장교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어  강군으로  훈련시켰다.  전쟁에  돌입할  8)  인도양에  면한  무역항으로  아랍어(語)로  ‘평화의  항구’를  뜻한다.  이는  1862년  잔지바르  제 국의  술탄(회교국의  군주)이  축항하였기  때문이다.  항만시설은  1956년  근대화되었고,  잠비 아로  통하는  철도는  중국의  기술  및  자금  원조를  받아  1975년  10월  개통되었다.  항구에서 는  담배·차·커피·피혁·사이잘삼  등을  수출하며,  이  나라  해운의  80%를  취급하고  있다.  1884년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1891년부터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정청소재지가  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1&amp;vmode=full">6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63 때쯤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군의  병력은  독일군  장교  200명에  아프리카  원주민 인  아스카리스가  2,500명  정도  되었다.  원주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며  동아프리카의  지형과  날씨를  파악해  놓았던  포르 베크  장군은  킬리만자로에  있는  영국령을  공격했다.  포르베크가  이끄는  병력은  아주  적은  양의  탄약과  물자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끈  기습공격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였다.  포르베크는  타베타에서  영국의  철도역을  점령했다.  많은  영국 군  진지와  20여대의  기관차들과  수마일의  철로가  파괴되었다.  포르베크의  ‘히트  앤드  런’  식의  게릴라전법에  영국식민지군은  너무나  무력했다.  포르베크는  공격을  할  때  철저히  지형과  날씨를  파악해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르베크는  기습작 전을  수행하는  중에도  새로운  병력을  꾸준히  모집하였다.  탄자니아  전국으로  새 로운  아스카리스들을  징집하기  위해  독일  장교들과  아스카리스  하사관들을  보냈 다.  그는  싸울  수  있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지원군으로  편입시켰다.  유능한  사람 들은  누구라도  붙들어  독일군에  복무시켰다.  포르베크가  영입한  인재  중에  최고 는  독일의  작센(Sachsen)  군대에서  소장으로  복무했던  바흘레(Bahle)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아프리카에  있는  아들  집에  와  있었다.  바흘레(Bahle)는  포르 베크(Vorbeck)보다  계급이  높았었지만  기꺼이  포르베크  밑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수송  업무를  맡은  바흘레  덕분에  독일군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물자를  적시에  공급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작전의  효율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인종  아프리카  병사들에게  죽어가는  대영제국의  병사들!”  영국신문에는  매 일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유린당하는  기사가  실렸다.  자극적인  기사에  영국국민들 은  분노했다.  영국국민들은  ‘아프리카  파병!’을  외쳤고,  영국정부는  어쩔  수  없이  아프리카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Ⅴ. 탕가(Tanga)전투 영국정부는  비록  파병을  결정했지만  유럽  전선에  있는  영국군을  뺄  수는  없었 다.  1914년  10월  영국은  인도에  주둔하던  이트켄(Aitken)  소장을  아프리카  원정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북  랭커셔(Lancashire)  연대의  1개  대대와  구르카 (Gorkha)  용병부대,  그리고  인도인들로  구성된  약  8,000명의  병력을  차출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2&amp;vmode=full">62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4 군사연구 제127집 &lt;그림  3&gt;  탕가  지도 11월  2일,  영국군을  태운  함정이  독일령(領)  동아프리카인  탄자니아의  탕가 (Tanga)  인근  해안에  나타났다.  탕가9)는  아프리카에서  인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해양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영국령  동아프리카와  80km  떨어진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중요한  우잠바라(Usambara)철도의  기착지이기도  했다.  당시  세계  바다를  지배하며  식민지를  독식하던  영국  입장에서는  인도양  길목을  지키는  탕가는  목에  걸린  가시 와  같은  곳이었다. 영국군을  이끄는  에이트켄(Aitken)  소장은  30년간  인도  식민지군에서  복무하면 서  장군까지  진급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전략과  전술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던  인도에  근무한  탓으로  무기체계나  전술의  발전  흐름에  매우  둔감했다.  유럽 에서는  기관총과  현대적  포병화력,  참호전에  의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루어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나폴레옹식  전술을  9)  인도양에  면한  항구도시로  탄자니아  제2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남위  5˚에  위치하여  기후는  고온다습하다.  예로부터  아랍인에  의한  노예·상아  무역의  전진기지가  되었으며,  시(市)에는  14세기의  페르시아풍(風)  유적이  남아  있다.  코프라·커피·차·목재  등을  수출한다.  근처에  소금·구리·운모·석고  광산이  있다.  북쪽  킬리만자로  산기슭의  아르샤와  수도인  다르에스 살람과  철도로  이어진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3&amp;vmode=full">6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65 고집하는  뒤떨어진  장군이었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옛날의  전술을  고집하다  예나 전투에서  대패한  프러시아의  호엔로에(Hohenlohe)  장군10)과  비슷한  장군이었다.  ‘기관총은  탄약을  낭비하는  데다가  병사들을  나태하게  만드는  무기일  뿐이다.’  기관총을  가져가자는  부하의  조언에  화를  내는  고집쟁이였다.  전투에  있어서  생 명이라  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해서도  무지하기  짝이  없었다.  탕가상륙작전을  하기  위한  작전지도조차  학생들이  사용하는  지리부도의  지도였다고  하니  코미디에  다 름  아니었다.  소수의  북  랭커셔(Lancashire)  대대와  구르카(Gorkha)  용병을  제외 한  인도병사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영국인  장교들과  인도인  병사들  사이에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탕가해안에  도착할  무렵  영국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프리카를  공격하기  위해  인도에서  배에  올라탔을  때  기상이  악화되어  출항하지  못했다.  에이트켄  소장은  군기를  세운다는  명분하에  출항을  못한  16일간  병사들 을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멀미와  설사로  고생했고  전력은  약 화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에이트켄  소장은  두  방면에서  독일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케냐에  있 는  영국  주둔군의  부대로  포르베크의  주력이  있는  킬리만자로  지역의  독일군 을  공격한다.  인도에서  출정한  부대는  탕가에  상륙작전을  실시해  양쪽에서  독 일군을  포위한다.  그런  연후에  천천히  포위망을  조여가며  철저하게  격파한다는  계획이었다.  포르베크는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장군이었다.  그는  인도의  정보요원을  통해  영국군이  탄자니아로  출발했음을  알았다.  또한  정기적으로  국경 을  넘는  흑인  정보원들을  통해  영국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포르베크는  케냐의  영국군에  속해있는  흑인원주민의  전력이  위협적이지  않으며  무기도  조악 함을  알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방면의  공격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공격해  올  영국군의  전력은  강할  것으로  판단했다.  병력을  해안  쪽으로  옮겨  대비해야  하는데  영국군이  다르에스살람을  공격할지,  탕가를  공격할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병력이  워낙  적어  두  군데  다  방어를  할  수  없었 고  또  두  지역의  거리가  있어  병력을  바로  이동시키기가  어려웠다.  이런  어려움 을  해소해  준  것은  아이로니컬(Ironical)하게도  영국군이었다.  영국  상륙군은  탕가 를  공격하기에  앞서  예전  영국과  독일  사이에  체결되었던  평화협정이  깨졌음을  10)  로버트  그린,  안진환,  이수경  옮김,  전쟁의  기술,  웅진,  2007,  p.46.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4&amp;vmode=full">64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6 군사연구 제127집 탕가에  통보했다.  이로서  영국이  탕가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포르베크 는  모든  병력을  탕가로  집결시킨다.  당시  탕가에는  겨우  1개  소대  정도의  독일  병력만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활약하던  영국  정보장교들은  에이트켄(Aitken)  사령관에게  탕가 에는  독일의  수비  병력이  거의  없음을  보고했다.  그러나  일부  장교는  지금은  병 력이  없을지라도  포르베크가  철도를  이용해  독일군을  재빨리  배치시킬  수  있으니  정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아프리카  기마  소총  부대의  지휘관은  자기  예하  부대를  상륙  전  정찰대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이트켄  소 장은  그들의  말을  묵살했다.  그는  싸울  것조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그만  코딱지만  한  나라에  병력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을  것이며  설령  있다  해도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한  흑인들을  상대로  무얼  겁내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끌고  온  것은  백전노장의  영국병과  인도용병들  그리고  그  무섭다는  구르카  용병 까지  합해서  8,000명이나  되었다.  또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함대까지  있었다.  이건  싸워보나  마나가  아닌가? “나의  용맹스런  북  랭커셔(Lancashire)부대와  구르카(Gorkha)용병들과  인도병 사들은  오합지졸의  독일  원주민  병력을  무찌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 다. 병력도  몇  명  안  되는  그들은  우리의  모습만  봐도  도망칠  것이다. 우리는  성 탄절  이전에  탄자니아를  점령할  것이다.” 포르베크는  항구  입구에  낡은  선박을  가라앉혀  봉쇄하고  나름대로  진지를  구축 하고  있었다.  또한  탄자니아에  흩어져  있는  원주민  병력을  탕가로  집결시켰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탄자니아와  탕가지역의  지형  및  기후를  살펴보자.  탄자 니아의  북동부는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산을  비롯해  산악  지대가  주를  이룬다.  북서쪽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빅토리아  호와  아프리카에서  가장  깊은  탕가니카  호  등  호수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중부  지방은  넓은  평원과  경작  지대가  펼쳐져  있다.  동쪽  해안  지대는  덥고  습하다.  적도  근처이기  때문에  일  년  기온  차는  거의  없으며  무덥고  습한  날씨를  보인다.  해안  지역은  밀림으로  이루 어져  있으며,  내륙  쪽으로  들어가면  황야가  펼쳐진다.  태양이  높은  여름에는  적도 저압대(赤道低壓帶)의  영향으로  우기(雨期)가  있고,  태양이  낮은  겨울에는  아열대 고압대(亞熱帶高壓帶)의  지배를  받아  건기(乾期)가  돌아온다.  건기  때는  생각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5&amp;vmode=full">6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67 매우  건조하며  기온이  높아  초원의  풀이  말라버리고  물이  없으면  생존하기가  어 렵다.  초원  지역은  쾨펜의  기후구분으로는  Aw기후에  해당한다.  열대원야기후(熱 帶原野氣候)11)라고도  한다.  영국군은  탕가항으로  상륙하지  않고  시가지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상륙 했다.  최초의  상륙부대는  2개  중대  규모의  영국군이었다.  이들이  상륙한  것은  11월  2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그들이  상륙한  곳이  악어와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지 대였다.  불운하게도  가장  나쁜  장소에  상륙한  것이다.  상세한  정보  검토  없이  이루 어진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에이트켄은  밤을  새워  병사들을  상륙시켰다.  포르베크 는  원주민  병사들을  탕가로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탕가에  도착한  얼마  안  되는  독 일  장교와  흑인  원주민  병력인  아스카리스들이  인도  병사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영국의  인도용병부대가  마을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물론  어떤  정찰  활동도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군은  별다른  경계도  없이  행군하는  인도  용병부대를  향해  공격하였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인도출신  영국중대는  격퇴당하고  말았 다.  다시  밀림으로  쫓겨난  영국군은  밀림의  해충과  벌레,  악어와  독사들에  피해를  입었다.  오후에는  정글에서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다.          좀  더  많은  영국군이  상륙해  합류했다.  영국군은  독일  아스카리스들의  측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나무와  풀로  우거진  밀림에서는  상대방의  위치를  알기가  어려 웠다.  소총으로만  무장한  영국군은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나  독일  아스카리스들은  앞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기관총으로  수풀들을  향해  총알  세례만  퍼 부으면  되었다.  일부  영국군들이  기관총을  향해  돌격했으나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영국군  장교들은  인도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공포에  질 린  인도병사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영국군의  공격이  멈추자  독일의  아스카 리스들이  영국군을  공격했다.  흑인  원주민들은  우거진  밀림  안에서도  적의  움직 임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영국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본대가  있는  곳까지  도망쳤다.  최초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3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영국 군의  공격  여단장  마이클  티그는  에이트켄  소장에게  패배를  보고했다.  자신이  이끄는  2천여  인도  병사들이  2,500여  명에  이르는  독일  소총  부대에게  패배했다 고  말이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영국군  정보장교는  ‘독일군은  겨우  기관총  4정 으로  무장한  250여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보장교의  11)  로저  G.  베리․리처드  J.  초얼리,  이민부,  박병익,  강철성  옮김,  현대기후학,  한울아카데미,  2002,  p.315.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6&amp;vmode=full">66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8 군사연구 제127집 분석이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당시  독일군  병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받은  에이트켄  소장은  11월  5일  대규모의  영국군  병력을  상륙시켰다.  전쟁 에  투입된  영국  병력은  8,000여  명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는  포르베크는  병력을  보강해  1,000명의  병력으로  영국에  맞섰다.  병력수가  8대  1로  영국군이  압도적이 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독일군  병력은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포르베크  장군은  동원한  모든  부대를  탕가로  집결시켰다.  독일은  잔인하고  호전적인  1,000명의  원 주민  병사들을  독일군  장교들의  엄격한  교련으로  훈련시켰다.  그들은  야지(野地) 를  뒹굴면서  근대적  전기를  연마한  강병들이었다.  독일군은  원주민들에게  적과의  교전방법뿐만  아니라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법,  사자와  전갈에  익숙해지게  만드 는  방법까지  교육시켰다.  또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지형  구석구석을  모두  외우 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의  에이트켄  소장  말처럼  영국군이  진격하면  그냥  손들 고  나올  병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전투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영국군 은  이번에도  아무런  사전  정찰  없이  작전을  강행했다.  이에  반해  독일의  포르베 크  장군은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탕가를  정찰했다.  심지어  영국군  점령  지역을  통과하기도  했다.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럽  서부전선에서  사용된  신  전술로  무장한  독일군이었다.  진흙  댐과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좌로  구축된  견고한  방어망이었 다.  영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  기관총좌는  밀림의  늪지를  헤쳐  나오 느라  허우적거리는  영국의  인도병사들을  쓸어버렸다.  영국군의  피해가  속출했 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병력이  우세했던  영국군은  독일군의  일부  방어진지를  뚫고  시내로  진입했다.  이  부대가  용맹하기로  소문난  북  랭커셔  부대와  구르카  부대이다.  이들은  흑인  원주민과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세관을  점령하고  영국  기를  내걸었다.  용맹한  흑인  원주민  아스카리스도  구르카  용병의  무지막지한  저돌성에  겁을  집어 먹고  말았다.  구르카12)는  네팔  인들이다.  히말라야의  거친  환경에서  자란  전사로 12)  네팔의  중부  및  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강건(剛健)한  농경민으로  목축도  겸하고  있다.  원 주지는  인도  중부였으나,  힌두교도라는  이유로  14세기경  이슬람교도에게  쫓겨  북쪽  네팔 로  이동,  그곳의  지배  민족이었던  네와르족(族)을  정복하고  이들과  혼혈(混血)하게  되었 다.  1814년  치열한  산악전  끝에  영국군에게  패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의  용병(傭兵)으로  활약하여  네팔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7&amp;vmode=full">6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69 &lt;그림  4&gt;  독일  흑인  원주민  아스카리스  부대원의  공격  장면 이들은  보통  성인식  때  쿠크리13)란  칼을  받게  된다.  이  칼은  사람  목을  자르는  데는  최고다.  이들의  칼이  흑인  원주민의  목을  파리  목  날리듯  베어내는  모습을  본  흑인  원주민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병력  수 에서도  밀리는데  전의마저  상실한다면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포르베크  장군은  흑인  원주민의  전투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애쓴다.    “내가  지금  여자들을  보고  있는  것인가?  와헤헤와  앙고니의  자랑스런  후예들을  보고  있는  것인가?” 이  당시  흑인  원주민  아스카리스는  와헤헤족과  앙고니  족의  두  부족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포르베크의  일갈에도  이들은  꼼짝하지  않 았다.  그런데  하늘이  독일을  도왔을까?  흑인  원주민을  움직이는  뜻밖의  사건이  벌어 졌다.  와헤헤족의  한명이  달아나려고  한  것이다.  이걸  본  독일  장교가  포도주병을  그에게  던졌다.  포도주병은  머리에  맞고  깨어지고  이  와헤헤족  병사가  바닥에  나 뒹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앙고니족  병사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와헤헤족이  발 끈했다.  두  부족은  평소에  앙숙인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와헤헤족  병사들이  비겁 한  행동을  한  동료를  초죽음  시켜놓고  무기를  들고  괴성을  지르며  영국진지를  향 해  공격해  갔다.  경쟁심이  강한  앙고니족이라고  질  수  있겠는가?  그들도  무기를  13)  네팔의  구르카족이  애용하는  단검으로  칼의  무게  자체가  칼끝의  굴곡진  부분에  실려 있기에  통나무도  가볍게  자를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고  전해진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8&amp;vmode=full">68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0 군사연구 제127집 잡더니  괴성을  지르며  같이  돌격해  갔다.  무시무시한  육박전이  벌어졌고  이내  시 내에  진출했던  영국군은  밀림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몇  차례의  공격과  후퇴하는  와중에  영국군은  물을  공급받지  못했다.  영국의  인 도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수통은  비어  있었다.  이에  반해  독일  원주민  아스카리 스들은  충분한  양식과  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영국의  에이트켄  사령관은  다시  공 격을  명령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물을  먹지  못한  영국군  병사들은  지쳐갔다.  오 후  3시까지  600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영국군  병사들이  열을  받아  탈진되면서  늪지에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현대식  모젤  98  소총으로  무장한  독일  저격병들은  영국의  장교들을  쏘아  넘겼 다.  진흙으로  견고하게  밀림과의  경계선에  진지를  쌓고  참호를  판  채  기관총으로  무장한  원주민  부대를  총검으로  뚫는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지친  와중에도  명령 에  따라  공격해  오는  영국군은  독일  기관총  사수들의  밥이  되었다.    접전이  계속되면서  독일군의  탄약이  거의  떨어져  갔다.  이제  독일군도  육박전을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독일군  아스카리스  병사들이  지쳐가는  인도  병사들을  밀 림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자  북  랭커셔  대대의  영국  군인들도  뒤로  밀렸다.  영국군 은  후퇴하면서  야생  벌집들로  가득  찬  덤불을  지났다.  이때  소란에  자극  받은  벌 들이  떼로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벌들은  오늘날  공포  소설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살인  벌들14)’이었다.  벌들은  특히  독특한  냄새가  나는  인도  병사들을  집 중  공격했다.  벌들에  치명타를  맞은  영국군은  쓰러져  갔다.  탕가전투를  ‘벌떼의  전 쟁’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국군은  함포사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포 격마저  독일군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영국  주둔병원막사와  영국군에  떨어졌다.    11월  6일  동이  틀  무렵,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병력은  탕가를  장악했다.  에이 트켄  소장은  정전  협상을  선언한  다음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영국군은  사망자  1,000여  명,  부상자  500여  명,  실종자  500여  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다.  실종자들 은  밀림의  습지에  빠져  죽거나  살인  벌,  맹수에  의해  죽었으리라  추정된다.  독일 군의  손실은  매우  적었다.  67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148명의  사상자만  기록 했을  뿐이다.  독일군은  수백  자루의  소총,  60만  발의  탄약과  그  밖의  엄청난  보급 품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14)  아프리카  살인  벌은  억센  공격력과  침에  강한  독이  있어  많은  사람이  공격을  받고  죽는  경우가  많음.  우간다  정부의  경우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살인  벌을  이용하는  방안을  강 구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함.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69&amp;vmode=full">6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71 영국군은  독일군에  비해  많은  병력이  있었기에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 었다.  충분한  사전  정보로  대비했거나,  적절한  함포  사격  지원이  이루어졌거나,  구르카  용병들이  탕가  시내  세관을  점령했을  때  집중적인  전투지원이  이루어졌다 면  혹  전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장에서  떠나  배위에서  지휘한  영국 의  에이트켄  소장은  전장의  실시간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방책이  실기(失機)하고  만  것이다.  이에  반해  독일의  포르베크는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방에서  상황을  파악하면서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누가  이길  확률이  높은  것인가가  환히  보이는  전투였다.  한편  탕가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킬리만자로지역에서도  영국군의  공격이  있었 다.  케냐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독일부대를  공격했다.  당시  독일군은  독일인  86명 과  원주민으로  이루어진  1개  중대와  아스카리스  3개  중대  등  아프리카인  600명으 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공격한  영국군은  1,500여  명에  달했다.  인도  병사들 은  용감하게  싸우며  독일군  기관총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요란한  사격  때문에  보급품을  나르던  노새들이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노새가  달아나자  영국군에 게  남은  것은  수통  속의  물뿐이었다.  탄약이며  식량을  잃어버린  영국군은  그날  밤에  철수했다.  이  지역에서의  전투에서도  독일군이  승리한  것이다.  포르베크  장군은  어느  전쟁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을  연출했다.  승리한  이후  그 는  브랜디를  들고  영국군의  진영에  찾아가  같이  술을  마시며  위로했다.  또  전투 에  대해  토론하고  전략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부상자에  대한  치료도  같이  할  정도였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Ⅵ. 탕가전투 이후의 동아프리카 전투 탕가전투의  패배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영국국민들은  분노했다.  영국은  제2차  보어전쟁의  영웅  잔  스머츠  중장15)을  동아프리카로  파견했다.  스머츠  중장은  1916년  3월,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군을  잡기  위해  4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를  바탕으로  스머츠  중장은  속전속결로  승리를  쟁취하려  15)  남아프리카연방  정치가.  남아프리카연방이  성립되자  국방장관·재무장관  등을  역임하고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동아프리카  군사령관,  영국  내각  각료를  지냈으며  전후에는  국제연 맹  창립에  공헌하고,  남아연방  수상·법무  장관  등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남아 연방의  수상·국방  장관·총사령관으로서  영국을  도왔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0&amp;vmode=full">70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2 군사연구 제127집 했다.  그들은  독일군을  재빨리  격파한  뒤  곧바로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유럽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르베크  장군은  영국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소규모의  접전을  한  다음  재빨리  남쪽으로  후퇴했다.  스머츠  중장이  포르베 크  장군을  잡았다고  느꼈을  때마다  그는  몇  시간  앞서  움직여나가고  있었다.  그 는  영국군과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교전의  가능성을  열어둘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곧  잡을  듯했기  때문이었을까?  영국군은  계속  전진했다.  독일군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했지만  영국군의  수중에  빠지지는  않았다.  무엇엔가  홀린  듯  스 머츠  중장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숲을  지나  포르베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영국  군대의  보급선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길어졌다.  영국군들의  사기가  떨 어지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소규모  기습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독 일군을  쫓아가던  스머츠  중장의  군대는  함정에  빠져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정글에  갇혔다.  영국군은  전염병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영국군은  자신들의  방법 으로  전투를  하지  못했다.  초원지대에서는  물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 이  일사병과  탈수로  죽어갔다.  유일하게  1917년  10월  마히와에서  대규모  접전을  치른  적이  있다.  그때도  영국군은  2,7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등  큰  패배를  당했다.  포르베크  장군은  4년  동안  영국  병력을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1918년  11월14일,  포르베크  장군은  포로로  잡은  영국군에게  독일이  패망했다 는  사실을  들었다.  포르베크  장군은  교전중지명령을  내리고,  영국과  종전협정을  체결했다.    포르베크  장군을  ‘불패의  독일  아프리카군단  사령관’,  ‘동아프리카의  힌덴부르 크’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4년  동안  적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 력으로  싸웠으면서도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군수물자의  보급을  거의  받지  못했다.  전사에서  기적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 지  않은  것이다.  또  힌덴부르크  장군16)처럼  전쟁터를  직접  돌아보고  지형을  익히 고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런  것이  후일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 음은  물론이다.  16)  1차  세계  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일의  장군이다.  퇴역한  다음에 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탄넨베르크  소택지를  장화를  신고  포를  끌면서  기동로를  일일이  답사  분석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1&amp;vmode=full">7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73 Ⅶ. 기상의 영향 1. 밀림의 영향 포르베크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많이  활용한  것이  지형과  날씨였다.  그 는  밀림의  특성을  파악해  전투마다  이용했다.  전투가  벌어진  탕가와  탄자니아의  해안지대는  열대  밀림기후에  속해  있으며  무성한  정글로  이루어져  있다.  무더운  열대의  밀림기후에서  싸우는  군대는  무더운  기후와  다습한  대기,  수많 은  질병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군인들은  더위와  함께  몸을  공격하는  벌레들에게  끊임없이  위협받아  약화된다.  지휘관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전 장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밀림은  풍부한  태양빛과  강우량으로  식물들이  번창한다.  짙게  얽힌  정글과  사방 이  막힌  밀림은  군대의  움직임과  전개,  그리고  통신을  방해한다.  이런  곳에서  전 투를  위한  위치  선정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설치한  참호와  벙커는  그  속 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는  구덩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17) 밀림의  기상조건은  무위의  전력손실을  가져온다.  열과  습기는  병을  옮기는  유 기물들의  성장을  돕는다.  말라리아,  장티푸스,  설사병  등을  일으키는  전염성  병균 들이  창궐한다.  쥐,  불개미,  전갈,  거미,  독사와  같은  독을  품은  동물에게  밀림의  환경이  유리하게  작용하기에  병사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한다.  중국-버마-인도  작전  중이던  1944년  동안  미국의  사상자중  90퍼센트가  질병으로부터  온  반면에  단지  2퍼센트만이  전투에서  발생했다.  서남태평양에서  벌어진  2차  대전  중  사상 자의  83퍼센트가  밀림에서  발생한  질병으로  기인했다.  베트남전에서  밀림의  질병 으로  사망한  병력이  전사자의  67퍼센트에  달했다.18)  밀림의  조건들은  건강한  군 인을  위험스럽게  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부상자들이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다.  열 기와  습기는  군인의  기력을  고갈시켜서,  전투능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전투의 지를  떨어뜨린다.  “우리  병력들이  밀림에서  전투할  때면  설치류가  퍼뜨리는  페스트에  노출되어  17)  Harold  A.  Winters,  Battling  the  Elements,  (London,  John  Hopkins  Univ  Press,  1998),  p.97. 18)  반기성,  전쟁과  기상,  명진출판,  2001,  pp.115～12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2&amp;vmode=full">72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4 군사연구 제127집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다.  또한  우림  지역  내의  저지와  습지에서의  전투는  빗물에  의해  이동을  두  배나  힘들게  만들었고,  위생상의  문제를  일으켰으며,  장비를  못  쓰게  만들었다.  뱀과  곤충들,  그리고  거머리  떼는  병사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 다.  말라리아모기는  일본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 로  뜨거운  음식을  먹기란  불가능했다.  오랜  행군으로  인해  병사들의  옷은  찢겨지 고  해어져  있었다.  심한  피부병과  함께  이질과  뎅기열,  그리고  말라리아  환자가  속출했다.  정글에서  나는  소름끼치는  소리는  병사들에게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했 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이  가능한  병력은  전체의  5분의  1에  미치지  못했다.”  뉴기니  밀림  전투에  참여했던  한  미군지휘관의  말은  밀림의  환경이  전투에  미 치는  영향을  잘  나타내준다. 2. 무더위의 영향 포르베크는  탕가의  밀림  전투에서뿐  아니라  초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지형과  날씨를  적절히  이용했다.  탄자니아는  적도지역인  관계로  평균기온이  35℃ 이상의  무더위를  보인다.  겨울건기에도  기온은  내려가지  않으면서  비가  내리지  않아  초 원에서  물을  공급받기가  어렵다.  포르베크는  물이  독일군의  생명이라는  생각하에  어느  전투에서건  가정  먼저  물을  확보했다.  그런  다음  보급선이  길어져  영국군이  제때  물을  공급받지  못해  지치고  전력이  약해지면  공격을  가했다.  통상  28℃  정도에서  병사  한  명당  하루에  생수  6리터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군의  보급체계에서  이  정도의  물이  공급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무더위가  전쟁에  영향을  준  사례는  많았다.  2차  대전  중  사막에서  전투를  벌였 던  독일의  로멜  전차군단은  평균  40℃를  웃도는  무더위로  인한  열사병,  물로  인 한  설사와  풍토병으로  인해  전투에서  잃은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 다.  사람은  36.5℃의  체온을  유지해야만  살  수가  있다.  사람은  항온동물이라  일정 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체온조절을  한다.  체온이  올라가면  피부에서  땀 을  증발시켜  피부를  식히고  피부  주위를  거쳐  몸  내부로  순환하는  혈액의  온도를  낮춰  체내  온도를  조절한다.  땀을  흘려  체온을  조절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몸에 서  땀을  많이  흘리면  세포  내의  수분이  빠지면서  세포의  화학적인  균형이  교란된 다.  세포의  단백질이  파괴되면서  신체의  운동  능력과  두뇌의  의사  전달  능력이  저하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몸에  있는  물의  5퍼센트  정도가  빠져나가면  피로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3&amp;vmode=full">7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75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난다.  10퍼센트의  경우에는  일시적인  정신착란이  오고,  15퍼 센트  정도  탈수되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혀가  붓고  피부는  쪼그라들며  뼈에  금이  가고  눈이  깊게  함몰된다.  체온이  41℃까지  올라가면  열사병이  발병하 고,  42℃도를  넘으면  죽게  된다.  혈액의  점도가  높아져  혈액  순환이  멈추게  되고,  그  순간  체온이  갑자기  상승한  뒤  죽는  것이다.  그런데  한  여름  사막에서  몇  시 간  정도  적당한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만일  정상  체 온보다  2～3℃ 높아지면  체내  단백질이  응고하기  시작하면서  구토가  나타나는  열  피폐  현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보다  심해  땀을  많이  흘리는  경우  뇌빈혈이  일어나  실신하게  되는  일사병이  있고,  더  심하면  열사병에  걸린다.  열사병의  경우  41℃  이상의  고열,  신경정신  이상  등의  증상을  보이며  사망률이  70%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환이다.19) 육군  야전교범에는  무더위로  인한  인체의  영향이  나와  있다.  기온이  29℃가  넘 으면  활동이  완만해지며  정신적  반응이  느려서  실수가  많아진다고  한다.  체온에  따른  현상으로  39℃일  때  뇌  활동에  영향을  주며,  41℃ 이상일  때  간장을  선두로  각  장기가  파괴되며,  42℃에  이르면  세포가  굳어져  ‘세포재생불능’  상태가  야기된 다고  기술되어  있다.  Ⅷ. 결      론 1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에  있는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에서  벌어졌던  동아 프리카  전투는  전사에서는  희귀하게  다뤄지는  전투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각국 이  쏟아  부었던  물량과  엄청난  희생에  비교한다면  아주  적은  규모의  전투였지만  몇  년  동안  일방적인  승리만  기록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전투가  전 쟁사가(戰爭史家)들에게  흥미를  끄는  것은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을  지휘했던  장 군들의  리더십이  확연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영국군을  이끌었던  에이트켄  장군을  먼저  살펴보자.  영국이  전후에  동아프리카  전투를  평가하면서  영국군의  운이  나빠서  진  전투였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필자는  에이트켄  장군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19)  WHO  Regional  Office  for  Europe,  최병철,  김규랑,  김지영  옮김,  위기의  지구  폭염,  푸른길,  2006,  pp.30～35.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4&amp;vmode=full">74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6 군사연구 제127집 첫째,  에이트켄  장군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했다.  그는  자기가  지휘하는  영국 군이  상륙하여  진격만  하면  독일  원주민  부대는  그대로  도망칠  것으로  믿었다.  둘째,  전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를  무시했다.  상륙작전에  필요한  지도도  확보 하지  못했다.  따라서  상륙지로  가장  나쁜  밀림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전투가  벌어 질  지역의  지형이나  적의  배치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승리할  것으 로  생각했던  그는  우장(愚將)에  다름  아니었다.  셋째,  부하들의  조언을  철저히  무 시했다.  부하들의  상륙지  정찰  건의나  공격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넷째,  부하 들이  지휘관을  믿고  따르게  만드는  지휘력이  부족하였다.  군기를  세운다는  명분 하에  배에  탄  장병들이  악기상으로  고통  받는데도  육지에  하선시키지  않고  배  안 에서  군기를  세웠다.  애초부터  병사들과  한마음으로  전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섯째,  새로운  전술이나  무기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차  대전에  이르러  유럽 의  각국들은  기관총을  이용한  전투와  참호전을  선보였다.20)  그는  나폴레옹  전쟁  때  사용하던  전술인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진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기관 총은  병사들을  나태케  만든다는  논리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기관총  4개로  무장한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여섯째,  전투현장에서  부하들과  더불어  싸우지  않았다.  영국군이  탕가전투에서  쓰러져  죽어갈  때  그는  항구에  있는  배위 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현장의  감각이  없으니  적시에  적절한  전술과  전략을  구사 할  수  없었다.  일곱째,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의  능력을  철저히  무시했다.  새카만  흑인들이  총이나  쏘겠냐며  무시하였으나  흑인  원주민  병력은  영국이  자랑하는  북  랭커셔  부대와  구르카  부대까지  무찔렀다.  에이트켄  소장에  이어  동아프리카  전 투에  투입된  스머츠  중장  또한  에이트켄  소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뚜렷한  전 술전략  없이  무려  4년  동안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  원주민  병력에게  철저히  농 락당하였다.  이에  비해  독일의  포르베크  장군은  승리하는  제너럴십을  갖춘  리더였다.  첫째,  그는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지휘관이었다.  항차  아프리카에서도  영국군과  전 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흑인  원주민을  선발하여  훈련시켰다.  그가  훈련시킨  흑인  원주민  부대인  아스카리스는  영국군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다고  한다.  둘째,  애국심이  뛰어난  리더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중에  아프리카에서는  평화 를  갈망하던  분위기에서  그는  아프리카에서  영국을  괴롭히면  영국은  유럽에서  20)  존  키건,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  까치,  1996,  p.443.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5&amp;vmode=full">7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77 병력을  빼내어  아프리카에  투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을  돕게  된다고  믿었 던  애국심으로  충만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셋째,  전쟁에서  누구보다도  정보의  가치를  알고  활용하던  장군이었다.  인도에  독일  정보원을  파견하였고,  탄자니아와  케냐에도  많은  정보원들을  두어  적의  동향을  미리  탐지하였고  이를  토대로  전투 작전을  수립하였다.  넷째,  병력의  기동과  집중을  구사하는  지휘관이었다.  탕가전 투뿐  아니라  그  이후  벌어진  4년간의  동아프리카  전투에서도  그는  적은  병력을  가지고도  결코  영국군에  진  적이  없다.  이것은  소수의  병력이라도  기동력을  이용 한  집중의  원칙을  활용하여  적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또  뛰어난  기동력은  적을  때리고  후퇴하는  작전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독특한  것은  기동무기로  자전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동아프리카에서  자전거는  소규모의  화물을  운반하 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비였다.  다섯째,  새로운  전술을  전투에  응용하였다.  독일  본국에  새로운  소총과  기관총을  요구해  적은  양이나마  받았던  그는  새로운  전술인  기동전과  참호전을  적절하게  전투의  상황에  맞게  배합했다.  그의  신  전술은  영국군의  무대포식  돌격과  비교되었고  적은  병력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여섯째,  부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능력의  리더였다.  그는  흑인  병사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잤으며,  함께  걸었다.  백인이었던  그의  행동 은  흑인병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었다.  흑인병사들이  생전  본적도  없는  카이저 를  위해  싸우다  죽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일곱째,  승리한  후에는  적에게도  자비 를  베풀었다.  포로를  돌려보냈으며,  부상당한  적군을  치료해  주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적뿐  아니라  흑인  병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2차  대전  이후  살아갈  집마저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싸웠던  영국  장군들인  에이트켄이 나  스머츠  장군이  앞장서서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은  그의  인간미가  뛰어나 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마지막으로  압권은  단연  날씨와  지형을  철저히  이용한  장군이었다는  점이다.  포르베크  장군은  아프리카의  방대한  공간과  견디기  힘든  기후인  밀림과  초원기후를  한껏  이용하여  영국군을  무력화시켰다.  뛰어난  제너럴십의  소유자였던  포르베크  장군은  소수의  흑인  원주민인  아스카 리스  부대를  이끌면서  1차  대전  내내  수십만  명의  남아프리카인들,  영국인들,  인 도인들,  그리고  잡다한  영국  식민지  군대들을  탄자니아에  붙들어  놓았다.  전술적 으로  후퇴하는  일이  많았으나  절대로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  자기  부대보다  몇  배나  규모가  큰  적에게  커다란  피해를  안겨  주면서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6&amp;vmode=full">76page</a><br><br>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8 군사연구 제127집 1차  대전이  끝난  것을  안  것도  포로로  잡힌  적의  연락병을  통해서였다.  당시  그 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령을  침공하고  있었을  때였다. “훌륭한  장군은  전략을  배우고,  유능한  장군은  병참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전쟁 에서  승리하는  장군은  날씨를  아는  장군이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 자  후에  미국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  장군의  말이  동아프리카  전투에  겹쳐  생 각나는  오늘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7&amp;vmode=full">7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79 1.  한국문헌 가.  단행본 ∙ 노병천,  세계도해전사,  연경문화사,  1996. ∙ 로버트  그린,  안진환,  이수경  옮김,  전쟁의  기술,  웅진,  2007. ∙ 로저  G.  베리․리처드  J.  초얼리,  이민부,  박병익,  강철성  옮김,  현대기후학,  한울아카데미,  2002. ∙ 미야자키  마사카츠,  오근영  옮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2,  랜덤하우스,  2002. ∙ 반기성,  전쟁과  기상(하),  명진출판,  2001. ∙ 윌리엄  위어,  이덕열  옮김,  세상을  바꾼  전쟁,  시아출판사,  2005. ∙ 정토웅,  전쟁사  101장면,  가람기획,  1997. ∙ WHO  Regional  Office  for  Europe,  최병철,  김규랑,  김지영  옮김,  위기의  지구  폭염,  푸른길,  2006,  pp.30～35. 2.  영어문헌 가.  단행본 ∙ Harold  A.  Winters,  Battling  the  Elements,  London,  John  Hopkins  Univ  Press,  199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8&amp;vmode=full">78page</a><br><br> .. 대령    석 영 준 육군대학 전쟁사학처장  Ⅰ.  서        론 Ⅱ.  군사혁신의  개념 Ⅲ.  군사혁신을  통해  승리했던  주요  전례분석     1.  프로이센의  “쾨니히그래츠  전투”     2.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     3.  미국의  “걸프전쟁” Ⅳ.  분석  및  교훈 Ⅴ.  결        론 &lt;필자 약력&gt; 동국대학교 안보행정대학원 석사, 대전대학교 군사학 박사과정 재 &lt;저서&gt; 6ㆍ25전쟁 공간사 1∼3권, 6ㆍ25전쟁사 군사부도, 육군대학 전쟁사 현리 - 한계전투 80 군사연구 제127집 전쟁사   2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79&amp;vmode=full">7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1 Ⅰ. 서      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기술되어  있는  “전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각국에서는  끊임없는  각고의  “군사혁신”을  통해  보다  확실성을  보장한  가운데  전 쟁에서  승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과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군사혁신”이  미래전  연구와  대비의  전형이  되어왔고,  역사적으로  꾸준히  모색되 어  왔기  때문에  사실  “군사혁신”이라는  말은  새로운  용어나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지금까지  역사상  군사혁신의  성공여부가  전장에서의  승패와  직결되 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군사혁신은  단순하게  “첨단 무기획득”과  동일시하거나  외국의  사례를  단순히  모방한다는  차원보다는  그  시대 의  새로운  기술과  군사사상을  기초로  “창의적이고  혁명적으로”  추진되어  왔고  특 히,  과거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교훈을  도출하여  각고의  노력을  바탕으로  군사혁 신을  통해  차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과거  전쟁에서의  패배를  교 훈으로  삼아  진정한  의미의  군사혁신을  통해  차후  전쟁에서  승리했던  주요  전례 들을  분석해  보고,  그  속에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사항들을  도출해봄으로써  “과연  우리  군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먼저,  군사혁신에  대한  정의와  유형에  대해  살펴본  후,    “쾨니히그래츠  전투”와  “2차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  그리고  “걸프전쟁”을  중심 으로  과거  전쟁에서의  패배를  교훈삼아  군사혁신을  통해  차후  전쟁에서  승리했던  주요  전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  군에게  주는  시사점을  제시해  봄으로써  전쟁사적인  의미에서  군사혁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다. Ⅱ. 군사혁신의 개념 1. 군사혁신의 정의  이  군사혁신은  구소련의  참모총장이었던  오가르꼬프(N.  V.  Orgarkov)  원수가  1984년에  주창한  “정찰 - 타격  복합체”  이론에  연원을  두고  새로운  군사기술을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0&amp;vmode=full">80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82 군사연구 제127집 이용한  군사발전의  혁명적  잠재력을  주장하고  구소련이  지체없이  군사변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군사기술혁명(MTR  :  Military  Technical  Revolution)” 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 면서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기술  중심의  변혁은  작전운영개념 (operaional  concept)과  군사조직  편성(organizaion)에도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치 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이  3자가  상호  연결․결합되어  조화롭게  변혁될  때  군 사적  변화에  혁명성이  증폭될  수  있다”고  보고,  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군사기술 혁명(MTR)”을  “군사분야혁명(RMA  :  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이란  용 어로  사용하게  되었다.1) 이러한  교리적인  측면과  구소련  및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를  종합해서  간단히  요약해보면,  군사혁신(RMA)이란  “기술혁명을  이용한  전력체계의  혁명뿐만  아니라  군사력의  운용방법과  조직편성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이들을  상호  밀접 하게  결합,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매우  큰  군사적  변화”로  정의할  수  있다. 2. 군사혁신의 유형 군사혁신  유형을  역사적인  사례와  연계하여  분류시  크게  3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표  2-1】과    같다. 【표  2-1】  군사혁신  유형 시기 (1995년  기준) 대  분  류 중  분  류 소  분  류 문명사회 과학기술 정보기술 무기세대 작전운용 군사혁명 군사전략 35000년  이전 수렵․ 유목사회 도구시대 부호 1세대 -  - - 5000년  이전 농업사회 (제1물결) 기    계 시    대 필기 1세대 (창․칼․활) 2세대(흑색 화약/활강총) - ①보병혁명 ②포병혁명 ③항해혁명 ④요새혁명 ⑤흑색화약혁명 ①longbow/밀집전투대형 ②풍력전함/종진법 ③흑색화약/     보병연대대형 ④선형전투대형/축성법 ⑤대형함정/상선 1) 권태영․노훈,「21세기  군사혁신과  미래전」(법문사,  2008.  7)  54쪽,  “여기에서  分野를        줄이면  軍事革命이  되며,  이것은  군사  쿠데타로  오인될  소지가  있어서  혁명보다는  변화의  수준  및  정도가  낮고  개혁보다는  상대적으로  높고  포괄적인  ‘군사혁신’이라는  용어를  선택하 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1&amp;vmode=full">8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3 시기 (1995년  기준) 대  분  류 중  분  류 소  분  류 문명사회 과학기술 정보기술 무기세대 작전운용 군사혁명 군사전략 540년  이전 산업사회 (제2물결) 체  계 시  대 인  쇄 3세대 (소총,  야포) 4세대 (기동력,  화력) 5세대 (핵,  미사일) ①나폴레옹     시대 ②Grant  &amp;Moltke ③2차대전시대 (전격전,  항 모/ 함재기,  상륙전) ⑥나폴레옹  혁명 ⑦지상전  혁명 ⑧핵전혁명 ⑨기계․항공 ․정보혁명 ⑩핵혁명 ⑥시민군/군단/기동전 ⑦대량생산체계/총력전 ⑧해양전략 ⑨대형전함 ⑩잠수함 ⑪공세작전 ⑫항공전략 ⑬항모/함재기 ⑭상륙전 ⑮전격전 ⑯인민전쟁/게릴라전 ⑰핵무기/전략폭격 ⑱ICBM/MAD 25년  이전 정보사회 (제3물결) 자동화 시대 마이크로 프로세서 6세대(정밀 유도무기) ④마이크로  프로세서 시대 ⑪정보혁명 ⑲PGM/ALB ⑳정보전쟁 주장자 Toffler Creveld Peterson Slipchenko Krause Krepinevich Sullivan *  출처  :  권태영ㆍ노훈,「21세기  군사혁신과  미래전」(법문사,  2008.  7)  55~56쪽 【표  2-1】에서  제시한  내용  중  본  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쾨니히그래츠  전투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  걸프전쟁이  “과연  어느  군사혁신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면서  나름대로  해당될  수  있는  항목을  음영으로  표시해  보았다.  이렇듯  본  고에서  언급되는  주요  전례들이  당대  군사혁신을  통해  승리했던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에  해당되는  전례들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례와  군사혁신을  연계하여  고찰해  보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2&amp;vmode=full">82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84 군사연구 제127집 Ⅲ. 군사혁신을 통해 승리했던 주요 전례분석 1. 프로이센의“쾨니히그래츠 전투” 가. 개    요     프로이센은  예나전투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패배2)한  이후  프랑스의  속국 으로  전락해  버리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게르하르트  폰  샤른  호르스트  장군3)  주도하에  1806년  이후부터  대대적인  군사혁신을  단행하였 다.  그  결과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군대를  재조직하고,  훈련시켜  나갔으며,  특히  산업혁명을  이용한  철도와  전신으로  기동력을  갖추고,  노리쇠  장전  라이플로  무 장함으로써  철저한  전쟁준비를  통해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그  실효성이  입증되 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이라는  좁은  영토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함께  두  나라가  지 배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1866년  6월  21일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동쪽  50마일에  위치한  쾨니히그래츠의  요새  앞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프로이센이  유럽  강대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쾨니히 그래츠  전투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예나전투  패배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승리 의  원동력이  되었던  프로이센의  군사혁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2) 맥스  부트,「MADE  IN  WAR」(플래닛  미디어,  2007.  12)  250쪽,  “나폴레옹  전쟁당시  작센  지방의  예나와  아우어슈태트에서  프로이센․작센  군대가  맞붙은  전투로서,  나폴레옹은  프 리드리히  2세  시대의  프로이센  구식  군대를  격파했다.  그  결과  1807년  7월  틸지트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3) 이한홍,  군사연구총서  제48집,「독일의  장군참모제도」(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4)  49쪽,  “프로이센군의  유명한  개혁가로서  프로이센의  국방장관이자  동시에  참모본부의  수 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810년  베를린에서  전쟁학교를  설립하였고  1807년부터  군사  개혁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예나전투의  참패  후  프로이센군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3&amp;vmode=full">8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5 &lt;그림  3-1&gt;  쾨니히그래츠  전투  요도 *  출처  :  맥스  부트,「MADE  IN  WAR」(플래닛  미디어,  2007)  285쪽 나. 쾨니히그래츠 전투     당시  프로이센의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4)는  참모본부  제도  시스 템을  바탕으로  “적  앞에서  절대  군대를  분할하지  말라”는  나폴레옹의  전쟁  제1원 칙을  적용하는  대신  군대를  3개  야전군으로  나누어서,  제1야전군이  오스트리아  주력군을  대상으로  정면공격하면서  견제하는  동안  다른  2개  야전군인  엘베군과  제2야전군이  양익측에서  포위를  통해  퇴로차단  및  섬멸하는  일명,  “대포위작전” 이라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러한  작전계획은  당시  산업기술이었던  전 신과  철도를  이용한  지휘통 제  및  보급지원,  신속한  기 동을  앞세워  3개  야전군을  신속히  공격지점으로  이동 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이  증원되기  이전에  포위섬멸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반 면,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에  패한  후로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광범위한  개 혁을  단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쾨니히그래츠와  같은  오래된  요새에만  의존하게  되는  수세적인  방어개념을  채택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이러한  작전 계획을  바탕으로  1866년  6월  21일  오스트리아에  전 쟁을  선포한  이후  다음날  4) 이한홍,  군사연구총서  제48집,「독일의  장군참모제도」(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4)  64쪽,  1857년  소장으로서  참모본부  부장직을  맡아서  1888년까지  역임하였고,  1871년  원 수로  승진하였다.  그는  프로이센-독일의  참모본부  제도를  고도의  업무수행능력에  도달케  하여  독일제국에서  최고의  군사적  권위를  얻었으며,  특히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탁월한  작전  계획가로서,  그리고  작전지휘관으로서  명성이  입증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4&amp;vmode=full">84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86 군사연구 제127집 오스트리아  국경선  너머  보헤미아로의  진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기동  및  부대배치로  6.  23일에  보헤미아  국경선을  넘었고,  3일  후에는  휘너바서,  포돌  등의  마을에서  오스트리아와  교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모하게  착검하고  돌진해  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프로이센군의  “바늘총”  위력이  십분  발휘되어  이에  대항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의  북군  사령관  르트비히  폰  베네덱은  개전  초  부터  상당수의  포로를  포함한  3만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lt;그림  3-2&gt; ▶  장약을  점화시키기  위해  종이  카트리지를  뚫고  들어가서  탄알을  총신  밖으로  밀어내는  데  필요한  소규모  폭발을  일으키는  발사  장치가  바늘처럼  생겨  “바늘총”(아래)이라  불 리게  되었고,  이러한  바늘총은  오스트리아가  사용하고  있던  미니에  라이플  방식(위)에  비해  훨씬  빨리  장전함으로써  반응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군의  협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결국  군대를  후퇴 시켜  7.  1일  쾨니히그래츠의  요새  근처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7.  2일  프로이센군의  정찰결과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주력부대가  쾨니히그 래츠  요새  근처에서  방어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당시  제1야전군과  엘베  야전군 을  지휘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칼이  제2야전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명심에  사로 잡혀  단독으로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마침  프로이센군의  몰트케가  전신을  활 용한  지휘통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제1야전군이  배치된  현장에  위치하 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됨에  따라  급히  제2야전군을  이동시켜  오스트리아군의  취약한  오른쪽  측면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본격적인  몰트케의  “대포위작전”이  시행 되기  시작했다.  만약,  이  당시  몰트게의  이러한  적시적인  현장지휘가  이루어지지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5&amp;vmode=full">8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7 않았다면  최초부터  이  작전계획의  취약요인으로  분석되었던  오스트리아군으로부 터의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베네덱은  1시간  전에  또  다른  프로이센  주력군이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대다수  병력이  스비프발트에서  프란제키  제7사단과의  결사적인  전투5)로  병력을  전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형국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쾨니히그래츠  요새  근처에서  방 어진지를  편성하고,  지형적으로  요충지였던  클룸  언덕을  사수하기  위해  포병부대 를  배치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반격작전을  시도했지만  그동안  군사혁신을  통한  훈련과  정신무장  바탕위에  “바늘총”이라는  무기체계를  앞세운  프로이센군을  상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프로이센의  엘베군과  제2야전군이  각각  양익측에서  협공하여  오스트리아군의  퇴로를  차단할  무렵,  오스트리아군은  동쪽으로  급히  철 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어진지  배후에는  엘베강이라는  하천  장애물이  위치하 고  있어  철수간  엘베강에서  많은  익사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강을  건넜다  할지라 도  쾨니히그래츠  요새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집중되어  질식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주력을  완전  섬멸하는  계획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오스트리아와의  패권다툼에 서  프로이센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전투결과  오스트리아군은  포로  1만  9,800명과  전사상자  2만  4,400명이  발생 하여  전체  병력  중  22%에  해당되는  병력들이  손실을  입게  되지만,  프로이센군은  전사상자  9,172명으로  전체  병력  중  4%에  해당되는  병력들의  손실만을  기록했다.  이러한  전사상자  수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프로이센의  완전한  승리는  차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로도  이어져  독일  통일을  이룩하는  과업을  달성하게  된  반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군림해  온  오스트리아는  오스 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으로  변모하게  되고  이어  여러  국가들로  분리되는  불 행한  국운을  맞이하게  된다. 5) 프로이센의  왼쪽  진영인  스비프발트를  제7사단이  점령하게  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이  필사적으로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는데,  당시  프로이센군  제7사단은  19개  대대로써  오스트리아군의  50개  대대를  상대로  바늘총의  위력을  발휘하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만약,  스비프발트  진지를  오스트리아군이  탈환했다면  프로이센군의  왼쪽  측면 을  돌아  배후로  기동하여  퇴로를  위협할  수  있었고,  프로이센군의  좌익  제2야전군  공격  저지를  위해  병력을  전환시켜  방어할  수도  있었던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던  진지중의  하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6&amp;vmode=full">86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88 군사연구 제127집 다. 프로이센의 군사혁신 1)  군  징병제  도입과  예비군  조직          프리드리히  대왕의  귀족과  용병  군대를  프랑스식  국민병  제도를  모델로  삼아  외국인  모병을  중지하고  부자들도  돈으로  면제받을  수  없는  보편적인  징 병으로  제도화했고,  향토방위군이라는  민병대와  실질적인  예비군  부대를  조직 했다. 이러한  군  징병제도와  향토방위군  및  예비군  부대를  조직함으로써  1815년  이후부터는  매년  40만  명  이상이  3년  동안  징병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되었는데,  현역은  군복무를  마치자  마자  2년간  예비군에서,  14년간  향토방위군에서  복무 하는  것이  규정화  되었다.  따라서  평시에는  군사지출을  최소화한  가운데  전시 에는  군대를  소집할  수  있는  훈련된  대규모  인력을  조성하여  전쟁지속능력을  확보함으로써  결국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더 욱이  당시  프로이센은  예비군  중심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원령을  선포  후  신속한  기동  및  실전배치가  제한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업기 술을  이용한  전신과  철도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신속한  지휘통제와  기 동이  가능해짐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지  이틀이  지난  후 에  이미  보헤미아  국경선까지  신속하게  기동하여  진격함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박탈하였다. 2)  군사교육  개혁         프로이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공교육  시스템을  구축하여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초등교육을  시키고,  그  중  일부를  선발하여  중등교육을  시 켰으며  소수  엘리트위주로  고등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교 실에서  산업화된  복잡한  전쟁기술들을  마스터할  수  있는  시민군이  양성되어  자연 스럽게  군내  우수인력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간  사회에서의  교육제 도와  더불어  군내에서도  우선적으로  프로이센군의  뼈대가  될  수  있는  부사관과  병을  훈련시킬  특별학교를  건립하였고,  장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관학교와  국 방대학을  설립했으며,  그  중  으뜸은  바로  전쟁대학이었다.「전쟁론」을  쓴  저자로도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7&amp;vmode=full">8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9 유명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6)가  이  전쟁대학의  초기  교장이었고,  이러한  전쟁대학 에서  교육받은  장교들  중  우수한  인력들이  새롭게  창설된  참모본부의  일원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계획을  수립하는  등  전쟁을  사전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학교를  건립한  이후부터는  능력을  기준으 로  장교를  선발하여  우수인력을  확보하고  능력이  없거나  과거  지향적인  군인들은  과감히  퇴역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모든  장교들은  선발된  이후에도  시험에  합격해야만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됨에  따라  경쟁구도  속에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고  전략과  전술적인  식견이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농부를  징집하여  구성된  오스트리아  군대로서는  이러한  군사교육  개혁을  통해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바탕으로  자신감과  사명감으로  무장된  프로이센  군대를  상대로  이긴 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3)  참모본부  제도  정착         프로이센의  참모본부는  1803년과  1809년  사이에  창설된  이후  최소  50명 에서  최대  100명  이내의  가장  유능하고  총명한  장교들로  구성되어  전쟁계획을  담당 하였다.  이러한  참모장교들은  각  야전군,  군단  그리고  사단  지휘관의  부관으로  임 명되어  지휘관들이  부대를  통솔하는  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또한,  참모장교들은  1년에  2회  이상  실제  전투가  행해졌던  곳에서  본인들이  연구한  옛날  전투에  관해  현지에서  사례를  발표하고  토의하곤  하였다.  이는  곧  현대적인  의미 에서  보면  합참이나  예하  제대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주요  참모들이  직접  과거  전적지에서  현지  전술토의를  통해  교훈을  도출하고  이를  참고하여  보 다  발전된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또한,  참모본부  요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도와  모형  테이블에서  정교한  시나리오를  시연하는  워게임을  실시하였고,  1년에  두  번  여름과  가을  야전에서의  6) 류제승  역,「전쟁론」(책세상,  2007),  “프로이센의  장군이자  전쟁이론가,  전쟁철학자이다.  (1780～1831)  평범한  프로이센  장교  아들로  태어난  클라우제비츠는  12살의  나이에  입대하여  전쟁학교를  졸업한  후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이론가로서  전쟁을  연구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 라,  스승인  샤른  호르스트와  함께  프로이센군을  개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 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실무,  군사정책,  국가정책  등의  문제를  다양하게  접하면서  전쟁 사,  전쟁이론  등의  분야에  대해  심층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8&amp;vmode=full">88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90 군사연구 제127집 워게임을  통해  대규모  기동훈련을  감독하고  통제를  하였다.  이러한  참모본부  시스템은  소수의  우수자원인  군사  엘리트를  배출하게  되었고,  당시  쾨니히그래츠  전쟁계획을  수립했던  장본인이기도  한  헬무트  폰  몰트케가  바로  이  시스템이  배 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따라서  전쟁대학을  졸업하고  참모본부  요원으로서  활약했던  몰트케는  지속적으로  전쟁을  위해  훈련을  주도하고  워게임  등을  실시해  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일선에서  각개격파  등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포위  작전”을  실현할  수  있었던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4)  산업기술  발전         프로이센은  산업혁명의  기술을  이용하여  노리쇠  장전  라이플,  일명  “바늘 총”을  개발하고,  “철도”를  이용한  병력수송으로  신속한  기동이  가능해질  수  있었 고  “전신”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전을  효과 적으로  지휘통제할  수  있었다. 먼저,  “바늘총”은  오스트리아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스트 리아군이  사용하고  있던  총구  장전  머스킷보다  월등히  우수한  노리쇠  장전  라이 플은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만약  빠르게  발사하는  라이플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프란제키의  영웅적인  제7사단은  결코  스비프발트의  그  중요한  위치를  사수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대포위  작전”도  실패했을  것이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비해  철도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약  21일  동안  19만  7,000명의  병사들과  5만  5,000마리의  말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몰 트케가  소령시절부터  군대에서  철도를  이용한  수송수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참모본부의  작전계획을  원활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철도를  적극  활용하 였으며,  이는  예비군  제도에  의존해  있던  프로이센군의  취약점인  속도를  보완하 여  오스트리아군보다  더  빠르게  수송하고  집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신”의  활용은  작전실시간에도  본부와  전방에  배치된  각  부대들과도  통신소통 이  가능하게  되어  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도  효과적으로  지휘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몰트케는  통신소통  두절상황을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지휘를  지 양하기  위해  “임무형  지휘”  개념도  병행해서  적용함으로써  작전실시간  우발상황 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89&amp;vmode=full">8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91 라. 소 결 론     프로이센은  예나전투  패배  이후  샤른  호르스트  주도하에  군사혁신을  단행하 였고,  특히  소수  엘리트  집단인  참모본부에서  배출된  몰트케가  전쟁계획을  수립 하고  대포위작전을  시행함으로써  군사혁신에  소홀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쾨니히 그래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의  전쟁대학에서  교육받은  장교들이  우수한  전략과  전술을  바탕으로  기동계획을  수립했던  사례를  통해  다른  유럽  국 가들도  이를  본받아  우수한  장교들을  양성하고자  노력하였고,  특히  현지에서의  전술토의와  야전에서의  워게임  등  모의훈련을  통해  사전  치밀하게  전쟁계획을  수 립하고  실전적인  교육훈련을  시행함으로써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가능케  하였다. 2. 독일의“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 가. 개    요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군비  증 강이  제한되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던  참모본부  제도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1920년부터  6년동안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복무했던  한스  폰  젝트  장군7)에  의해  대대적인  군사혁신이  단행되었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 랑스  전역에서  단  6주만에  프랑스를  대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대상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연합군  측에서는  주력부대들을  벨기에  북부로  이동시켜  독일의  공격 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들은  연합군을  유인하기  위한  조공에  불과했고,  마지노선(Maginot  Line)8)  북쪽의  7) 노병천,「도해세계전사」(연경문화사,  2001) 260～261쪽,  “1887년  소위로  임관,  1893년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이후  중위계급으로  1897년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드문  기록을        남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시  제3군단  참모장으로  취임한  이래  1920년  참모총장이        되어  독일군의  재군비에  착수함으로써  독일  부흥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8) 교육참고  7-0-13,「세계전쟁사(상)」(육군대학,  2004)  5～51쪽,  “마지노선은  1922년에  이  계 획의  발안자  “앙드레  마지노”  육군장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후  1928년에  요새와  요새  사이를  일정하게  분리하여  공격을  주장하는(분리요새군)  죠르프  주장과  북동쪽의  국경에 만  한정하여  만리장성식의  요새를  주장하는  페탱의  타협안이  채택되어  재정문제와  노동자  파업  등에  의해  공사가  지연되다가  1938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0&amp;vmode=full">90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92 군사연구 제127집 아르덴  삼림지대  방향으로  향한  병력이  실제  주공이었다.  프랑스와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기습을  허용함으로써  제대로  방어력을  발휘하지도  못한  채  프랑스  서부지역을  함락당했다.  또한,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독일에게  항복하고,  연합군 들은  덩케르크에서  영국으로  철수함으로써  단  6주만에  프랑스가  항복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단  6주만에  독일군이  프랑스  및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프랑스  전역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각고의  노 력  끝에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독일의  군사혁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자  한다. 나. 프랑스 전역     연합군의  경우  벨기에군은  와부르  일대를  방어하고,  프랑스의  제1군과  제 9군,  제2군은  와부르로부터  마지노선  사이를  방어하며,  제7군을  브레다까지  진출시켜  독일군의  진격을  측면에서  저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 에는  작전을  2단계로  구분하여  1단계  작전은  B집단군이  네덜란드  및  벨기에  방향으로  공격하고,  C집단군이  마지노선  정면에서  견제작전을  수행하며,  A집 단군이  주공으로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돌파한  후  B집단군과  협격하여  연합 군을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또한,  2단계  작전은  B집단군이  솜강  하류에서  남서쪽으로  진격하고,  A집단군이  파리동부를  돌파한  후  C집단군과  협격하여  프랑스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결국,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 전  당시의  참호전을  바탕으로  한  수세적인  방어개념이  지배적이었던  반면에,  독일군은  참모본부  주도하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교훈삼아  “공격과  기동”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공세개념을  채택함으로  초기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합군과  독일군의  작전계획  요도를  살펴보면  다음  &lt;그림  3-3&gt;,  &lt;그림  3-4&gt;와  같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1&amp;vmode=full">9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93 &lt;그림  3-3&gt;  연합군  작전계획  요도 &lt;그림  3-4&gt;  독일군  작전계획  요도 *  출처  :  노병천,「도해세계전사」(연경문화사,  2001)  295~296쪽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부로  2단계  작전  중  1단계  작전을  개시하여  우선적으 로  신속하게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공수부대는  벨기에  국경  지대의  요새인  에방  에말을  점령하였다.  최초  독일의  예상처럼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이  벨기에로  진 격하여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벨기에군과  합류하지  못한  채  벨기에군은  5월  28일  독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또한,  프랑스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북쪽  부분인  마지노선이  끝나는  아르덴  삼 림지대를  5월  13일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하는  기갑부대가  공군과  합동작전하  “전 격전”9)을  바탕으로  속도와  충격력을  발휘하여  스당지역까지  돌파하면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당시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프랑스  제9군과  제2군은  독일군의  공 격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전투력이  약한  부대를  편성함으로써  효과적인  방어력  발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상당수의  전차를  보병부대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결국  독일군의  집중된  기갑부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고  통 신수단이  제대로  갖쳐  있지  못해  작전실시간  식별된  각종  호기를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반면,  독일  기갑부대들은  무선  통신수단에  의한  지휘통제와  9) 김종하․김재엽  공저,「군사혁신  RMA과  한국군」(북코리아,  2008)  89쪽,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격전은  그  자체가  체계화,  이론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서부전선  돌파  과정에서  수립된  임기응변의  산물이며,  독일군  특유의  ‘임무형  전술(Mission-type  Tactics)’이  승리에  보다  크게  기여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칼- 하인츠  프리저  저,  진중근  역,「전격전의  전설」(일조각,  2007)을  참고”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2&amp;vmode=full">92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94 군사연구 제127집 임무형  지휘가  결합되어  “속도와  과감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스당에  형성된  돌파 구를  확장하면서  전과를  확대하여  서부  해안으로의  돌진을  감행한  결과  열흘  만인  5월  19일에  영국  해협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때,  독일은  5월  24일부로  히틀러가  이틀간의  진격정지  명령을  내리고  대신  독일  공군에  의해  나머지  작전을  수행하 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해안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 는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고,  철수작전인  일명  “다이나모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어  독일군의  제2단계  작전이  6월  5일부로  개시되었는데,  프랑스군은  솜강과  엔강을  연하는  “베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독일군의  첫  공격은  잘  막아냈지만  절 반의  병력을  상실한  프랑스군으로서는  마지노선  좌단으로부터  영국  해협에  이르 는  광대한  지역을  계속해서  방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6월  14일부로  독일군에 게  프랑스  파리  함락을  허용하게  되고  결국,  6월  22일  콩피에뉴에서  프랑스  정부 대표는  1918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항복  조인을  하였던  바로  그  열차  안에서  히틀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lt;그림  3-5&gt;  프랑스  전역  요도 &lt;그림  3-6&gt;  프랑스  “베강  방어선”  요도 *  출처  :  마틴  폴리,「제2차  세계대전」(생각의  나무,  2008)  제2차  세계대전  초기  46일간의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  전사  27,000명,  실종  18,000명,  영국군  전상자  68,000명,  프랑스군  전상자  123,600명,  포로  20만명이  발 생하였다.  결국,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함으로써  북부  프랑스와  대서양  해안지대는  독일군  점령지로  남게  되었고,  알자스 - 로렌  지역은  독일  영토가  되었고,  프랑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3&amp;vmode=full">9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95 함락시기에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한  이탈리아는  사부아의  일부분을  확보하였 으며,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  점령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다. 독일의 군사혁신 1)  군대의  정예화와  참모본부  제도  존속         제한된  수의  국가방위군을  “이중의  목적을  가진  간부화된  정예군”으로  만 들기  위해  모든  병사는  부사관의  역할을,  부사관은  초급장교의  역할을  담당하고,  모든  장교는  대부대의  지휘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고급  지휘관이  될  수  있도록  엘리트  군대를  육성하고자  하였다.  장교로  임관하기  위해서는  대학졸업  이상의  학력과  4년  6개월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했고,  특히  귀족과  구군벌  가문  자제들의  다수를  장교로  임관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출신성분과  학력의  요소는  병사  선발 에도  중요하게  적용되어  징집제도가  지원병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우수하게  육성될  수  있었다.  이렇게  우수하게  육성된  부대  지휘관들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의  “임무형  지 휘”가  효율적으로  활용되어  작전실시간  변화되는  환경에  쉽게  대처해  나갈  수  있 었다.  반면,  프랑스  군대는  중앙화된  지휘체계에  의존했기  때문에,  사전  수립된  계획에서  벗어나서  탄력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없었고  이것은  곧  작전실시간  많은  호기들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설치를  금지당한  참모본부의  전통과  기능을  정부  각  부처에  이관시킴으로써  임무를  지속시켰다.  아울러  새로운  참모요원  양성을  위해  우수한  사람을  후보자로  선발하여  7개의  군관구에  설치된  군사학교에서  2년 간  훈련을  받게  하고  그  중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들을  다시  선발하여  베를린에  있는  국방성으로  전입시켜  참모본부  요원으로서의  경험을  축적하게  하였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의  교훈10)이  무엇인지  참모들에게  광범위한  연구를  하도록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사전  치밀한  준비와  실행력을  바탕으로  패배자로서  승자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반성하고  도약의  기회로  삼은  결과  초기  프랑스  전역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 James  S,  Corum,「젝트장군의  군사개혁」(육군대학,  1998)  17～42쪽,  “전략적․전술적․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크게  구분하여  교훈을  도출하였고,  이러한  교훈은  독일  육군에게      공격과  방어시  기동전술과  융통성면에서  우월했다는  신념을  강화시켜  주었으며  독일          육군의  훈련,  편성,  전술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4&amp;vmode=full">94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96 군사연구 제127집 2)  동원체제  유지와  예비군  전력  확보         장기적인  군의  보급  및  국가  경제력  동원을  위해  국방성내에  동원국이라는  비밀특별국을  설치하여  경제담당  참모본부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비 군의  역할은  주로  경찰과  민간인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는데,  당시  경찰은  연합국 측에서  그  수를  제한하였지만  보안경찰,  지방경찰  등의  명칭으로  계속  존재하였 으며,  장교출신자에  의해  훈련되고  모든  군사훈련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예비군은  공식적으로는  단기계약에  의해  고용된  민간인  노동자였지만  실제는  군으로부터  급여,  훈련,  명령을  받았으며,  명백하게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존재한  예비군 이었다.  따라서  독일은  나름대로의  국방성내  동원국을  설치하여  국가  동원능력을  구비하고  예비전력인  예비군을  확보함으로써  전쟁초기  어느  정도의  전쟁을  지속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6년간  독일군  병력은  10만명에서  370만 명으로  성장했고  전차와  항공기가  새롭게  확대된  군대의  최전선에  배치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시  전격전을  구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3)  전술교리와  무기체계  발전         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들은  전승의  안도감에서  방어전  교리에만  집착하 고  있을  때  독일군  지도자들은  패전을  교훈삼아  공격전술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질적으로  우수하고  고도로  기동화된  소규모  단위의  정예부대를  육성하고자  하였 다.  특히,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군사이론가인  풀러나  리델하트,  드골  등에  의해  발전된  기계화  이론들을  구데리안  등에  의해  발전  및  완성시킴으로써  독일  고유 의  전술교리가  태동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1921년  젝트가  “독일군  재건에  관한  기본사상”을  발표함으로써  기동을  위주로  한  공격의  우위와  더불어  전격전의  기 반을  다지게  했다.  또한,  수많은  항공기  조종사들은  민간  항공사에서  비행훈련을  받았고,  베를린  공과대학에  파견된  다수  장교들은  과학기술  적용  가능성을  연구 하였으며,  많은  참모장교들과  군사전문가들이  일본․중국․남미제국․발틱제국․ 소련  등지에서  현대장비를  다룰  수  있는  위탁훈련을  받음으로써  전술교리와  연계한  과학기술과  현대  무기체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발전시켜온  전술교리와  무기체계가  결합되어  전차와  항공기들이  주요한  공격지점에  집중할  수  있는  유연성과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무선통신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것은  곧  전차를  집중운용하여  충격력과  속도발휘를  가능하게  하였고,  숙달된  항공조종훈련을  바탕으로  한  항공지원하  기갑부대를  성공적으로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5&amp;vmode=full">9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97 활용하여  효율적인  합동작전  기반하에  프랑스  후방  종심지역까지  신속하게  침투 시킴으로써  프랑스가  단  6주만에  항복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라. 소 결 론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의  군  수뇌부들은  참호전을  바탕으로  화력이  기동을  압도하는  방어  위주의  전략을  채택하였고,  140km에  걸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거대한  방어용  요새인  마지노선을  구축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 고자  하였다.  반면,  독일군은  한스  폰  젝트  주도하  군사력  재건을  추진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에서의  교훈을  면밀히  분석,  평가함으로써  기동력에  의한  신속하고 도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교리와  각종  무기체계를  개발하였다.  결국  독일의  전격전  성공과  프랑스의  마지노선  실패는  군사혁신의  성패가  전쟁에서  얼 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3. 미국의“걸프전쟁” 가. 개    요     미국은  70년대  초  베트남전쟁을  전후하여  군대내에  침체된  분위기가  보편화 되고  군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는  위기  속에서  새로운  전쟁개념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베트남  전쟁에서의  9대  교훈11)을  도출하여  과감한  군사혁신을  단행함 으로써  걸프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반면,  이라크는  산업시대의  유물인  징병제와  재래식  무기를  바탕으로  한  소모전을  감행함으로써  미국의  교육훈 련  혁신을  포함한  전문  직업군인과  첨단무기체계를  바탕으로  한  기동전에  효과적 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걸프전쟁은  이라크가  1990년  8월  2일  3개  기갑  및  기계화  사단  등을  투입하여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사우디아라비아  침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사막의  방패작전」을  실시하고,  이어  쿠웨이트  내의  이라크군을  축출하여  쿠웨이트  정부를  회복하기  위한「사막의  폭 풍작전」을  시행하였다.  결국,  일사불란한  다국적군의  공군  및  지상작전을  바탕으 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로부터  축출시키는데  성공하게  되고,  작전개시  43일  만인  1991년  2월  28일에  부시  대통령의  종전선언으로  작전이  종료되었다. 11) 군사평론  311호,「사막의  폭풍작전  교훈」,  “군인의  자질  향상,  교육훈련  및  간부양성        등  9개  교훈을  도출하였다. 세부내용은  132쪽  참고”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6&amp;vmode=full">96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98 군사연구 제127집 이렇게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  걸프전쟁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의  실패를  교훈삼아  걸프전쟁에서  완전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미국의  군사혁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나. 걸프전쟁     이라크는  공화국수비대  소속  3개  사단과  특수작전  부대를  이용하여  쿠웨이트 를  점령하고,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국경을  따라  3선  방어개념에  입각 해서  다국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은  사 우디아라비아  방어를  위해「사막의  방패작전」12)을  실시한  후,  쿠웨이트  내의  이 라크군  축출  및  쿠웨이트  정부를  회복하기  위해  작전을  제4단계화하여「사막의  폭풍작전」을  계획하였다.  결국,  이라크는  구시대적인  재래식  무기를  바탕으로  한  장기  소모전을  계획한  반면,  미국은  발전된  교리와  첨단  무기체계  등이  결합된  작전적  차원의  기동전을  계획하고  육․해․공군  합동작전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 면서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lt;그림  3-7&gt;  사막의  폭풍작전  작전계획     *  출처  :  기다  히데도,「걸프전쟁」(연경문화사,  2002),  462쪽 12) 미국은  1982년  12월에  이미  남서아시아에  미  중부군  사령부를  설치하여  “걸프전쟁”          이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주기적인  훈련을  시행해  왔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7&amp;vmode=full">9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99 먼저,  이라크가  1990년  8월  2일  01:00에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소속  3개  사단이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  남쪽과  서쪽방향으로  공격하고,  동시에  특수작전 부대가  쿠웨이트  국왕인  아미르의  궁전과  주요시설을  점령함으로써  공격  당일  19:00에  쿠웨이트시를  완전  장악하였다.  이에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의  사우 디아라비아  침공  위협에  대응하고  주변국으로의  전쟁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1990 년  8월  7일부로「사막의  방패작전」 개시를  지시함과  동시에  제82공정사단  선발대  이동을  시작으로  8월  말까지  미군은  육군  15만명,  해병대  15,000명,  지원부대  20,000명,  항모  3척을  포함한  함정  14척,  항공기  460대  등의  대부대  이동을  완료 하였다.  또한,  이집트,  시리아  등  다른  아랍  국가들도  사우디아라비아에  파병하기 로  결의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등  7개국도  독자적으로  전투  병력을  파견하여  다 국적군(Multi-National  Force)13)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후  유엔을  대표해서  미국 은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이라크가  끝내  유엔  결의안  이행을  거부함에  따라  슈워츠코프  사령관은  명에  의거  1991년  1월  17일부로「사막의  방패작전」이「사막의  폭풍작전」으로  전환되었다.  이  작전은  1월  17일  현지시각  03:00부로  대  이라크  대규모  공습작전을  시작으로  2월  28일  14:00  부시  대통령의  정전명령이  있기까지  43일간  실시되었는데,  1,000여  시간에  걸친  공군작전과  100 시간의  지상작전으로  구분해서  실시되었다.  먼저,  제4단계  작전중  1～3단계에  해당되는  공군작전을  38일간  실시하여  첨단 감시자산과  연계한  미  공군의  F-117A  스텔스기들의  정밀유도폭탄  투하  등으로  이라크의  화생방  무기와  방공체계,  지휘  및  통제체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이라크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이러한  공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지상군은  1월  17일,  20만명  이상의  병력과  수천톤이  넘는  장비로  구성된  2개  군단(제7군단,  제 18공정군단)이  150～250마일에  걸쳐  서쪽으로  이동하는  “헤일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을  감행하였다.  슈워츠코프  장군에  의해  명명된  이  기동작전은  이라 크군의  허를  찔러  주공을  서부전선으로  지향하기  위해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기동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이  기간중에  다국적군은  해군과  해병에  의한  해상작 전  연습과  쿠웨이트  해상주변에  많은  해상병력을  주둔시키고,  쿠웨이트와  사우디 13)  다국적군은  동맹군도  아니고  합동사령부도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미  중부군사령관  슈워 츠코프  대장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연합군  사령관  칼리드  빈  술탄  중장의  협조하에  지휘 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8&amp;vmode=full">98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100 군사연구 제127집 아라비아의  요새화된  국경선을  따라  지상군  병력을  집중하는  것처럼  양동작전을  실시함으로써  이라크가  상륙작전과  공격방향에  대해  오판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것은  범  아랍군과  미  해병대가  이라크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해안을  따라  쿠웨 이트시로  진격하여  계속  북진할  것이라는  기만작전하에  사전에  서쪽에  배치시켜  놓은  2개  군단이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의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  격멸하 기  위함이었다.  결국,  이러한  지상작전  계획은  그동안의  군사혁신을  통해  발전되 어  온  작전적  차원의  기동전인  “공지전투교리”와  첨단  무기체계를  바탕으로  사전  치밀한  계획하에  사막에서의  전투를  가상으로  부단한  훈련을  실시해  온  결과,  바 로  그  실효성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군작전과  양동작전을  통해  이라크군의  전력  손실을  최대화하고,  다국 적군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됨에  따라  제4단계  작전인  지상작전 을  개시하였다.  공격개시  첫날인  2월  24일에  제101공정사단이  대규모  공정작전을  실시하여  재보급기지를  구축하고,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형성된  이라크의  통신로 를  차단하기  위해  즉시  제3기갑연대와  제24기계화보병사단이  이라크  북부를  공격 했다.  동쪽의  제7군단  지역에서는  제1보병사단과  영국  제1기갑사단이  이라크  방 어진지를  돌파하고,  제2기갑연대와  제1․3기갑사단은  강력한  이라크군  진지를  우 회하여  공격했다.  쿠웨이트  해안선을  따라서는  사우디아라비아군을  중심으로  하 는  주력이  이라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쿠웨이트시를  공격했다.  이렇게  지상작 전이  첫날부터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자질과  사기를  갖춘  전문  직업군인들로  구성된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에  비해,  이라크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동기  부여도  안  된  징집병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싸워  보지 도  못하고  다국적군에  투항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2월  26일에는  제18공정군단과  제7군단  예하의  부대들이  마지막  박차를  가하여  동쪽의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의  잔존병력들을  궤멸시켰고,  특히,  제18공정군단  예하  제24보병사단은  전차부대로서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이라크  영내로  진격한  뒤  이라크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바스라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격해  나갔다.  제7군단은  목래폭풍의  악조건  하에서도  GPS의  도움을  받아  계속  진격해  나가면 서  M1  에이브람스  전차의  위력  발휘로  바스라  시의  서남방에  위치하고  있던  타 와칼나  공화국수비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다.  이때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철 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첨단  감시장비  중의  하나인  조인트  스타즈의  공중폭격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99&amp;vmode=full">9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01 유도로  철수하는  1,900대  이상의  이라크군  차량을  파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2월  27일에는  드디어  쿠웨이트  영토를  회복하였고,  미  부시  대통령이  걸프  현지시각  2월  28일  08:00에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을  때  미군과  다국적군은  43 개의  이라크군  사단을  거의  궤멸시키거나  무력화시킨  상태였다.  결국,  이라크  후 세인은  유엔의  12개  결의안  및  휴전조건  5개항14)을  수용하면서,  1991년  3월  3일  휴전회담  결과  “군사분계선  설치(폭  2km의  완충지대  설치),  분계선  20km  이내  비행금지”  등이  결의되어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다. 미국의 군사혁신 1)  군  모병제  정착  및  전쟁지속능력  확보         미국은  70년대  초  베트남전쟁을  전후하여  군내  침체된  분위기는  징병거부  현상으로  이어져  미  육군  병사들의  자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최우수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모병업무를  맡기고  직접  훈련시키는  방안을  채택하여  병사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의회 를  통해  전역  군인들에게  대학  장학금을  제공하는  새로운  제대군인  원호법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  대한  임금  인상을  통한  동기유발로  육군내  복지개선과  긍정적 인  육군상  홍보에  힘입어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질이  우수한  병사들이  지 원함에  따라  모병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한편,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본토의  방위력을  유지하면서도  대외전쟁을  수행하 기  위해서는  많은  육군병력이  필요했지만  예산문제  등의  이유로  병력을  부족하게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사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미  육군은  70년대  중반부터  상비군과  주방위군(National  Guard),  그리고  예비군(Army  Reserve)을  합한  총병력의  일정  수준은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의  구성  비율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총병력  운용정책(Total  Force  Policy)”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상비군은  전투지원  및  전투근무지원  체제를  대폭  강화하였 고,  유사시  예비군들은  최소한  30일간의  동원훈련만  마친  후  원소속  사단에  합류 14) 노병천  저,「도해세계전사」(연경문화사,  2001),  648쪽,  휴전조건  5개  항에는  “모든  안보리  결의안(12개)  수락,  쿠웨이트  합병  무효화  및  피해보상  약속,  다국적군의  포로와  유해      및  쿠웨이트인을  포함한  외국인  즉시  석방,  기뢰  및  지뢰  등  모든  폭발물  위치와  특성      등  통보,  쌍방  군사령관의  48시간  이내  휴전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0&amp;vmode=full">100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102 군사연구 제127집 하도록  제도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걸프전쟁  당시  민간자산과  예비전력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고,  전쟁발발과  동시에  전략  수송을  위해  많은  민간  선박과  항공기를  임차하였으며,  예비군은  군수지원  임무의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전장지역  내에서는  공정부대를  이용하여  군수보급기지를  설치  및  운용하였으며,  직접지원이  제한되는  요소들은  해당  지역내  동맹국의  지 원으로  해결함으로써  300마일에  걸쳐  펼쳐진  “사막의  폭풍작전”이  계획대로  진행 될  수  있었다. 2)  교육훈련  혁신         1973년에  창설된  미  육군  교육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이  된  윌리엄  드퓨이 (William  Depuy)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정예화되지  못한  초급  지휘관들이  무모하게  희생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초급장교들을  대상으로  전쟁의  원칙과  원리 보다는  사격술과  정비를  실습하고  필요한  전투기술에  대한  숙달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에  해군은  미  해군  전투기학교를  설립하여  실전과  같은  공중전  훈련을  통해  조 종사들의  전투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미  공군도  1975년  자체  전투비행학교를  설립하였고,  미  육군도  자체  실전훈련장인  국립훈련센터(NTC  :  National  Training  Center)를  설치하여  마일즈(MILES)  장비  등을  이용한  반복적 인  훈련으로  부대의  전투능력과  생존성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특히  수십  년간  사 막에서의  전투에  대비해서  지속적인  훈련을  실시해  왔다. 또한,  베트남전쟁  이후  우수한  부사관을  양성하고  부대내에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기초반,  초급반과  고급반,  최고과정  4단계로  구성된  부사관  양성제도를  신설 하였고,  이와  더불어  봉급과  복지가  개선되면서  부사관들의  자질이  많이  향상되 었다.  이러한  부사관들의  자질이  향상됨에  따라  장교들도  더욱  수준  높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간부들의  질이  크게  향상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경우에도  1982년  미  지휘참모대학의  새로운  교육과정인  고급군사과정(SAMS  :  School  of  Advanced  Military  School)을  신설 하여  지휘참모대의  1년  수료자  중  50명의  소수  정예자원을  선발하여  별도의  전문 교육  등  전쟁술을  연구하게  하였다.  결국  이러한  노력의  산실이  걸프전쟁  당시  지휘관들의  훌륭한  자질로  귀결되었고,  베트남전쟁에서의  참전경험과  고대전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현대무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  낯선  지형에  대한  적응능력  등을  바탕으로  걸프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1&amp;vmode=full">10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03 3)  전술교리와  무기체계  발전         윌리엄  드퓨이(William  Depuy)  장군은  4차  중동전쟁을  미래전의  전형으로  간주하여「FM  100-5  작전술」이라는  새로운  교리를  발간하게  되었고,  과거  “적이  기동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압도적인  화력을  자유로이  구사하여  적을  마비”시켰던  교훈을  적극  반영15)함으로써  적극적  방어  개념을  도입하여  독일  국경부근에서  소련의  침공을  차단하는  데  그  주안을  두었다.  반면  드퓨이  장군의  후임으로  교육 사령부에  취임한  돈  스태리(Donn  Starry)  장군은  다소  소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적극적  방어개념에서  탈피,  새로운  공지전투  교리(AirLand  Battle  Doctrine)를  주창함으로써  육군의  작전술  개념이  재정립되었다.  이는  걸프전쟁  당시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기동전의  기초를  제공하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당시  미국은  예산  문제  등을  고려하여  장차  육군이  보유해야  할  5대  무 기인  UH-60,  AH-64  아파치,  패트리어트  미사일,  신형  M1  에이브럼즈  전차,  보 병용  M2/3  브래들리  장갑차를  선정,  집중  개발하였다.  또한,  정밀유도  무기와  첨 단  정보감시자산  개발로  항공  및  정밀타격  전력을  이용함으로써  이라크군의  지휘 통제  체계를  마비시키고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결국,  걸프전쟁  당시  작전적  차원의「공지전투교리」와  첨단  무기체계가  결합되어  다국적군의  지상군  피해를  최소화한  가운데  다국적군의  완승을  주도할  수  있었다. 4)  합동성  강화         1980년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구출작전과  1983년  그레나다  침공  작전을  통해  군부간의  과다  경쟁으로  취약점이  노출되어  통합된  지휘체계를  위한  군  개 혁이  요구되었다.  이에  1986년  애리조나  주  공화당  의원인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 원과  앨라배마  주  민주당  의원인  빌  니콜스  하원의원이  1947년에  추진했던  골드 워터-니콜스  국방부  개편법에  의해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  장관,  합동군  사령관에  이르는  명확한  지휘체계를  확립했다.  이에  따라  각  군  참모총장은  합동군사령관 에게  배속될  각  군  장비와  훈련에  대해  책임을  지고,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군사  자문관  역할은  합참의장이  맡게  되었다.  또한,  장성급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라면  합동군  참모진  경력이  필수였다.  1986년에  제정된  골드워터 - 니콜스  법은  야전  15)  Robert  H.  Scales,「Certain  Victory」(1993),  13쪽에서  인용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2&amp;vmode=full">102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104 군사연구 제127집 사령관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위임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카자흐스탄에서  케냐에  걸친  25개국을  작전지역으로  하는  중부사령부의  제3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도  바로  이러한  권한을  위임받아  합동성을  기반으로  한  공지전투  교리를  바탕으로  효과적인  걸프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할  수  있었다. 라. 소 결 론     미국의  경우에도  과거  프로이센과  독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베트남전쟁에서의  실패  이후  교육훈련  혁신과  간부  및  병사들의  질  향상,  통합된  지휘체계  구축  등  군사혁신을  단행함으로써  걸프전쟁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시  제18공정군 단  예하  제24보병사단장이었던  배리  매카프리  장군은  “걸프전쟁에서  미국은  단  100시간  만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승리하는데  15년이  걸렸다”고  말 한  사실에서도  군사혁신을  단행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1958년에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미국  대통령이  육․ 해․공  각  군에  의한  별개의  전쟁은  이미  사라졌다고  천명한  바와  같이  걸프전쟁은  아이젠하워의  예측대로  그렇게  싸워  승리했다.  Ⅳ. 분석 및 교훈 지금까지  살펴본  3가지  주요  전례  속에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도표  4-1】과  같다. 【도표  4-1】  군사혁신을  통해  승리했던  주요  전례  속에서의  공통점   ①  과거  전쟁  패배  이후  군사혁신  통해  차후  전쟁승리  ⇒ “정신무장,  군기강  확립”       (예)  프로이센  예나전투,  독일  1차  세계대전  패배,  미국  베트남전쟁  실패 ②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리더십  발휘로  군  개혁  선도       (예)  프로이센의  샤른  호르스트와  몰트케,  독일의  한스  폰  젝트  등 ③  타  국가  제도와  전술교리를  자국의  특성에  맞게  무기체계와  결합,  발전       (예)  독일의  전격전,  미국의  공지전투교리  등  ④  우수인력  확보  및  소수  정예화에  주력  ⇒ “교육훈련  혁신”       (예)  참모본부  제도,  미  지참대의  SAMS  과정,  미  교육사령부  창설  등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3&amp;vmode=full">10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05 【도표  4-1】에서  살펴본  것  같이  고대로부터  현대전쟁에  이르기까지  군사혁신을  통해  승리했던  주요  전례들  속에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을  기초로  “우리  군에게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정신전력 강화 및 군기강 확립 프로이센의  쾨니히그래츠  전투로부터  미국의  걸프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  패배와  실패를  교훈삼아  군사혁신을  통해  차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은  예나전투  패배  이후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리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독일 은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국가  존속  자체가  위태로 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에는  베트남전쟁을  전후하여  침체 된  분위기  속에서  병역기피  현상까지도  발생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 러나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교훈으로  삼아  정신무장과  군  기강  확립을  바탕으로  군사혁신을  단행하였고  그  결과  차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프로이센과  독일,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군의  경우에도  과거  임진왜란으로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아픔과  치욕을  다시는  겪지  않겠 다는  정신무장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  기강이  확립되어야만  앞서  살펴  본  나라들처럼  과감한  군사혁신을  통해  과업을  달성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 군 지도부 리더십 역량 발휘 프로이센의  샤른  호르스트와  몰트케,  독일의  한스  폰  젝트,  미국의  대통령을  위시 한  군  지도자  등은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군사혁신을  주도하여  단행함으로써  차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의  샤른  호르스트  장군은  예나전투  패배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 였고  몰트케는  더욱  발전시켜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독일의  한스  폰  젝트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대대적인  군사혁신을  단행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 다.  또한,  미국의  경우에도  카터  및  레이건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군  지도자들이  베트남전쟁에서의  실패를  교훈삼아  새로운  전쟁개념을  모색하고,  과감한  군사혁 신을  단행함으로써  걸프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4&amp;vmode=full">104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106 군사연구 제127집 우리  군의  경우에도  6․25전쟁을  겪은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온  지금  과감한  의식전환을  통한  한국군의  군사혁신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 보다도  군  지도부로부터  예하부대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 으로  한  솔선수범이  절실히  요구되어지고  있다.  또한,  미래의  보다  높은  이상과  목표를  실현하고  한국군의  진정한  주도세력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겠다. 3. 전술교리와 무기체계 발전 프로이센의  몰트케는  “대포위  작전”을  계획하면서  당시  산업기술이었던  전신과  철도를  활용하여  지휘통제는  물론  신속한  기동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제2차  세 계대전  당시의  독일의  전격전은  본래  풀러와  리델하트,  드골을  비롯한  영국과  프 랑스  군사사상가들에  의해  이론적  기틀이  마련된  것이었으며,  전차와  항공기  등이  결합되어  그  위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작전적  차원의  공지전투  교리를  개발함으로써  걸프전쟁시  기동전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첨단  정 보자산과  연계한  항공  및  우주전  개념이  결합되어  다국적군의  완승을  주도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나라들은  나름대로  각  나라  고유의  군사사상을  계승  또는  타  국가들의  교리들을  보완,  발전시켜  군사혁신을  통해  새로운  전략과  전술교리 들을  창안해내고  무기체계와  결합하여  차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  군도  고대시대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업 적을  바탕으로  한  우리  군  고유의  군사사상이나  군사이론들을  계승․발전시키고,  타  국가들의  전술교리들을  보완․발전시켜  우리  군의  무기체계와  결합해  나감으 로써  우리  한국군만의  전술교리들을  창출해  낼  필요가  있겠다. 4. 교육훈련 혁신 동서고금의  전쟁역사를  통틀어  새로운  무기가  승리를  가져다주는  사례는  많이  증명되어  왔지만,  결국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는  주인공은  역시  인간이고  인간이  곧  교육훈련을  통해  새로운  무기를  취급하고  전술교리를  습득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보유한  전투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전력운용  방식의  개발과  구현능력,  그리고  전투현장에서  능숙하게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5&amp;vmode=full">10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07 장병들의  임무수행능력에  대한  숙련이  요구된다.  프로이센과  독일은  전쟁대 학을  설립하고  우수한  자원은  참모본부  요원으로  발탁되어  전쟁계획을  담당 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군내  우수인력이  확보되고  교육훈련을  통해  정예화된  군대  육성이  가능해졌다.  미국의  경우에도  국립훈련센터를  설치하여  교육훈 련을  강화하고  미  지휘참모대학의  새로운  교육과정인  고급군사과정(SAMS)을  신설하여  우수자원을  확보하는  등  걸프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건국  이래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군은  전쟁이나  전투를  치른  경험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과거  프로이센으로터  현재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감한  교육훈련  혁신을  주도하고  동참하는  길만이  군내  자원의  질이  향상될  수  있고,  “강한  전사,  강한  군대”를  구현 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Ⅴ. 결      론 지금까지  군사혁신에  대한  정의와  유형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러한  이론적  틀  속에서  “쾨니히그래츠  전투”와  “2차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  그리고  “걸프전 쟁”을  중심으로  과거  전쟁에서의  패배를  교훈삼아  군사혁신을  통해  차후  전쟁에서  승리했던  주요  전례들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  속에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을  도출해  봄으로써  우리  군에게  주는  시사점을  제시해  보고  전쟁사적인  의미에서의  군사혁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결국,  고대로부터  “전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는  각고의  “군사혁 신”을  통해  보다  확실성을  보장한  가운데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군사혁신의  성공여부가  전장에서의  승패와  직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사혁신은  그  시대의  새로운  기술과  군사사상을  기초로  “창 의적이고  혁명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그  진가가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살 펴본  주요  전례들  속에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들을  도출해  보고,  “현재의  우리  군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봄으로써,  전쟁사적의  의미에서의  진정한  군사혁신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6&amp;vmode=full">106page</a><br><br> ..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108 군사연구 제127집 끝으로  이  글을  마치면서  이스라엘이  과거  “마사다  요새”16)에서의  아픔과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장교임관  선서식을  시행하는  것처럼  우리  군의  경우에도  병사를  포함한  모든  장병들이  과거  임진왜란으로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치 욕을  당했던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고  그러한  아픈  교훈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확고한  정신무장이  선행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본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군  모두  각자가  적극적이고  주도자적인  위치에서  과감한  군사혁신을  위한  선도적 인  역할을  수행해냄으로써「정예화된  선진강군」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6) 노병천  저,「도해세계전사」(연경문화사,  2001),  “예루살렘  남쪽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사다  요새는  로마  군단에  의해  멸망당한  유태인  960명이  최후  저항을  하면서  더  이상의  치욕을  당하기  전에  모두  자결했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이스라엘  장교들은  임 관식시  마사다의  요새에서  엄숙히  임관선서를  하면서  조상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7&amp;vmode=full">10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09 1.  김동기․권영근  저,「합동성  강화  美  국방개혁의  역사」(2007.  5.  15) 2.  김종하․김재엽  저,「군사혁신  RMA과  한국군」(2008.  10.  5) 3.  권태영․노훈  저,「21세기  군사혁신과  미래전」(2008.  7.  15) 4.  김종하  저,「미래전,  국방개혁  그리고  획득전략」(2008.  8.  20) 5.  이한홍  역,「독일의  장군참모제도」(2004.  11) 6.  에드워드  N.  루트워크  저,「미국  국방개혁론(안보총서  44호)」(1985.  12) 7.  Robert  H.Scales  저,「CERTAIN  VICTORY」(1993) 8.  맥스부트  저,「MADE  IN  WAR,  전쟁이  만든  신세계」(2006) 9.  James  S.  Corum  저,「젝트장군의  군사개혁」 10.  Thomas  X.  Hammes  저,「21세기  제4세대  전쟁(안보총서  109호)」(2008.  12) 11.  Williamson  Murray,  Allan  R.  Millett  저,「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군사혁신    (상,  하)」(2001.  12) 12.  피터  라레트  저,「현대전략사상가(상,  중,  하)(안보총서  53,  54,  55)」(1988.  12) 13.  베빈  알렉산더  저,「혁신으로  승리한  전쟁의  교훈」(2005.  8.  2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8&amp;vmode=full">108page</a><br><br> .. 중령    최 용 성 육군3사관학교 전쟁사 교수 &lt;필자 약력&gt; 경북대 대학원(문학박사), 3사교 전쟁사학 교수(현) &lt;저서&gt; 세계전쟁의 이해, 6ㆍ25전쟁의 이해, 젊은이를 위한 세계 전쟁사, 젊은이를 위한 전쟁의 이해 소령    이 연 호 육군3사관학교 전쟁사 강사 &lt;필자 약력&gt; 원광대 사학과 졸업 &lt;저서&gt; 탈냉전기 이후 북한 군사전략에 관한 연구 Ⅰ.  머  리  말 Ⅱ.  중공군의  제3차  공세       1.  서부축선의  위기       2.  중부축선의  위기 Ⅲ.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  제1단계  :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중공군의  정체  확인       2.  제2단계  :  썬더볼트(Thunderbolt)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  반격       3.  제3단계  :  라운드  업(Round  Up)작전으로  중동부전선에서  반격 Ⅳ.  맺  음  말 110 군사연구 제127집 전쟁사   3    66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  중공군  제3차  공세  이후  유엔군  제1차  반격을  중심으로  -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09&amp;vmode=full">10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1 Ⅰ. 머  리  말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  선상에서  기습  남침하여  시작되었다.  그후  약  4개월이  지난  10월  21일부터는  공격의  주체가  북한군에서  중공군으로  바 뀌었다.  그  때부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유엔군은  10월  20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향해  진출할  때  중공군은  21일 에  평안북도  운산  및  온정리  일대에서  전개한  후  25일에는  운산의  국군  제1사단과  온정리의  국군  제6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청천강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의  전투를  가리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제1차  공세’라고  한다.1) 또  중공군은  1개월  후인  11월  25일부터  제2차  공세를  감행하여  26일에는  덕천- 영원선에서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2군단  정면에  9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였다.  그  결과  국군  제2군단이  붕괴되었고,  중공군은  덕천과  맹산  일대로  진출하였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  중공군  제9병단(12개  사단)이  유담리에  도착한  미  제 10군단의  제1해병사단  선두부대를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유엔군은  11월  28일에  중공군의  참전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평양 - 원산을  연하는  선으로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하였다.2)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패배한  후,  비로 소  중공군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2차  공세  이후  중공군은  약  1개월  동안  병력을  보충하고  필요한  식량도  확보 하여  12월  31일  전  전선에서  제3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은  1951년  1월  4일  또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유엔군은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37도선에서  전열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중공군의  공세현황은  다음  【표  1】에  제시되어  있다.  결국  미국은  중국에게  휴전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와  같이  중공군이  제1,  2,  3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유엔군은  단지  한차례  공세(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감행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였다.  그 러나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반격을  실시하여  효과 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종료되고  제4차  공세가  시작 되기  전까지  유엔군의  반격준비  단계인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의  효과와  그  이후에  실시한  유엔군의  제1차  반격인  서부전선에서의  썬더볼트(Thunderbolt)작 전과  중동부전선에서의  라운드  업(Round  Up)작전의  효과를  밝히는  것이다. 1)  합동참모본부,「한국전사」,  1984,  pp.466～479. 2)  한국전략문제연구소,「중공군의  한국전쟁사  :  항미원조전사」,  새경사,  1991,  pp.41～53.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0&amp;vmode=full">110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12 군사연구 제127집 【표  1】  중공군  공세  현황 구   분 기       간 내                    용 제1차 공  세 1950.  10.  25～11.  4 •운산(1사단),  온정리(6사단)공격,  청천강선  진출 제2차 공  세 1950.  11.  25～12.  4 •덕천～영원선의  국군  제2군단  공격,     덕천～맹산일대  진출 제3차 공  세 1950.  12.  31～1951.  1.  8 •서울  점령,  수원  진출 Ⅱ.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조․중  연합사령관3)  펑떠화이(彭德懷)는  제2차  공세로  인한  손실된  병력과  장비  등을  보충,  정비하고  새로운  증원부대(제19병단)의  도착  등을  고려하여  “1951년  2월～3월경에  38도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은  펑떠화이에게  “중공군이  공격을  하지  않을  경우에  38도선이  고착화된다”는  정치적  문제를  고려하여  지체  없이  38도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 령한  후에  부대를  정비하기로  하고  즉각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중공군 은  12월  31일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여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1. 서부축선의 위기   중공군  제3차  공세시  중공군의  기동계획은  전쟁초기  북한군의  기동계획과  비슷 하였다.  즉  중공군은  주공을  5개  군단(중공군  4개  군단,  북한군  1개  군단)으로  편성하여  서울  북방에서  서울을  목표로  공격하고  2개의  조공을  편성하여  가평 - 서울  동측  방향으로  중공군  2개  군단이  공격하고,  홍천 - 원주  방향으로  북한군  2개  군단이  공격하는  등  총  9개  군단을  투입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31일  17:00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 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국군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국군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중공군  인해전술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1년  1월  1일  오전에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의  방어지역에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중동부전선에  3)  조․중연합사령부는  1950년  12월  중순경  창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1&amp;vmode=full">11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3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3군단도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중공군에게  포위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1월  1일  12:00경  전  부대를  한강 - 양평 - 홍천선으로,  1월  3일  오후에는  한강선에서  평택-안성선으로  철수시켰다.4)  그리고  15:00경에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였다. &lt;그림  1&gt;  중공군  제3차  공세(1950년  12월  30일~1951년  1월  7일)5) 2. 중부축선의 위기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평택-안성까지  후퇴하는  동안에  가평 - 춘천  지역에서는  중공군  2개  군(군단)이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  지역을  돌파하 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은  1월  8일을  전후하여  일제히  멈추었다.6)  한편,  홍천 - 원주  방향에서는  12월  중순에  북한군  2개  군단이  태백산맥을  따라  국군  제8사단과  제3사단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방어중인  국군  부대들을  격파한  후  원주 - 평창과  영월-단양  일대까지  진출하여  제8군의  후방  병참선을  위협하였다. 4)  리지웨이  장군이  한강선에서  결전을  포기한  것은  한강이  결빙되어  장애물로써  가치가  반감 되었기  때문이었다.    5)  육군대학『한국전쟁사(하)』교참  7-0-12.  2004.  p.234. 6)  최용호,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4후퇴,  그리고  원주”,  국방저널  2003년  3월호,  pp.58～62.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2&amp;vmode=full">112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14 군사연구 제127집 당시  미  제10군단은  대구  및  부산  등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제8군사령 관은  1월  3일  제10군단(제2사단․제7사단)에  국군  제3군단(3개  사단)을  배속시켜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2사단이  원주를  방 어하였다.  만약에  원주  전방에  배치된  북한군  2개  군단이  원주의  견부(肩部)를  격 파하고  청주 - 대전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평택 - 안성선에  배치된  유엔군의  주력 은  후방이  차단될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서울을  점령당한  1월  4일  이후부터 는  원주가  제8군의  최대  관심지역으로  부각되었다. 한편  북한군  2개  군단  중  제5군단은  피란민으로  위장했던  부대를  원주  정면에  투입하고  원주  서측  문막에  제12사단을  투입하여  방어중인  미  제2사단의  후방을  위협하였다.  그러자  미  제2사단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1월  7일  밤에  원 주  남쪽  목계  방향으로  철수하였고,  1월  8일  아침에는  항공기의  근접지원과  함께  역습을  감행하여  1월  11일  오후에  원주  남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하였다. 이와  같이  4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결국  미  제2사단은  원주에서  선전하여  중부전선에서의  위기를  수습하고  장차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다.7)  Ⅲ.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후  대체적으로  3단계로  구분하여  작전을  수행 하였다.  즉  중공군의  정체를  파악하는  제1단계  서부전에서  반격하는  제2단계,  중 동부전선에서  반격하는  제3단계이다.  여기서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  후  유엔군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결과  나타난  효과를  각  단계별로  알아보겠다.  1. 제1단계 :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중공군의 정체 확인 유엔군은  중공군  제3차  공세  중인  1월  12일을  전후하여  원주의  위기를  수습하 여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이제는  중공군의  공세시기를  예측하는데  이 목이  집중되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37도선상에서  언제  공격해  올  것인지  초조 해  하였고  부대의  사기는  떨어졌다.  따라서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무작정  중공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은  떨어진  사기를  회복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전선 에서  사라진  중공군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7)  최용호,  상게서,  p.62.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3&amp;vmode=full">11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5 이에  리지웨이  장군은  정찰부대의  규모를  확대하여  증강된  1개  연대  규모  병력 으로  위력수색을  하여  중공군의  배치,  규모,  장차의  기도  등을  파악하기로  하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하였다.  제1군단에서는  예하의  제25사단  제27연대를  위력 수색부대로  선정한  후,  연대에  전차  1개  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배속시키고  작전의  명칭을  제27연대의  부대명칭인  울프하운드(Wolfhound)라고  명명하였다.  제27연대는  1월  15일  아침에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 - 오산을  연결하는  1번  도로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공격하였다.  연대가  오산을  경유하여  16일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한편  군단장은  수원을  공격하는  제27연대의  동측방을  방호하기  위하여  미  제3 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  방향으로  진출시켜  수 원-용인  간의  42번  도로를  차단하였다.  이들  역시  초기에는  적의  저항을  받지  않 고  순조롭게  진출할  수  있었으나  수원에  근접하면서부터  600～800여  명으로  추산 되는  중공군이  강력히  저항하여  공격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군단장은  최초  계획 한  위력수색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1월  16일  14:00경에  공격부대를  철수하였다.8) 이  작전은  전술적,  작전적,  전략적  차원에서  그  효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전술적  차원에서  유엔군은  그  당시  중공군의  방어선이  수원 - 이천을  연하는  선이며,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한  점과  중공군이  가까운  시일에  대규 모의  공세를  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작전적  차원에서  유엔군은  전장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장차작전에  유리 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부대  규모는  소규모  단위인  연대규모의  부대로도  가능 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유엔군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철군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즉,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이  1월  15일  전선을  시찰하였다.  시찰의  목적은  철군과  관련된  미국 의  정책을  전선사령관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린스  대장이  방문한  동일한  날짜에  실시한  울프하운드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월  17일  콜린스  대장은  리지웨이  중장으로부터  “중공군의  주력은  아직까지  한강  이남으로  8)  국방군사연구소(채한국  외  2인),「한국전쟁사(중)」,  국방군사연구소,  1996,  pp.361～26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4&amp;vmode=full">114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16 군사연구 제127집 진출하지  않았다.  중공군의  보급과  사기에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동부지역에서  북한군의  침투공격이  차단되었다”  등의  전선  상황을  보고  받고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에  대해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9)  전쟁이  끝난  후에  콜린스  대장은  저서「평화시의  전쟁(War  in  Peacetime)」에서  “철군문제의  변화를  가져다준  장 본인은  바로  리지웨이  장군  혼자였다”고  하면서  철군문제  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리지웨이  장군의  공로를  치하하였다.10) 결국  울프하운드  작전은  불과  1개  연대의  병력으로  이틀간에  걸쳐  실시된  소규 모의  위력수색이었지만,  이  작전으로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 군의  정체와  취약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포에서  벗어나  새 로운  공세를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며  부대의  사기도  회복할  수  있었다.  2. 제2단계 : 썬더볼트(Thunderbolt)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 반격 유엔군은  울프하운드작전의  성공을  전과  확대하여  한강선까지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한  단계  높은  위력수색을  1월  25일부터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는  오산과  여주를  연하는  서부지역에서  한강 까지  5개  구역으로  나누어  통제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각각  1개  사단을  앞세워  통제선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작전의  명칭은  “울프하 운드작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신속하게  실시한다”는  의미로  썬더볼트(Thunderbolt)작 전,  즉  번개작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작전을  실시하기  전에  리지웨이  장군은  패트리지(E.  E.  Partridge)  제5공군  사령관이  조종하는  훈련기로  정찰을  하였으나  중공군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따라 서  유엔군은  한강선까지  진출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1월  25일  07:30경에  미  제1군단은  제25사단을,  제9군단은  제1기병사단을  선두에  배치하여  오산 - 여주를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적은  오산,  수원,  이천  등에서는  저항했으나  예상보다는  경미하여  유엔군은  계속  진출할  수  있었다.  이에  자신감이  생긴  리지웨이  장군은  1월  31일에  안양-양평을  연하는  선에  도 달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게  “주력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라!”고  9)    콜린스  대장의  방한  중에  이루어진  울프하운드  작전은  “중공군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리지웨이  장군의  확고한  신념이  미국의  철군정책을  해결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10)  일본육전사보급회(이원복  역),「한국전쟁(7권)」,  명성출판사,  1986,  pp.152～16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5&amp;vmode=full">11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7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각  군단에서  1개  사단만을  전방에  운용하는  전투정찰  방 침을  바꿔  1월  31일부터는  각  군단의  주력을  전방에  투입하여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이  공격으로  전환하여  수원 - 신갈을  연하는  선에  진출하자,  앞으로  한강을  향해  계속  진출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수리산과  관악산이었다.  첫째,  수리산  점령을  위하여,  제8군의  서측  공격부대인  미  제25사단은  1월  27일에  수리산  하단의  안산-군포를  연하는  선에  도달하여  1월  31일  아침에  수리산의  서 측  능선을  터키여단이,  동측  능선을  제35연대가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수 리산을  방어하는  중공군은  제150사단  예하의  1개  연대  규모였다.  이들은  수리산  정상인  475고지와  인접의  440고지를  중심으로  엄체호를  구축하였다.  미군은  2월  2일  수리산  정상  475고지를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은  야간에  터키여단이  점령하지  못한  440고지  방향에서  역습을  한  차례  실시한  후  공격을  멈추고  도주하였다. 둘째,  관악산  점령을  위하여,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2월  9일  과천방향에서  관악산을  공격하자,  중공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였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10:00경에  관악산을  점령하고  2월  10일에  영등포 - 노량진  선으로  진출하여  가장  먼저  한강선에  도착한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후  1개월  만에  다시  한강  남쪽에서  서울을  바라볼  수  있었다. &lt;그림  2&gt;  국군과  유엔군의  썬더볼트작전(1951년  1월  31일~2월  10일)11) 11)  육군대학「한국전쟁사(하)」,  교참  7-0-12  p.26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6&amp;vmode=full">116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18 군사연구 제127집 한편  서측의  미  제25사단은  도로에  매설된  대전차  지뢰를  제거하면서  영등포와  인천으로  진출한  후에  김포비행장과  김포반도로  진출하였다.  이때  이  지역을  방어  중이던  북한군  제1군단은  저항을  포기한  채  결빙된  한강을  도하하여  퇴각하였다. 썬더볼트작전은  전술적,  작전적,  전략적  차원에서  효과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술적인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반격준비에서  반격으로  과감히  전환 하여  적  부대를  격멸한  것이다.  이  작전은  유엔군의  마지막  공세였던  11월  24일 의  크리스마스  공세  이후에  2개월만의  공격작전으로서  리지웨이  장군은  “나는  부 동산(지형  탈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적  병력을  죽이는  것(적  부대  격멸)이  목적이다”고  강조하여  부대격멸에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이제까 지의  공격방식이었던  ‘도로를  따라  전진하는  방식의  작전’을  탈피하고  전선을  완 전하게  연결하여  협조된  상태에서  전진하도록  하였다.  또한  선정된  5개의  통제선 에서  적을  우회함이  없이  완전히  섬멸하였다. 둘째,  작전술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서부전선에서의  한강도하를  위한  교 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차후  작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이  작전  결과  유엔군은  한강도하의  교두보를  확보했으므로  이제는  서울을  언제  탈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군의  전력이  중공군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서울을  점령하는  것은  군사 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미약한  전투력을  강북에  배치할  경우에  배후의  한강이  ‘배수지진(背水之陣)의  형태’가  되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서 울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부지역의  전선을  양평-홍천을  연하는  선까지  북 상시키고  이어서  남양주 - 가평선을  점령함으로써  서울의  동측방을  포위한  후에  한강을  도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전선은  서부지역에서  중부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한강변의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선에  정지하여  전력을  정비하면서  서울  탈환을  서두르지  않기로  하였다.12)  셋째,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중공군이  장차  부대정비  및  재편성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심리적  여유를  박탈하여  다음  공세  준비를  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중공군의  지휘부는  유엔군이  썬더볼트작전을  시작한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평 안남도  성천군  군자리에서  개최한  중국과  조선  양국  군  고위간부회의에서  차후작 전  방향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유엔군의  공세는  2월에  가능할  것으로  판단 12)  국방군사연구소(채한국  외  2인),  앞의  책,  pp.376～387.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7&amp;vmode=full">11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9 하여  그동안  부대정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국 군과  유엔군이  1월  25일부터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자,  중공군의  지 휘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에  중공군은  황급히  전략을  수정하여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하면서  서울  방어를  위해  한강선에서  강력히  방어한다”는  견수방어(堅守防 禦)  방침을  수립하였다.  또한  중동부에서는  “유엔군  1～2개  사단을  유인하여  섬 멸한다”는  유인격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서부지역에  중공군  2개  군(군 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하고,  중동부  지역에  중공군  4개  군(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하며,  예비  병력으로  원산의  제9병단  예하  제26군(군단)을  조기에  이동하여  철원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철저히  전투준비를  하지  못한  중공군은  유 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다. 3. 제3단계 : 라운드 업(Round Up)작전으로 중동부전선에서 반격  1951년  1월  말에  서부지역에서  한강을  향하여  공격하는  썬더볼트작전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전선이  북쪽으로  추진됨에  따라  중동부지역도  서부지역과  전 선을  유지하기  위해  전선을  북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때  리지웨이  장군은  보급 이  취약한  중공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어  반격하기로  결심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서부전선은  한강이  가로막고  있어  피아  공격이  어려운  반면,  중동부지역에서는  전선을  북상시켜  홍천  일대에서  중공군의  주력을  섬멸하여  서 울을  동쪽  원거리에서  포위한다면  서울  탈환에  보다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 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리지웨이  장군은  중부지역의  미  제10군단으로  하여 금  적극적인  공세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조․중  연합군사령관  펑떠화이는  1951년  1월  말경  서부지역에서의  유엔군  반격을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하고  주력을  중부전선에  집결시켜  홍천  및  횡성  일대에서  유엔군  1～2개  사단을  격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홍천  포위를  계획하고  있는  유엔군과  횡성  진출을  기도하고  있는  공산군은  중부전선에서  일전 이  불가피하였다.  미  제10군단은  당시  여주-평창을  연하는  선에서  제8군의  공격  명령을  접수하자,  서부지역에서의  반격작전  방식을  적용하여  위력수색을  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8&amp;vmode=full">118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20 군사연구 제127집 1월  31일에  미  제2사단  제23연대  전투단은  문막 - 지평리  방향으로,  기갑부대는  원주 - 횡성  방향으로  북진하여  기갑부대는  2월  2일  횡성에  도달했으며,  제23연대  전투단은  2월  3일에  지평리를  점령하였다.  그  과정에서  양  부대는  4일  동안  적의  경미한  저항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기갑부대가  횡성에서  홍천을  향해  북상하자,  적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의  복안에  따라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공산군의  전략  및  전술상의  요충지인  홍천을  포위하여  적의  증원  거점을  분쇄하고  아군의  전선을  홍천 - 대관령 - 강릉선으로  북상시켜  차기공격의  유리한  발판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3군단과  협조된  공격을  계획하였다.  작전의  명칭은  “적의  주력을  몰아서  섬멸한다”는  의미의  라운드  업(Round  Up)작전으로  명명하 였다.  군단장은  국군  제8사단을  서측에서  주공으로,  국군  제5사단을  동측에서  조공으 로  한  2개  사단  병진(竝進)으로  홍천을  포위  공격케  했으며,  예비인  미  제2사단과  제7사단은  지평리 - 횡성 - 원주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공격중인  국군  2개  사단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8사단과  제5사단의  홍천  포위공격은  2월  5일  08:00에  시작되었다.  제8사 단은  횡성-홍천을  연결하는  5번  국도와  횡성 - 용두리 - 홍천을  연결하는  6번  및  44번  국도를  따라  공격하였다.  최초에는  적의  저항이  미약하였으나  5번  국도의  삼마치  고개에서  중공군  제198사단이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 졌다.  이에  국군  제8사단은  삼마치  고개를  돌파하기  위해  항공지원하에  보병,  전 차,  포병의  협조된  공격을  2월  10일까지  계속했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국군  제8사단의  동측에서  공격하는  제5사단도  공격초기부터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공격이  저지됨으로써  홍천  포위작전은  2월  10일까지도  진척이  없었다.  이  무렵  미  제10군단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홍천  남쪽 에서  적의  저항이  치열해지자,  현  병력으로는  삼마치  고개를  돌파하는  것이  어렵 다고  판단하고  국군  제3군단의  제3사단을  지원받아  주공인  국군  제8사단  지역에  투 입하였다.  그러나  삼마치  고개의  중공군은  국군  제3사단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계 속  저항하면서  2월  11일  제4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던  국군  제3군단은  적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평창  북방의  창동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2월  7일에  대관령-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함으로써  동해안의  요충지를  탈환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19&amp;vmode=full">11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21 이로써  국군은  전술적  요충지인  동해안의  항구와  비행장을  확보하고  동해안  도로 의  요지인  대관령과  횡계를  확보하였다.  반면에  북한군은  평창 - 영월 - 안동까지  침투해  있는  북한군  제2군단과의  연결이  차단됨으로써  후방지역에서의  활동도  어 려웠다.  결국  유엔군의  라운드  업작전으로  중공군과  북한군은  중동부전선에서  위 기를  맞았다.13) &lt;그림  3&gt;  국군과  유엔군의  라운드  업작전(1951년  2월  2일~2월  5일)14) 라운드업작전은  전술적,  작전적,  전략적  차원에서  효과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 다.  첫째,  전술적인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홍천을  포위하여  적의  증원부대를  차단한  것이다.  둘째,  작전술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홍천을  점령함으로써  중 부지역에서  서울을  포위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셋째,  전략적인  13)  최용호․최용성,「6․25전쟁의  이해」,  양서각,  2008,  p.334. 14)  육군대학「한국전쟁사(하)」,  교참  7-0-12  p.266.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0&amp;vmode=full">120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22 군사연구 제127집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다음에  있을  중공군의  공세를  전략적으로  위축시킨  것이다.  그  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즉  중공군은  제4차  공세에서  횡성일대의  국군  제8사단을  격멸한  후  원주방향으로  계속  공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공세방향을  측방  지평리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것은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으며,  중공군이  지평리를  방어하고  있던  미  제23연대를  공격하였으나  병력을  통합적으로  운용하지  못하여  패배하였다.  Ⅳ. 맺  음  말 유엔군은  10월  초에  북진하여  10월  20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운산,  온정리를  거 쳐  일부부대가  압록강변에  있는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부터  시 작한  중공군의  제1,  2,  3차  공세를  맞아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수원까지  밀리면서  효과적인  공격을  한번도  못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끝난  후  유엔 군은  예전의  유엔군이  아니었다.  즉,  유엔군의  효과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한  것이  아래【표  2】에  제시되어  있다. 【표  2】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후  유엔군의  반격  효과 구    분 기  간 성격 작전부대 내    용 효    과 반격 준비 울프하운드 1.15～ 1.  6 위력 수색 •미  제25사단        제27연대 •안성～용인  진출 •중공군  규모,  방어선  등  확인 •장차  유리한  상황조성 •미군의  철군문제  해결 반격 (서부) 썬더볼트 1.25～ 1.31 위력 수색 •미  제25사단 •오산～여수선에서        안양～양평선  진출 •반격작전으로  전환  적부대  격멸 •한강도하  교두보  확보 •중공군  전략수정  계기  마련 1.31～ 2.10 공격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 •수리산,  관악산  점령,     노량진～영등포선     진출 반격 (중동부) 라운드업 1.31 위력 수색 •미  제2사단          제23연대,     기갑부대 •문막～지평리에서      원주～횡성  진출 •홍천포위로  증원부대  차단  •서울을  포위공격  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조성 •중공군의  차후공세          위축효과  달성 2.  2～ 2.  5 공격 •국군  제5사단 •국군  제8사단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 •횡성,  지평리  점령,  홍천  포위공격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1&amp;vmode=full">12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23 실제적으로  유엔군의  제1차  반격은  서부지역에서의  썬더볼트  작전과  중동부지역 에서의  라운드업작전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반격작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울프하운드  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반격작전에서도  위력수색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반격작전은  리지웨이  장군이  지금까지  중공군이  실시한  제1,  2,  3차  공 세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중공군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이  1950년  12월  31일  실시한  제3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밀어낸  후  약  20일  멈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리지 웨이  장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후의  제1,  2,  3차  공세를  분석하였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는  10월  25일에  시작되어  11월  1일  청천강으로  철수한  유 엔군의  추격을  중단함으로써  종료되었고,  이때의  공세기간은  8일이었다.  제2차  공 세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직후인  11월  25일  야간에  시작되어  12월  2일  중 공군이  추격을  중단할  때까지로서  공세기간은  8일간이었다.  이어서  제3차  공세는  12월  31일  시작되어  1월  7일  중공군이  진격을  중단할  때까지  역시  8일간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중공군은  8일  동안  아군의  전선을  돌파  후  계속  밀어붙여  전과를  확 대해야  할  결정적인  시기에  공세를  멈추었다.  그리고  일정기간  쉬었다가  다음  공 세를  하였다.  즉  리지웨이  장군은  “8일”이라는  의미와  한차례의  공세가  끝나고  다음의  공세는  대략  1개월  정도의  기간을  두고  반복되는  이유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보급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중공군의  보급능력은  유엔  공군의  후방폭격으로  심각하여  전투병이  휴 대할  수  있는  식량,  탄약  등의  보급품은  1주일분을  초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 공군의  기동부대들은  최초에  지급된  보급물자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으며,  전투  중  재보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기동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중공군의  약점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와  공세  사이에  대대적으로  반 격을  실시한다면,  중공군에게  차기  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심리적  여유를  박탈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가  썬더볼트작전과  라운드업  작전이  시작되는  1월  31일이었다.  이때부터  리지웨이  장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제 8군  예하의  전  부대에  적극적인  공세를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37도선 에서  중공군을  밀고  올라가  한강을  도하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중동부지역에서의  서울을  포위하여  탈환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 었다.  그리고  리지웨이  장군의  자신감은  중공군의  차후  공세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2&amp;vmode=full">122page</a><br><br> ..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24 군사연구 제127집 1.  국방군사연구소(채한국  외  2인),『한국전쟁사(중) ,  국방군사연구소,  1996 2.  육군대학,『한국전쟁사(하) ,  교참  7-0-12,  2004 3.  일본육전사보급회(이원복  역),『한국전쟁(7권) ,  명성출판사,  1986 4.  최용호․최용성,『6․25전쟁의  이해 ,  양서각,  2008 5.  최용호,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4후퇴,  그리고  원주”,  국방저널  2003년  3월호 6.  한국전략문제연구소,『중공군의  한국전쟁사  :  항미원조전사 ,  새경사,  1991 7.  합동참모본부,『한국전사 ,  1984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3&amp;vmode=full">123page</a><br><br> .. 5급    계 운 봉 합참 군사기획부 계엄과  Ⅰ.  서        론 Ⅱ.  베트남  게릴라전의  특성     1.  베트남전쟁과  제4세대전쟁     2.  전략으로서의  게릴라전     3.  베트남  게릴라전의  특성 Ⅲ.  디엔비엔푸  전투와  케산  전투     1.  디엔비엔푸  전투     2.  케산  전투 Ⅳ.  결        론 &lt;필자 약력&gt; 국방대 정보관리학과(정보관리학 석사),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외교정치학  석사),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재 &lt;저서&gt; 고엽제 역학조사의 문제점과 피해인정방안 군사연구 제127집  125 전쟁사   4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전 특성 연구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전 특성 연구 -  디엔비엔푸  전투와  케산  전투를  중심으로  -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4&amp;vmode=full">124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26 군사연구 제127집 Ⅰ. 서      론 작은  체구의  다윗은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은  골리앗과  같은  프랑스와  미국을  돌팔매와  같이  빈약한  군사력으로  쓰러 뜨렸다.  골리앗은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다.  창과  칼을  가지고  싸우는  싸움에서는  그를  대적할  상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가장  약한  무기에  의해  쓰러졌다. 베트남전쟁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비슷한  점이  많다.  베트남에  비해  군사 력이나  경제력에서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은  베 트남에  패하고  말았다.  그  패배의  원인은  새로운  전쟁방식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쟁방식이란  창과  칼의  싸움에서  돌팔매가  등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기였지만  칼과  창에  비하면  너무나  약한  무기였기  때문에  싸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골리앗과  같이  강한  상 대에게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돌팔매는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지만  원거리에서  적의  급소를  강타함으로써  싸움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돌팔매는  무기라기보다는  변화를  의미한다.  골리앗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프랑스와  미국은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의  게릴라전을  통상  알고  있었던  수준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Thomas  X.  Hammes가  주장하듯이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전은  새로운  전쟁방식인  제4세대전쟁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골리앗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베트남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미군은  비슷한  형태의  전투를  경험한다.  프랑스군 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13년  후  미군은  케산(Khe  Sanh)에서  호치민 군의  공세적인  포위  공격과  맞서게  된다.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였 지만  미군은  베트남의  케산  포위공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두개의  전투  결과는  다르지만  그  후  두  나라가  베트남에서  철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것은  그 들이  베트남전쟁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 행하게도  전쟁에서  패한  후에야  그  원인을  찾게  된다.  그  원인을  현재  군사학자 들은  제4세대전쟁이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5&amp;vmode=full">12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27 본  논고는  제4세대전쟁의  기원이  되는  마우쩌둥(毛澤東)의  인민전쟁(Peoples’s  War)에서  체계화되어  베트남전쟁에서  변형된  베트남  게릴라전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  특성이  베트남전쟁  중  디엔비엔푸  전투와  케산  전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제4세대전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찰해  보겠다. Ⅱ. 베트남 게릴라전의 특성 1. 베트남전쟁과 제4세대전쟁 가. 베트남전쟁     베트남은  BC  690년경  반랑(Van  Lang)이라는  최초국가를  건국한  후  약  1,000 년간  중국의  지배와  100년간  프랑스의  식민  지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5년 간  일본의  지배를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베트남전쟁은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프랑스의  재식민지  정책으로 부터  독립하기  위해  전쟁한  독립전쟁(1946∼1954년)과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이  남베트남1)을  지원해  북베트남군과  전쟁한  이념전쟁(1955∼1973년),  그리고  미군  주도의  연합군  철수한  이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전쟁한  통일전쟁 으로  구분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프랑스는  일본이  베트남을  지배하 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이런  프랑스에  대해  베트남이  독립하려는  성격의  전쟁을  1차  베트남전쟁이라고  말한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프랑스군이  북베트남  디엔비엔푸(Dien  Bien  Phu2))지역  전투에서  호치민군에게  패하고  제네 바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종료하였다.  2차  베트남전쟁은  프랑스군이  베트남 에서  철수한  후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도미노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1964년  미군이  직접  전투에  참가한  전쟁이다.  미군은  참전  후  1968년  북베트남의  1) 본  논문에서는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  :  월남)을  남베트남으로,  베트남민 주공화국(the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  월맹)을  북베트남으로  표기한다. 2) 디엔비엔푸는  하노이  서쪽  라오스  국경에  위치한  조그만  촌락이지만  베트남  서북부와  라 오스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프랑스군은  베트남으로  병력  증원이  안  되는  상황에서  주요  시설  및  지역  경계로  분산된  프랑스군을  디엔비엔푸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시켰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6&amp;vmode=full">126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28 군사연구 제127집 공세적  공격인  케산  전투와  ‘뗏(Tet)공세3)’로  악화된  미  본토의  반전확산으로  1973년  철군하였다.  3차  베트남전쟁은  미군이  철수한  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을  위해  전쟁한  것으로  1976년  북베트남이  승리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끝이  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호치민은  바오다이  베트남  황제를  퇴위  시키고4)  1945년  9월에  베트남민주공화국(the  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 수립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1945년  포츠담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에  의해  베트남은  북위  16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영국이  신탁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통치하기  위해  중국과  영국에  대해  자신들의  이권5)을  양보하는  등  계속된  노력으로  마침내  중국군과  영국군이  1946년  2월과  3월에  각각  베트남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재지배가  실시되었다.6)  중국과  영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프랑스와  호치민  정부는  협상을  실시하였지만  실패하게  되자  1946년  11월부터  1차  베트남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3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전한  프랑스와  호치민  정부가  1954년  제네바에 서  합의한  협정  내용은  베트남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호치민  정부가  통 치하고,  남쪽은  바오다이  정부  체제를  유지하다  2년  후인  1956월  7월경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의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던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호치민은  하노이로  이동하여  북부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은  국민투표를  통해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 지엠(Ngo  Dinh  Diem)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을  출범시켰다. 1956년이  되자  호치민  정부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총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하였 지만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  전체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선거가  치러질  경우  압승 3) 뗏은  음력으로  1월  1일을  말하는  베트남  최대의  명절이다.  뗏을  전후해서  1주일  정도  민 족행사를  즐기는  관습에  따라  베트남전쟁  동안에도  이  기간에는  1주일  정도의  휴전협정이  항상  체결되었다.  하지만  1968년에는  북베트남이  기습적으로  남베트남의  주요도시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실시한  것으로  베트남  구정공세라고도  한다. 4)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를  베트남에서는  8월  혁명이라고  한다. 5)  중국에는  프랑스가  소유한  쿤밍의  철도운영권을  양보하였고,  영국은  당시  홍콩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지지하고  있었다. 6) 최용호,「한권으로  읽는  베트남전쟁」,  (서울  :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39∼4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7&amp;vmode=full">12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29 할  것이  확실했던  응오딘  지엠  정부는  총선거  제안을  거절하였다.7)  제안에  대한  거절  사유는  제네바  협정에  응오딘  지엠  정부가  조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57년  소수의  특수부대를  파병시킨  후  1962년  2월  베트남  군사원 조사령부를  베트남에  설치하였다.  그  후  남베트남  정부에  대해서  미국의  지원이  점차  증가되어  북베트남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962년  8월  미국은  통킹만8)  공해상에  정박한  미군  함정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한  후  북베트남  항구시설을  포격하고  1965년  3월  해병대대를  선두로  미  지상 군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파병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1968년  북베트남의  뗏공세로  인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공세는  북베트남군과  민족해방전선(NLF  :  Nation  Liberation  Front)9)의  많은  희생을  가져와  북베트남이  패한  전투이지만  많은  미군들이  희생 됨으로  미국  내의  언론을  악화시켰다.  이런  언론의  악화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73년  1월  27일  유엔  사무총장이  참석 한  가운데  조인된  평화협정으로  모든  남베트남을  지원한  연합국  부대가  철수하였 다.  연합국이  철수한  후  1974년  12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푸옥롱  지역을  점령 하였다.  이때  미국이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1975년  3월  남베트남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즈엉반민(Duong  Van  Minh)  대통령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베트남전쟁은  끝이  났고,  베트남은  베트남사 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으로  통일되었다.  나. 제4세대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탄생된  근대의  민족국가들 에  의해  시작된  근대전쟁의  양상은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진화되었다.  7) 당시  미  정보조사기관의  총선  예측에  의하면  호치민에  대한  지지율은  80%가  넘었다. 8) 일명  ‘통킹만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건으로  베트남  북부와  중국령  하이난섬  사이에  위치한  바다인  동킹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의  함정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 기  전까지  미국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행동을  위한  의회의  동의를  얻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통킹만  결의안’을  의회로부터  얻어냈다. 9) 응오딘  지엠  정부는  족벌정치,  부정부패  및  급하게  추진된  토지개혁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남베트남  지역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베트콩(Viet  Cong)과  민족해방전선 (NLF  :  Nation  Liberation  Front)이  결성되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8&amp;vmode=full">128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30 군사연구 제127집 17세기  근대민족국가들은  발사속도가  느리고,  점화가  불안정적인  화기(fireams) 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밀집대형을  형성한  형태로  전쟁을  수행했다.10)  이런  형태 의  전쟁에서  공격의  목표는  전투원이었다.  이와  같은  전쟁을  제1세대전쟁이라고  부른다. 제2세대전쟁은  공격목표가  전투원에서  적의  지휘통제시설의  파괴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전투는  화력전이  주가  되었다.  이것은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무 기와  탄약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나타났다.  기관총,  화포,  철조망  등의  대량 보급은  공격보다  방어가  우위를  점하는  환경으로  변화시켜  공격의  목표가  바뀐  것이다.  이때의  전술은  사격과  이동을  기반으로  한  선형적인  것으로  조준사격이  그  특징으로  나타났다.11)  이와  같은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인  양상이다.  제3세대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에  의해  나타났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은  연합국의  수적ㆍ물적  우월성과  대규모적인  군대를  선형적으로  포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발상이  필요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나 타난  것은  전장에서  화력에  의한  피해와  장기적인  소모전을  회피할  수  있는  비선 형  전술인  기동전이었다.  기동전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격전(Blitzkrieg)은  속도 와  기습을  통해  적의  후방으로  깊숙이  기동하여  심리적  마비를  달성하는  것이  공 격목표였다.12)  제1세대에서  제2세대전쟁으로의  변화는  기술의  발전이  주도했지만  제3세대  전쟁은  아이디어(Idea)가  전쟁의  양상을  바꿔  놓은  것이다.13)  제4세대전쟁이란  용어는  1989년  William  S.  Lind  등  5명의  저자가『Military  Review』에  게재한  한  논문에서  사용한  후  미국의  9․11테러로  관심의  대상이  되 었다.  미국은  9·11테러를  단순한  테러리즘  행위가  아닌  새로운  전쟁으로  파악하 면서  21세기  새로운  전쟁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4세대전쟁과  비대칭  전쟁,  그리 고  네트전(Netwar)  등으로  규정했다.14)  토마스  햄머는  제4세대전쟁의  기원을  10)  이수형,  9·11  뉴욕  테러와  21세기  신전쟁,『전사』제4호(서울  :  군사편찬연구소,  2002),  p.345. 11) William  S.  Lind(et.  als),  The  Changing  Face  of  War  :  Into  the  Fourth  Generation,  (Military  Review,  1989).  pp.3∼4. 12)  Max  Boot,  “War  Made  Ne”,  송대범․한태영  역,『Made  in  War  :  전쟁이  만든  신세계』,  (서울  :  플래닛  미디어,  2007),  p.432. 13) Karl-Heinz  Frieser,  “Blitzreig-Legende,  Der  Westfedzug”(1940),  진중근  역,『전격전의  전설』(서울  :  일조각,  2007),  pp.547∼548. 14)  이수형(2002),  p.341./햄머는  네트전을  제4세대전쟁의  한  형태로  파악한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29&amp;vmode=full">12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31 중국  마오쩌둥의  유격전(游擊戰)  사상에서  찾고  있다.15)  그  이유는  제4세대전쟁  특성인  공격목표를  적의  정치적  의지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상대방의  정책결정자들에게  그들의  전략적  목적이  달성될  수  없거나  또는  예상되는  이익에  비해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가용한  모 든  네트워크(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를  사용하는  전쟁이다.  이것은  정치적  의 지의  우세가  적절히  사용된다면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교훈에  기초한다.16) 베트남의  호치민은  마우쩌둥의  유격전을  기초로  한  인민전쟁을  베트남에  적합 한  베트남인민전쟁으로  변형하여  프랑스군과  미군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 다.  이런  승리는  게릴라전을  적의  정치적  의지에  타격을  주는  전략적  차원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2. 전략으로서의 게릴라전 게릴라전(Guerrilla17)  Warfare)은  1808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그  용어가  등장한  후  다양한  형태와  유사한  용어로  전투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릴라전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인류역사에서  전쟁이  발생된  때부 터  존재했다.18) 나폴레옹  전쟁  때의  게릴라전은  외침에  대하여  생존보존을  위해  조직이  미흡한  상태에서  자연발생적  투쟁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세계대전을  통해서  게릴라전은  연합국  정규군의  지원  아래  보조  작전이나  협동작전  형태로  변화되었다.  제2차  대전  이후  게릴라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Ideology)와  결부되어  혁명전쟁의  주 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19) 15) 제4세대전쟁에  대해서는  Thomas  X.  Hammes,  “The  Sling  and  the  Stone  :  On  War  in  the  21st  Century”,  최종철  역,『21세기  제4세대  전쟁』(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2008)을  참조하라. 16)  최종철  역(2008),  p.4. 17) guerrilla는  전쟁이라는  뜻의  ‘Guerr’와  작은이라는  뜻의  ‘llla’라가  합성된  서반아어로  1808 년  나폴레옹군에  대항한  스페인의  저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따라서  게릴라는  소규모  전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게릴라는  게릴라전에서  싸우는  사람으로  사 용하고  있다.    18) 일반적으로  게릴라전은  전투(warfare)의  한  형태로  본다.  관련  내용은  Samul  B.  Griffith,  “Mao  Tae-Tung  :  On  Guerrilla  Warfare”를  참조하라. 19) 최용성,  “게릴라전  양상의  변화과정  고찰”,『전사』제6호,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14～17.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0&amp;vmode=full">130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32 군사연구 제127집 베트남전쟁도  혁명전쟁의  전략으로  게릴라전을  사용했다.  베트남의  게릴라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기초가  된  마우쩌둥의  유격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 하다.  유격전은  중국  공산혁명의  계급투쟁  수단으로  전개한  게릴라전을  말한다. 그동안  게릴라전은  전술적인  개념이었지만  마오쩌둥은  “무기나  장비에  있어서  열 세한  나라가  강대한  침략국에  대항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함으로써  게 릴라전의  의미를  전략적  차원으로  설명했다.20)  즉  유격전은  그동안  게릴라전이  정규작전에  대한  보조적인  작전형태의  전술적  개념으로  사용되던  것을  대중  동원 을  통한  세력  확대와  기존정권의  힘을  소모시켜  궁극적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정치적  활동에  군사적  활동을  보완한  전략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은  러시아의  10월  혁명  때와는  다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 업노동자들이  충분한  혁명세력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억의  농민은  적절히  조 직화된다면  강한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은  농민의  힘에  기초해야  된다고  했다.  중국은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노선을  추구한  혁명 세력과  마오쩌둥이  선도한  농민중심의  혁명운동이  있었다.  전통주의자들은  도시 에서  봉기하고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패했다.  하지만  마우 쩌둥은  전통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목표도시를  점령하기보다는  포위하는  전략을  선 택했다.  또한  도시와  산업  노동자에  의한  급격한  혁명을  표방한  러시아의  이론을  버리고  농민에  의한  지구전(protracted  war)을  전략으로  채택했다.21) 마오쩌둥의  새로운  원칙으로  공산당이  재조직되자  장개석은  가장  위험한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공격을  확대했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남부  지 역의  본거지를  버리고  연안(Yenan)으로  대장정했다.  이때  연안에서  마오쩌둥은  유명한  “유격전”을  집필하게  된다.  그는  “군대와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문 제는  전쟁을  승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치적  동원은  전쟁을  승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라고  말했다.22)  이와  같이  유격전의  정치적  본질을  확고하게  정립한  후  수행을  위한  유명한  3단계  과정을  제시했다. 20) 최용성(2004),  p.4. 21) Asprey  R.,  “War  in  the  Shadow  :  The  Guerilla  in  History.  2  vol”,  Doubleday,  Garden  City,  NJ,  1975,  p.349  및  마오쩌둥의  On  Protracted  war(People's  Publishing  House,  Peking,  1954)  참조하라. 22) 최종철  역(2008),  p.66.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1&amp;vmode=full">13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33 3단계의  과정을  요약하면,  1단계는  대중의  지지를  결속시키기  위해  선전을  강 화하여  정치적  힘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는  단계이고,  2단계는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의  근거지  통제를  공고히  하면서  접적지역의  일부를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3단계는  정규군을  투입하여  정부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단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혁명자들  간의  “세력균형”을  변화시켜  세력의  균형이  그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야만  한다. 마오쩌둥의  인민전쟁(People's  War)은  중국혁명이  직면한  문제점들에  대하여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진화되었다.  대중  속에  굳건한  정치적  기반을  확립 하고  그  정치적  기반을  이용하여  적의  우세한  군사력을  천천히  약화시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정치적  상황을  중국의  국경을  넘어서까지  생각했다.  그는  선 전을  통해서  적의  국민과  동맹국  그리고  후원자들의  정치적  의지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혁명자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여론을  동원하여  적의  주요  동맹국들로  하여금  지원을  철회하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마오쩌둥이  전략적으로  인민전쟁에서  사용한  장기간의  유격전과  선전  강화  등의  개념은  호치민이  프랑스군과  미국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그대로  적용했다.  3. 베트남 게릴라전의 특성 30년  동안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한  베트남전쟁은  중국과  러시아의  혁명전쟁과 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의  혁명방법은  사회주의혁명의  틀  속에서  진행된  프롤 레타리아  계급투쟁이었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즉,  공 장노동자들을  주력군으로  삼아  정치투쟁과  무장봉기를  일으킨  후  도시에서의  총 궐기로  정권을  획득한  다음  농촌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이  아니었다.  또  중국처럼  농민을  주력군으로  삼아  농촌에서  장기무장투쟁  후에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도록  하는  방식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혁명방법은  공장노동자와  농민의  두  계급  모두를  주력군으로  결집시키고  정치투쟁과  무력투쟁을  결합하여  군중의  정치투쟁 으로  한  것이었다.24)  23)  최종철  역(2008),  p.67. 24) 서상문  편저,  “베트남  인민전쟁의  종합적  전략의  창조적  발전”,『동아시아  전쟁사  최근연구  논문선집』,  (군사편찬연구소,  2007)  pp.500～501.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2&amp;vmode=full">132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34 군사연구 제127집 디엔비엔푸  전투가  있기  3년  전  호치민은  베트남노동당  2차  전국  인민대회  연 설에서  지금까지의  베트남독립연맹(Viet  Minh  :  베트민)  혁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  당과  정부는  저항전쟁(Resistance War)에  3단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첫  단계에서...우리는  우리의  주력  군사력을  유지하고  증강하는  데에  매진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적들과 적극적으로 싸웠고 총반격을 준비했다. 세 번째  단계는  총반격이었다.25) 이와  같이  호치민은  마오쩌둥의  인민전쟁  수행  3단계를  적용하고  있다.  또한  호치민은  1948년  8월  적에  대한  선전운동  회의에  보내는  편지에서  선전공작에  관 한  지시를  위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적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공격하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다. 공격하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은  적에  대한  선전운동에  의한  것이다.26) 또한  호치민은  장기전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전은 장기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좁고, 인구는 적고, 국가는 빈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게  싸울  준비를  해야만  하고  전  인민들의  전 면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27)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호치민은  마우쩌둥의  인민전쟁  3단계  수행방법과  선 전의  강화,  장기전  등  대부분의  전술과  전략을  적용하고자  했다.  호치민의  인민전 쟁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농민과  노동자의  구분  없이  대중  전체를  통해서  혁명을  수행했다는  것이  중국의  인민전쟁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우쩌둥이  러시아와는  다른  환경인  중국에서  혁명운동을  하기  위해  적합한  방법을  찾아낸  것과  같이  베트남의  환경에  적합한  방법을  호치민은  찾은  것이다.  마우쩌 둥이  그랬듯이  호치민도  게릴라전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였다.  호치민은  1946년  25) 최종철  역(2008),  p.74. 26) Ho  Chi  Minh,  “Thu  gui  hoi  nghi  dich  van  thang  8～1948”  in  chi  thi  can  ban  ve  cong  tac  dich  van,  Phong  dich  van  Cuc  Chinh  tri,  1948. 27) Ho  Chi  Minh,  Ho  Chi  Minh  Toan  tap,  t.6.,  Nxb.  Chinh  tri  quoc  gia,  p.485.  [호치민  전집  제4권]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3&amp;vmode=full">13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35 정규군  6만여  명과  준군사부대  10만여  명이  있었지만  장비와  훈련이  미흡한  정규군 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결전을  위해  산악지대에서  훈련시켰다.  그리고  준군사 부대를  활용해  사회혼란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이  다가오 자  디엔비엔푸에서의  결전을  감행했다.  디엔비엔푸의  전투는  프랑스군이  유도한  작전이었지만  그  전투는  인민전쟁의  3단계를  위한  결전(決戰)이  되었다. Ⅲ. 디엔비엔푸 전투와 케산 전투 1. 디엔비엔푸 전투 호치민군과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군은  우수한  장비와  조직으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호치민군은  프랑스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대로  대피하 였다.  은거한  호치민은  전쟁의  장기화를  위해  산악지대  거점에  각종  공장을  세우 고  군수품과  생필품을  생산했다.  프랑스군은  1947년  10월  기계화  부대를  북부산 악지대에  투입시켜  은거하고  있는  호치민군의  거점을  소탕하는  ‘레아(Lea)’작전을  감행했다.  산악지역은  깊게  진입할수록  기계화  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도로는  제 한되었고  게릴라에  의해  피해를  입기  쉬웠다.  결국  산악지역에  투입된  프랑스군 은  적을  찾지  못하고  보급로의  차단과  게릴라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었다. 산악지역에서  어느  정도  군사력을  회복한  호치민군은  1950년  800여명의  프랑스 군이  주둔한  북동쪽  중국  국경  근처의  동케(Dong  Khe)에  대한  주간공격을  감행 해  3일  만에  점령하였다.  그  후  동케  북쪽에  고립된  까오방의  프랑스군까지  공격 하여  장악함으로써  베트남  북쪽의  산악지대는  호치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처럼  산악전투에서  계속  승리한  호치민군은  자신감이  생겨  계속해서  빈엔(Vinh  Yen),  마오케(Mao  Khe),  닌빈(ninh  Bin)  지역을  공격하였지만  대패하였다.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1953년  5월,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이  프랑스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나바르  장군은  1953년  10월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남부지역의  푸노꽌(Phu  Nho  Quan)이라는  공산 주의자들의  본거지를  장악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베트민이  푸노꽌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얻은  것이  없게  되었다.  이처럼  베트남인민군을  제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좌절한  나바르  장군은  호치민군을  유인할  수  있는  지역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4&amp;vmode=full">134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36 군사연구 제127집 에서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그  지역은  디엔비엔푸로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예속시킬  때의  마지막  지역이기도  했다. &lt;그림  1&gt;  베트남  북부지역 그  지역은  라오스로  통하는  주  통로이자,  중국과  연결된  주보급로이기  때문에  나바르  장군은  이곳을  장악하면  적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적이  공격해  오면  월등한  군사력으로  산악지역의  베트남군을  분리시킨  후  각개격파한 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그는  1953년  11월  증강된  1개  연대를  공수해  진지를  점령한  후  2개  사단  규모로  보강했다.  이와  같은  프랑스군의  전략은  “자 신들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는  게릴라전을  회피하고  정규전으로  유도해  적을  격멸한다.”는  생각이었다.28)  하지만  정보망을  통해서  베트민의  상황을  접하게  된  나바르  장군은  디엔비엔푸를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분지의  중심에  참호를  파고  자리를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철군을  단행한다면  모든  병사와  군수 품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3개  사단으로  증강하였다.29)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를  계속  확보하게  된다면  첫째,  베트남군의  근거지인  북부  산악지대와  홍하  삼각주지역이  분리되며,  둘째,  북부  라오스  지역에  대한  베트남 28)  최용호,  베트남전쟁과  게릴라전,『전사』제6호,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241～242. 29) Michael  Maclear,  The  Ten  Thousand  Day  War.  유경찬  역,『베트남  :  10,000일의  전쟁』,  (서울  :  을유문화사,  2002)  p.7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5&amp;vmode=full">135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37 군의  침입을  봉쇄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차후  공세적  기동전략을  구사할  때  작전 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30) 보응웬지압(Vo  Nguyen  Binh)은  결전을  위해  2개의  부대를  동원했다.  하나는  여자와  청년들로  구성된  2만여  명의  농민군이었고,  다른  부대는  산악  지역을  행 군하는  베트민  정규군이었다.31)  이들은  200㎞가  넘는  지역에서  자전거로  식량을  공급했고,  150문이  넘는  대포를  50마일  이상의  정글을  뚫고  고지에  배치시켰다.  이러한  상황을  하노이의  프랑스계  언론은  ‘프랑스군은  절망적’이라고  전했다.  절 망적인  전투는  1954년  3월  13일  새벽  5시  지압이  이끄는  호치민군의  포격으로  시 작되었다.  &lt;그림  2&gt;에서  보듯이  베트남의  공격은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디엔 비엔푸의  전투가  진행되는  시기는  미․소․영․불  등  4대  강국이  1954년  4월  제 네바에서  전후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만나기로  합의한  때였다.  호치민과  지압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디엔비엔푸의  전투결과가  정치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가져올  것은  명백한  것이었다.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마지막  거점이  함락됨으로써  베트남의  항 불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서  프랑스는  더  이상  명분  없는  식민지  복원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당시  발생된  알제리  분쟁으로  인해  더  이상  베트남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  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디엔비엔 푸가  함락된  다음날인  5월  8일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프랑 스군은  베트남에서  철군하였다.32)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천연의  요새라는  지형적인  특성과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었다.  그로  인해  호치민군이  공격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상당한  규모가  포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규전에서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최초의  생각 을  수정하지  않았다.  적이  공격해오면  자신들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쉽게  격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방위를  위한  주위의  고지군들의  통제와  그곳에  대한  수색정찰조차  하지  않았다.  호치민군은  프랑스군이  생각한  그  이상의  전술 과  방법으로  공격해왔다.  자신이  골리앗이라  믿었던  프랑스군은  결국  다윗의  돌 맹이를  맞고  쓰러졌다. 30)  최용호,『베트남전쟁과  한국군』(군사편찬연구소,  2004),  p.60. 31)  유경찬  역(2002),  p.77. 32)  디엔비엔푸의  공방전은  최용호『베트남전쟁과  한국군』(군사편찬연구소  :  2004)  또는  최용호  “지평리전투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패요인  비교분석”『군사연구』제119호(육군 본부  :  2003)를  참조하라.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6&amp;vmode=full">136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38 군사연구 제127집 &lt;그림  2&gt;  호치민군의  디엔비엔푸  단계별  포위공격 호치민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항불전33)에서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결합하 였고  일정수준의  군사적  공격과  군중들의  봉기를  결합하였다.34)  그는  마우쩌 둥의  인민전쟁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총공세를  디엔비엔푸에서  결행했다.  또 한  제네바  협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에  공격함으로  인해서  전투가  끝 난  후  쉽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디엔비엔푸  전 투는  제4세대전쟁의  특성이  나타났다.  즉,  그동안  전술적으로  운용되던  게릴 라전을  마지막  총  공세를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운용하였으며,  총공세의  시 점을  적의  정치적  의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시점에  집중함으로써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였다. 2. 케산(Khe Sanh) 전투 미군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되자  “세력균형  관계”가  유리하게  바뀔  때까지  호치민군은  2단계로  후퇴해야  했다.  미군과의  전쟁은  프랑스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33)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을  “항불인민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약어로  항불전쟁이라  한다. 34)  서상문  편저(2007),  p.501.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7&amp;vmode=full">137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39 프랑스와의  전쟁은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이었지만  미군과의  전 쟁은,  사회주의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이념전쟁이었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더  월등한  나라였다. 호치민의  전략은  변화되지  않았다.  다만  전술적  측면에서  더  강화되고  장기화  될  뿐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장기간의  소모전과  함께  남베트남 에  대한  부정의  전쟁(unjust  war)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는  전략을  구상했다.  미군과의  전쟁에서  북베트남의  혁명방법은  정치  및  무장투쟁과  함께  선동과  선전  공작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선동과  선전  공작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정 신을  약화시켜  남베트남군들을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거나  최소한  대열에서  이탈시켜  인민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35)  미군의  계속적인  병력증강과  수색  및  섬멸작전으로  군사적  상황은  북베트남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국민들도  점차  정부에  동조하게  되어  북베 트남은  정치  및  군사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이에  북베트 남은  디엔비엔푸  전투와  같은  결정적인  계기를  줄  수  있는  계획을  1967년  4월  베 트남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구상하였다.  이  회의에서  계획한  것이  뗏공세였다.  이  계획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이루어졌다.36) 제1단계(기만공격) : 미군을 국경지역으로 분산 유인하기 위해서 인구 밀집지역 에서  떨어진  미군진지를  공격한다. 제2단계(총공격 및 총궐기) : 베트콩들이 남베트남 도시지역으로 잠입하여 전국적 으로  일제히  주요  행정기관  및  방송국  등을  점령하고  연립정부  수립을  선포하여  민중을  선동한다. 제3단계(군사적  총공세) : 미군  및  다국적군이  철수하면  잔여  저항거점을  파괴 하고  통일을  달성한다. 이  계획은  1967년  12월부터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이공,  다낭(Da  Nang),  후에(Hue),  케산  및  DMZ  등  베트남  전역에  북베트남  부대의  이상한  이 35)  서상문  편저(2007),  p.501. 36)  나종삼,『월남파병과  국가발전』,  (국방군사연구소,  1996)  p.5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8&amp;vmode=full">138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40 군사연구 제127집 동이  감지되었다.  뗏을  전후로  하여  공세가  있을  것을  예측하는  다수의  보고서가  나왔다.  미  공군보고서에  의하면  1967년  9개월  동안  케산  지역에서  북베트남  트럭의  운행수는  평균  480대였지만  10월에는  1,116대,  11월에는  3,823대,  12월에는  6,315대37)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케산은  서북부  Quang  Tri  Province에  위치한  조그마한  촌락으로  라오스  국 경으로부터  10㎞,  DMZ(Demilitarized  Zone)에서  23㎞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라오스  국경에서  9번  도로를  따라  침투하는  적을  막기에  적합 한  위치였다. 북베트남군의  케산에  대한  공격은  1968년  1월  21일  새벽  5시  30분에  시작되 었다.  이것은  북베트남의  뗏공세의  제1단계  기만공격의  일환이었지만  치열한  전투  없이  물러났다.  이후  제2단계  작전인  뗏공세가  1월  31일38)  실시되었다.  하 지만  기대했던  민중봉기는  한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북베트남군은  막대한  인 명피해만  입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북베트남군은  케산을  제2의  디 엔비엔푸로  만들어  뗏공세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2월  5일부터  2 개  사단으로  케산을  포위  공격하였다. 북베트남의  2개  사단은  881N  언덕  뒤에  제325C  사단과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가하였던  제304사단으로  이  지역에  새롭게  투입되었다.  병력은  약  1만  5천에 서  2만  명  규모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리고  케산에서  10～15마일  떨어진  DMZ 에는  제324사단의  1개  연대가  있었고  케산  포위공격  초기에  제320사단이  추가 되었다.  제304사단과  제325C  사단은  기갑부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은  1966년  초부터  미  해병대  제3대대가  13년  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 푸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령해서  수색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  해병기지 는  1967년  오키나와에서  공수된  해병  제26대대로  교체되었고  보급로는  1967년  8월부터는  북베트남의  활동으로  인해  끊겨  공중보급이  이루어졌다. 37)「The  War  in  the  Northern  Provinces  :  1966～1968」,  (Department  of  the  Army,    Washington,  D.C.,  1975),  p.31. 38)  일부  지역에서는  1월  30일이  북베트남의  공격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뗏공세는  1월  31일 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39&amp;vmode=full">139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41 &lt;그림  3&gt;  케산의  주요고지           *   출처  :  The  Battle  for  Khe  Sanh(1969)  적이  케산기지를  공격할  것은  1968년  1월  2일  해병  청음초에서  정체불명의  사람  5명을  사살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  5명은  북베트남의  연대장과  작전관,  통 신장교  그리고  2명의  장교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웨스트모랜드(Willian  C.  Westmorgland)  주월  미군사령관은  1월  6일에  ‘Niagara’라는  화력  지원  계획을  수립했다.  이  이름은  폭탄들과  포탄들이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떨어지는  계 획에서  의해서  붙은  이름이다.  ‘Niagara  1’  작전은  1월  3주까지  운용되었고  1월  21부터는  ‘Niagara  2’  작전이  시작되었다.  웨스트모랜드  사령관은  적의  공격이  예상되자  5개  대대를  증원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총  6개  대대  5,600명이  포위공격에  대한  방어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  지 역에  배치된  대포는  디엔비엔푸에  배치되었던  것보다  2배가  넘는  105㎜  곡사포  46문이  있었다.  또한  5대의  90㎜  탱크와  베트남전쟁에서  처음  사용되는  ‘Ontos’라는  경장갑차로  이루어진  2개의  소대도  있었다. 미군은  디엔비엔푸의  전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케산  주변에  있는  주요  고지 들을  모두  점령하기  위해  케산에  배치된  전체  병력의  대략  20%를  투입했다.  또한  적의  은밀한  접근을  감지하기  위해  ‘Muscle  Shoals(나중에  Igloo  White로  이름이  변경되었음)’라는  작전명으로  316개의  무인  전자센서들을  주변에  넓게  흩어  놓았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0&amp;vmode=full">140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42 군사연구 제127집 이  센서는  음파와  진동을  감지할  수  있는  장비였다. 북베트남의  공격이  시작되자  미군이  사용한  대항수단은  항공부대로서  해병대의  제1항공사단을  중심으로  공군의  전투기,  해군의  함재기,  B-52전략폭격기들이  동원 되어  항공폭격을  가했다.  또한  고립된  지역에  대한  보급은  공군의  운송기와  해병 대의  헬리콥터부대가  전면적으로  맡아서  5천  명의  해병대를  지원했다.  1968년  3월  31일  전투가  종료되기까지  70일간에  하루  평균  300회의  공습이  있었고  이때  케산  부근의  북베트남군에게  투입된  포탄,  네이팜탄  등의  수량은  15만  톤(1일  평균  2천  톤)을  넘는  막대한  것이었다.  이  양은  한국전쟁  당시의  1년분에  상당하는  것이었다.39) 이와  같은  엄청난  폭탄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5배40)에  해당 하는  것이었지만  사용된  만큼의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대포는  사격 을  한  후에는  바로  레일을  타고  산  속  동굴  안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의  중요한  도시들은  모두  뗏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8만  명에  달하는  게릴라와  북베트남  정규군의  공세는  후에(Hue)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뗏공세는  케산전투와  함께  미군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41) 뗏공세  후  호치민은  선전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베트콩을  부패한  남베트남의  정권을  타도하려고  노력하는  자유의  투사로  묘사했으며,  미군의  화력과  대규모  작전이  베트남  민간인과  마을에  끼친  피해를  강조했다.  미국의  언론은  북베트남 군이  케산을  포위하고  있던  77일  동안  텔레비전  방송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그  당시  저녁  시간대에  베트남의  케산  전투에  대한  보도  비중은  25%였다.  때때로  CBS는  50%라는  높은  비율을  유지했고,  AP  통신은  38%  넘을  정도였다.42) 디엔비엔푸와  케산은  분명  차이점이  많은  전투였다.  하지만  미군이  케산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미국의  종군기자들은  케산과  디엔비엔푸를  동일시  하려고  했다.  적의  포위공격으로  고립되었다는  것과  주변  지형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케산  주변의  고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방치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미  미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군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뛰어난  공군력을  가지 고  있어  보급과  전투지원에  차이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언론으로  인해  케산  전투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존슨(Lyndon  Baines  Johnson)의  가장  중요한  39)  월남항공전분석(공군교육교재창,  1973),  p.178. 40)  유경찬  역(2002),  p.351. 41)  유경찬  역(2002),  p.347. 42)  유경찬  역(2002),  p.34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1&amp;vmode=full">141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43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케산전투와  뗏공세에서  전사하는  미군을  언론을  통해  본  미국인들의  반전여론은  점점  확산되기  시작했고  1968년  11월에  있을  대통령선거의  주요한  이슈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결과는  존슨  대통령이  지지한  민주당  후보가  아닌  공화당의  닉슨(Richadr  M.  Nixon)이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1969년  7월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43))을  발표하고  베트남에서  순차적으로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베트남전쟁을  남베트남  정부에  맡기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를  추구했다. 버나드  널티(B.  C.  Nalty44))는  케산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적의  전투  동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미  군부였다.  북베트남군은  케산을  디 엔비엔푸처럼  포위하지  않았다.  그들은  케산의  포위작전을  장기적으로  끌고  감으 로써  웨스트모랜드  장군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또한  케산의  포위작전으로  뗏공세  후에도  미군의  병력과  비행기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군은  이처럼  베트남전쟁의  전투에서는  승리를  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결국  철군하게  되어  전쟁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Ⅳ. 결      론 9ㆍ11테러  이후  제4세대전쟁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졌다.  본  논고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베트남전쟁에  나타난  제4세대전쟁의  특성  중에  하나인  게릴라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제4세대전쟁의  기원은  중국의  인민전쟁이었지만  중국의  인민전쟁은  대외적인  상호작용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은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과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가  참여한  소규모의  세계전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전쟁을  통한  제4세대전쟁을  고찰해  본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나타난  제4세대전쟁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첫째,  전쟁의  보조 43)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닉슨의  대외정책으로  미국은  국지전  개입을  제한하고,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 44)  “Airpower  and  the  Fight  for  Khe  Sanh”를  저술하고  공군과  해병대의  전사연구센터에서  근무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2&amp;vmode=full">142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44 군사연구 제127집 적인  역할을  했던  게릴라전을  전략적인  차원으로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공 격의  목표가  적의  군사력이  아닌  적의  정치적  의지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셋 째,  전투  행위자를  특정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군인이  전투  행위자로  혼재되어  있어  군인과  민간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이것은  전방과  후방,  전시와  평시의  구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쟁의  특성은  베트남전쟁  이후  계속  진화되고  있다.  현재  진화되 어  나타나고  있는  제4세대전쟁의  특징은  첫째,  전장의  범위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시대  때  병력  수는  ㎢당  4,970명이었던  것이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404명으로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즉  제1세대에서  제2 세대전쟁으로  진화되었을  때  전장의  폭은  10배가  넓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 전  때에는  병력의  수는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든  36명이 었다.45)  다시  말해  1명의  병력이  전투할  수  있는  전장의  범위는  전쟁의  세대가  진화될  때마다  10배로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라면  제4세대전쟁은  제3세대 전쟁의  10배  이상으로  확대되어  나타나겠지만  국가라는  국경선이  무의미해진  제4세대전쟁에서는  그  전장의  범위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전 쟁의  주체가  국가보다는  집단(불평불만,  테러,  마약  등)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 다.  이것은  9ㆍ11테러를  통해서  나타났다.  셋째,  전쟁의  주체가  비국가적으로  변 함에  따라  린스가  주장하듯이  전후방은  목표와  비목표로  대치되고  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진화되는  전쟁의  양상에서  나타난  제4세대전쟁을  위해  한국의  많은  전략가와  학자들은  한국의  대응방향에  대하여  몇  가지  대안을  제 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제4세대전쟁의  특성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야  한다.  제4세대전쟁의  속성은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수행 하는  전쟁의  양상이다.  그  언어의  태동이  미국에서  시작된  것과  같이  미국처럼  강대국에  대하여  약소국  또는  집단이  사용하는  전쟁이다.  그럼  한국은  강자인 가  약자인가?  한국을  대상으로  현재  또는  앞으로  제4세대전쟁을  사용할  집단이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일부에서는  해외파병으로  알카에다의  테러  대상국 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  또,  일부  학자는  제4세대전쟁에  대한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개발하여야  한다 45)  ㎢당  병력수는  Trevor  N.  Dupuy.  “Understanding  Defeat”,  최종호ㆍ정길현  공역,『패전 분석』에서  10만의  군대  기준으로  나타난  부대  소산의  경향을  참조하라.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3&amp;vmode=full">143page</a><br><br> ..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45 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경을  맞댄  뚜렷한  적대적  집 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한반도는  제4세대전쟁  환경보다는  제3세대전쟁  환경이  더  강하다.  하지만  재래식  전쟁인  제3세대전쟁은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그  발생가능이  희박해졌다.  핵무기는  하나의  무기가  아닌  재래 식전쟁(제3세대전쟁)을  억제하는  억제전략(deterrence  Strategy)의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2009년  현재  북한은  2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그렇기  때 문에  향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전쟁의  발생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강자의  위치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제4세대전쟁 을  생각해야  한다.  즉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했을  때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적  공격계획을  수립해야  한 다.  이런  맥락에서  그동안  자국의  방어적  안전보장을  위한  다자안보협력을  역 으로  생각하여  적의  정치적  의지를  겪는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도  하나의  대응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4&amp;vmode=full">144page</a><br><br> ..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 전 특성 연구 146 군사연구 제127집 1.  나종삼,『월남파병과  국가발전』,  서울  :  국방군사연구소,  1996. 2.  이수형,  “9ㆍ11  뉴욕  테러와  21세기  신전쟁”,『전사』제4호,  군사편찬연구소,  2002. 3.  최용호,『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서울  :  군사편찬연구소,  2004. 4.  최용호,  “베트남전쟁과  게릴라전”,『전사』제6호,  군사편찬연구소,  2004. 5.  최용성,  “게릴라전  양상의  변화과정  고찰,『전사』제6호,  군사편찬연구소,  2004. 6.  서상문  편저,『동아시아  전쟁사  최근연구  논문선집』,  서울  :  군사편찬연구소,  2007. 7.  공군본부,『월남항공전분석』,  197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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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r  in  the  Northern  Provinces  :  1966～1968,  Department  of  the              Army,  Washington,  D.C.,  1975. 20. William  S.  Lind(et.  als),  “The  Changing  Face  of  War  :  Into  the  Fourth        Generation”  Military  Review,  198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6&amp;vmode=full">146page</a><br><br> 군사관리 &lt;a href="#147"&gt;150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lt;/a&gt;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7&amp;vmode=full">147page</a><br><br> 학예연구관    박 재 광 전쟁기념관 Ⅰ.  머  리  말 Ⅱ.  조선  갑주의  특성과  전존실태 Ⅲ.  유성룡  갑주 Ⅳ.  맺  음  말 &lt;필자  약력&gt;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ㆍ건국대ㆍ중앙대ㆍ국외대  한국역사와  전쟁사 강의,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성균관대 겸임교수 &lt;저서&gt;  충무공  이순신,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망암  변이중  연구, 화염조선-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150 군사연구 제127집 군사관리   1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유성룡  갑주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8&amp;vmode=full">148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51 Ⅰ. 머  리  말 인간이  의복을  착용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기후변화와  외부 영향으로  인한  신체보호와  장식을  위해  착용하였다.  신체를  방호하는  것  중  외계 로부터의  상해(傷害),  즉  적의  무기로부터  자기의  몸을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 하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시의  적 의  무기로부터  신체를  방호(防護)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방어 용  무기의  일종인  갑주(甲冑)를  착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갑주는  전쟁시 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의례시에는  위엄을  나타내며,  훈련시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신체를  단련하기  위하여  착용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갑옷이라  한다면  찰갑(札甲  :  비늘갑옷)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오례의에는  작은  철편이나  가죽편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갑옷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찰갑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찰갑과  기본  구조는  동일 한데,  쇠나  가죽으로  만든  타원형의  방호재  표면에  상하좌우  각각  2～4개의  구멍 을  뚫고  이를  가죽끈을  이용해  가로  방향으로  먼저  엮은  뒤  다시  이를  세로  방향 으로  연결하여  완성한다.  조선  전기의  찰갑으로는  수은갑과  유엽갑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시대의  찰갑  유물은  유성룡  갑주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유성룡  갑주는  경북  안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柳成龍  :  1542∼ 1607)의  종손가에는  유성룡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들과  함께  전해오고  있다.  갑주 (甲冑)  1구,  혁화(革靴)  1족,  상아홀  1개,  갓끈  4종,  관자  2종,  유서통  1개,  동국지 도  서애  선생  수택본  1점  등이  그것인데,  현재  이  유물들은  모두  종손가의  유물 전시관인  충효당의  영모각에서  일반인들에게  전시하고  있다.  전해오고  있는  유물  모두가  귀중한  문화재이지만  특히  갑주는  조선  중기의  갑주의  양태를  가름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갑주는  일종의  찰갑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어떠한  유사한  유물도  없다. 최근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동래읍성의  해자(垓字)  유적에서  조선 시대  찰갑이  거의  원형  그대로  발견됐다.  백제  유적인  몽촌토성에서  쇠뼈로  만든  찰갑이  출토됐고,  다른  지역에서도  찰갑  조각이  발견된  적은  있으나  온전한  형태의  조선시대  찰갑이  출토된  것은  처음이다.  이  찰갑은  철로  만든  미늘을  물고기  비늘 처럼  촘촘히  붙여  만든  것으로,《세종실록》에  보이는  찰갑과  동일하다고  할  수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49&amp;vmode=full">149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52 군사연구 제127집 있다.  따라서  동래읍성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성룡  갑주를  상호  비교ㆍ연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유성룡  갑주에  대한  연구성과는  매우  빈약하다고  하겠다.  지금은  고 인이  된  이강칠  전  문화재전문위원이  주도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실시한  현존하 는  전국  갑주  유물의  조사결과를  정리한《한국의  갑주》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 고1),  금속학적인  측면에서  갑편의  성분을  분석한  논문  1편이  있을  뿐이다.2) 따라서  유물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유성룡의  갑주와  조선과  중국ㆍ일본의  갑주의  특징을  비교  분석해봄으 로써  유성룡  갑주의  실체를  좀  더  명확히  하고,  나아가  조선  중기의  찰갑을  고증  복원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고자  한다. Ⅱ. 조선 갑주의 특성과 전존실태 1. 우리나라 갑주의 시대별 특징 우리나라의  갑주를  이해하기  위한  사료로는  문헌,  고분출토유물,  고분벽화,  조 각유물,  전존유물,  회화,  토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갑옷은  삼국시대에는  매우  발달된  면을  보여주고  있어  이는  고구려  벽화나  신라출토유물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데  기록에도  당  태종이  백제에  사신 을  보내  오색이  짙고  금색이  찬란한  금칠도철갑(金漆塗鐵甲)을  구해다  입었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나라의  제작기술이  앞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3) 인류가  최초로  갑주를  만들기  시작한  선사시대에는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가죽 이나  뼈,  나무  등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의  갑주에  관한  자료는  극히  드물고  고조선  후기의  토광묘와  주거지에서  철이나  뼈로  만든  갑찰 (甲札)들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4) 우리나라의  고대갑주에  대한  연구는  주로  영남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중심이  1)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한국의  갑주》,  1987,  100～101쪽. 2)  유한익,〈조선시대  갑주에  대한  금속학적  고찰  -  서애  유성룡  선생의  갑주  분석〉《대한 금속학회지》23-2,  1985. 3)  이미나,  &lt;갑옷에  대한  연구-조선왕조시대를  중심으로-&gt;,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1983,  p.3. 4)  김기웅,  ≪무기와  화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pp.89～91.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0&amp;vmode=full">150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53 된다.  고분갑주는  유물로서  그  재질이나  형태,  특징을  파악할  수  있으나  착장방법 이나  사용방법  등은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벽화,  토우  등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가. 삼국시대      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를  가리켜  고분시대,  또는  고분문화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의  문화  복원이  주로  고분의  연구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 자면  고분은  삼국시대의  문화상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표지적  존재가  되고  있다.5) 국가간의  전쟁이  빈번하였던  고대는  다양한  형태의  갑주가  제작되고  사용된  갑 주의  전성기였다.  그리고  이전의  재료도  계속  사용하였지만  이들보다  방호능력이  훨씬  우수한  철이  새로이  채택된  시기이다.6) 삼국시대의  갑옷은  크게  찰갑과  판갑이  있다.  찰갑은  작은  갑찰들을  먼저  가로로  연결한  후  다시  세로로  이어서  유동성이  있기  때문에  기마전에  적당하였고,  판갑 은  여러  가지  모양의  철판을  머리가  둥근  못이나  가죽끈으로  연결  조립하여  만들 었기  때문에  보병전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벽화를  통해  볼  때  기마전을  주 로  하였기  때문에  찰갑을  주로  착용하였고,  남부지역에서는  출토유물을  통하여  볼  때  판갑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보병전을  많이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러나  5세기에  이르러  남부지역에서도  기마전을  채택함에  따라  찰갑을  착용한  것 이  유물을  통하여  확인된다.7) 갑주를  부장품으로  사용하였던  풍습으로  인하여  출토유물은  가야,  신라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  4～6세기에  한정된다.  이는  4세기  때부터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였던  갑주문화를  계승한  판갑-차양주,  충각부주의  토착계  갑주와  5세기  경  유입된  찰갑-종장판주,  만곡종장판주의  고구려계  갑주의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 다.8) 고구려  갑주  유물은  철찰갑과  투구  몇점이  발견되었을  뿐이지만  고분벽화에  상세 히  묘사되어  있어  구조나  착장방식을  알  수  있다.  벽화와  유물을  토대로  보았을  5)  김기웅,  ≪고분≫,  대원사,  1991,  p.6.  6)  국립김해박물관  편,  ≪(특별전)  한국  고대의  갑옷과  투구≫,  국립김해박물관,  2002,  p.10.  7)  신경철,  &lt;고식개자고(古式鎧子考)&gt;,  ≪부대사학≫9,  부산대학교사학회,  1985,  p.163.  8)  박가영,《조선시대의  갑주》,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3,  p.16.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1&amp;vmode=full">151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54 군사연구 제127집 때  주로  찰갑에  종장판주,  만곡종장판주,  관모형  복발주를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 된다.  백제의  갑주  유물은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뼈갑찰과  주거지나  분묘에서  발견된  판갑,  철갑찰,  부속갑옷  등이  있으며,  낙랑  멸망이후  직접적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면서  일찍부터  고구려와  접전이  많았으므로  고구려의  갑주를  신라나  가야보 다  빨리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전술  또한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갑주는  벽화와  유물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판        갑         판갑은  출토유물을  통해서  보면  비교적  큰  철편을  고정시켜  만든  갑옷으로  갑편의  형태에  따라  장방형의  철편을  세로로  연접하여  만든  종장판갑(縱長板甲) 과  장방형의  철편을  가로로  연접하여  만든  횡장판갑(橫長板甲)이  있고  횡장판(橫 長板)  사이사이에  삼각판을  이은  판을  연접하여  만든  삼각판갑(三角板甲)이  있다.  판갑은  앞  중앙에서  개폐하도록  되어  있고  길이는  허리정도  내려오는  길이이며  판갑  하단에는  매우  넓은  찰편으로  만든  요갑(腰甲)이  있고  요갑  아래에는  넓은  상갑을  착용하고  있다.9)  &lt;그림  1&gt;은  김해  퇴래리  출토품으로  장식된  문양이  고사리 &lt;그림  1&gt;  궐문철제판갑 &lt;그림  2&gt;  판갑(김해  두곡) 9)  김정자,  &lt;남부지역의  출토유물을  통하여  고구려벽화에서  보이는  갑주에  관한  고찰&gt;,  ≪복 식문화연구≫,  8권  1호,  2000,  p.116.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2&amp;vmode=full">152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55 모양과  같다고  하여  궐문(蕨紋)철제판갑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후동상부에  별도의  철판을  바깥으로  구부려  만든  목가리개를  부착하였고  전동부에는  궐문(고사리무 늬)을  장식하였다.10) 2)  찰        갑          고분에서  드러난  갑옷에는  찰갑의  유물이  있으나  온전한  형태로는  남아  있 지  않고  다만  많은  수량의  소찰편이  드러났을  뿐이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볼  때  찰갑은  유동성을  갖도록  좁고  긴  쇠찰편을  가로로  혁철(革綴)한  후  세로로  철(綴) 하여  상하의  유동성을  갖게  한  허리정도  길이의  갑옷이다.  찰갑의  종류는  동환식(胴丸式)  찰갑과  양당식(裲襠式)  찰갑이  있는데  동환식  찰 갑은  앞  중앙에서  개폐하도록  한  갑옷이고  양당식  찰갑은  앞  뒤판을  양  어깨에서  연결하여  옆에서  개폐하도록  되어  있는  갑옷으로  중국에서  많이  착용하였다.  고구려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안악3호분의  벽화를  보면,  상의는  찰갑으로  역시  소찰 편으로  이루어진  상박갑을  부착하였으며  경갑은  있는  무사도  있고  없는  무사도  있다. &lt;그림  3&gt;  안악3호분  행렬도 5세기  말로  추정되는  쌍영총의  개마무사(鎧馬武士  :  갑옷을  입힌  말에  탄  중무 장  기병)는  만곡종장판주로  보이는  투구를  쓰고  있는데  원형의  복발에  간주를  세 우고  수발을  달아  그곳에  검은  상모를  달았다.  그리고  하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대퇴갑을  착장하였다.11) 10)  박가영,  &lt;한국  고대갑주의  유형&gt;,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7,  p.46 11)  박가영,  앞의  논문,  p.8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3&amp;vmode=full">153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56 군사연구 제127집 &lt;그림  4&gt;  쌍영총  개마무사도 찰갑의  하단에는  허리를  보호하도 록  요갑이  붙어  있고  그  밑에는  골반 을  보호하는  상갑이  부착되어  있다.  개마무사가  착용한  찰갑은  동환식  찰 갑으로  추정된다.12) 안악3호분  외에  팔청리고분,  약수리 고분,  삼실총,  대안리고분  등에서  볼  수  있다.  3)  누비갑옷          감신총벽화와  덕흥리고분에서  보이는  갑옷은  사격자문(斜格子紋)과  횡선으 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누빈  갑옷으로  추정하고  있으며,13)  덕흥리고분의  기병이  착용하고  있는  상갑,  대퇴갑,  경갑도  사격자문으로  표시되어  있어  누비갑옷으로  추측되는데  삼국시대는  솜을  만들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문헌의  기록과  주변 국가의  상황으로  보아  닥나무류를  넣었을  것이다.14) &lt;그림  5&gt;  덕흥리고분의  개마무사도 12)  송계현,  &lt;三國時代의  鐵製甲冑의  硏究&gt;,  경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8,  p.114.  13)  이강칠,  &lt;韓國の甲冑&gt;,  ≪月刊  韓國文化≫,  1984년  3월호,  1984,  p.23.  14)  김정자,《한국군복의  변천사  연구》,  민속원,  1998,  p.153.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4&amp;vmode=full">154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57 길이는  둔부까지  내려오며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경감으로도  보이는  깃이  목  위로  높이  올라와  우임으로  여몄다.  소매길이는  팔꿈치를  약간  덮을  정도이고  직 물로  만든  듯  소매부리가  아래로  처지고  선이  둘러져  있다.  이러한  갑옷은  검이나  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데  효과적이었고  찰갑이나  판갑이  마찰로  끊어지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으므로  누비는  방법과  충전재의  종류를  변화시키면서  수세기  동안  입혀졌다고  한다.  따라서  벽화에  나타난  갑옷의  재료는  규명하기는  어려우나  저고리  형태의  누비갑옷이라  생각 된다.15) 4)  투        구         투구는  종장판주,  만곡종장판주,  관모형복발주,  충각주,  차양주가  있으며,  출토유물을  통해서  본  종장판주는  안으로  휘어진  좁고  긴  철판을  좌우로  겹쳐서  뒤쪽으로  순서대로  가죽끈으로  연접하여  제일  뒤쪽에는  철판을  좌우철판의  안쪽 으로  대어  갑체를  완성하였고  정상에는  작은  복발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투구의  하단에는  불가리개와  수미부가리개를  부착한  것도  있다.16) &lt;그림  6&gt;  종장판주(경산  임당) &lt;그림  7&gt;  만곡종장판주(김해  두곡) 안악2호분을  보면  종장판주에  복발  없이  간주를  세우고  붉은  상모를  달아  장식 하고  있고  볼가리개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15)  김영숙,  &lt;갑주에  관한  연구&gt;,  원광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p.13. 16)  김정자,  앞의  논문,  p.11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5&amp;vmode=full">155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58 군사연구 제127집 만곡종장판주는  고구려  토착계의  투구로  출토유물을  통해  보면  좁고  긴  철판을  S자형태로  구부려  투구의  틀[冑體]을  만드는데  투구  정면에는  끝이  삼각형으로  돌출된  중심  위치를  나타내는  미간(眉間)부에  철판이  있고  이  미간부의  철판을  중심으로  좌우에  철판을  안쪽으로  대어  가죽끈을  이용하여  엮어  나갔다.  투구의  정상은  작은  복발을  얹었고  전후좌우에  쌍각  장식을  하고  간주를  세우고  흑모로  장식하였다.17) 이것  역시  아래에  수미가리개와  볼가리개를  달았다.  관모형복발주는  통구12호 분에서  보면  찰갑을  입고  투구를  쓴  무사의  투구가  방형의  소찰로  되어  있으며  복발로  상부를  덮고  있어  관모형복발주로  보인다.  충각주는  앞부분은  배의  앞부분과  같이  각을  이루었고  측면에서  보면  산모양으 로  되어  있어  화살이  전후로  피해가도록  만들었다.  나.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갑옷은  고구려벽화나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  마갑  등  상 당히  진보된  군복이  오랫동안의  숭문비무(崇文卑武)의  사조와  더불어  이는  퇴화 일로였다고  볼  수  있다.18)  고려사  흥복지(興服志)에도  의갑,  철갑,  의백갑,  백갑두 모(白甲兜牟),  의주갑(衣朱甲),  자갑(紫甲)  등  많은  유별을  볼  수  있으나  관계가  높으면  거의  복두공복(複頭公服)을  하고  있어  여기서도  숭문비무의  습속을  엿볼  수  있다.19) 현재  전해지는  이  시대의  갑옷  유물로는  정지(鄭地)장군이  착용하였던  경번갑 (鏡幡甲)이  있다.  이  경번갑은  총  길이  70㎝,  가슴둘레  79㎝,  소매길이  30㎝로  세 로  7.5∼8㎝,  가로  5∼8.5㎝의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결하였다.  앞면 에는  철판  6조각을  한  줄로  연결한  것이  6줄이  있고  그  중  두  줄은  여미게  되어  있고,  뒷면은  7조각을  한  줄로  연결한  것이  5줄로  등을  가리게  하였다.  어깨와  팔 은  철판없이  고리만을  사용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갑주는  중국ㆍ일본ㆍ몽골  등에서도  사용되었으며,20)  14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투 구가  2점  남아  있다. 17)  김정자,  앞의  논문,  p.119.  18)  김동욱,  &lt;이조  전기  복식사  연구&gt;,  ≪한국연구원≫,  아세아문화사,  1963,  p.156. 19)  유희경,  ≪한국복식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0,  p.189.  20)  국립김해박물관,  앞의  책,  p.24.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6&amp;vmode=full">156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59 &lt;그림  8&gt;  정지장군  경번갑(광주민속박물관) ≪고려도경≫에  보이는  군인  복색에  나타난  당시의  갑옷에  대하여  품계에  따라 서  구체적이고  간단하게  살펴보면,  상하군  좌우위장군(上下軍  左右衛將軍)  -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데  검은  가죽과  쇠로  만들었으며  무늬  있는  비단으로  꿰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였다.  상육군위중(上六軍衛中)  -  평상시에는  복두에  자의(紫衣)를  입는데  대례와  불 교의식ㆍ유교의식,  수조(受詔),  배표(排表)시에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나오는데  투 구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다  건다.  그리고  자문라건(紫文羅巾)을  썼는데  이것은  구슬로  장식하였으며  왼쪽에는  칼과  활을  차고  손에는  탄궁(彈弓)을  들었다.  용호중맹군(龍虎中猛軍)  -  청포착의(靑布窄衣  :  푸른베로  만든  좁은  저고리)와  백저궁고(白苧窮袴  :  흰모시로  만든  좁은  바지)를  입고  투구와  갑옷을  덧입었는데  오직  부박(어깨를  가리는  것)만이  없다.  투구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닌다. 이  외에는  비교적  지위가  높은  층에서는  전각복두나  채화복두나  절화복두  및  금화대모를  쓰고  문면포,  자문라포,  홍문라포  등의  포를  착용하였다.21)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재료와  색상이  다양한  갑주가  존재했고  화려하고  섬세 한  갑주도  국가의  관리하에  제조되었으며  원나라의  갑주를  받아  착장하기도  하였다 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갑주의  구체적인  형태나  구조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22) 또한  고려시대의  갑주에  대한  보충은  일본의《몽고습래회사》를  통하여  조금은  알  수  있다.  여기에  여몽연합군의  갑옷은  갑찰을  연결하여  만든  길이가  긴  조끼형의  찰 21)  유희경,  앞의  책,  p.191 22)  박가영,  앞의  논문,  p.19.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7&amp;vmode=full">157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60 군사연구 제127집 갑과  직물로  만든  포  형태의  갑옷이  있고,  투구는  종장판을  연결하여  만든  감투에  뒷  드림을  달고  차양과  옆드림  부분에는  털을  댄  투구와  직물로  만들고  뒷목과  귀를  보호하는  드림과  턱을  보호하는  부분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는  투구로  구분된다.23) &lt;그림  9&gt; 《몽고습래회사》에  나타난  여몽연합군의  갑주 다.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갑옷은  중국의  갑옷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으며  국가의  부역 노동에  의하여  경ㆍ외아문의  소속  장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24)  감사와  병사의  감독하에  관리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제조하고  있는  갑옷만으로는  당시의  군사 들이  착용해야  하는  갑주를  모두  공급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군 역에  징발되는  군사들로  하여금  갑주를  스스로  갖추도록  함으로써  국방상의  재정 난을  덜고자  하였다.25)  아울러  갑주와  무기를  스스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에게는  관에서  지원해  주는  정책도  병행하였다.26) 광해군대에  ‘각읍월과군기법(各邑月課軍器法)’이  제정되면서  군기의  제조  및  공급은  ‘수령부담’,  ‘자체생산’의  원칙으로  운용되었다.  이때  월과군기의  각읍  배정 원칙은  그  기준에  읍의  대소에  있지  않았고  대부ㆍ도호부ㆍ부ㆍ군ㆍ현  등  관위의  차등에  두어졌다.27)  갑주류  또한  이에  준용하여  제조와  공급이  이루어졌다. 23)  박가영,  위의  논문,  p.20.  24)  하지만  임란을  거쳐  18세기로  접어들면  외공장의  경우  공장안이  더  이상  작성되지  않고  사 역의  필요가  있을  경우  私匠을  고용하거나  필요한  재료를  시장을  통하여  구입하고  있었다. 25)《세조실록》권25,  7년  9월  병오;《성종실록》권251,  22년  5월  기묘. 26)《문종실록》권2,  즉위년  7월  19일. 27)《반계수록》21  병제.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8&amp;vmode=full">158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61 조선시대의  갑주는  형태나  소재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누어지고  있다.28)  갑 옷의  소재를  살펴보면  이  중에서  갑옷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로는  겉 은  모직물이고,  심지로는  솜을  넣는  것으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사람이  완전한  준비를  하지  못하여  혹  추운때에  두터운  솜옷이  속까지  젖으면  얼어  죽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군대에는  모직물로  만든  옷이  좋다. 이는  비를  막 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철갑  옷과  철  투구는  탄환을  방어하는  데는  편하지만  보졸 (步卒)에게는  불편하다. 그러므로  솜이  제일인  것이다. 따뜻하고  폭신하며  또  비 를  막고, 탄환을  막는데  좋으니  알지  않으면  안된다.”29)  이는  즉  모직물을  겉감으로  쓰면  비에  잘  젖지  않고  따뜻하며,  솜은  심지로  넣 을  경우  따뜻하여  겨울에  춥지  않을  뿐더러  방어용으로도  훌륭하며  다른  비단이 나  철,  두석(豆錫)과  같은  재료보다  비용이  덜  들어  경제적인  때문도  있었을  것으 로  생각된다.  또한  갑옷의  소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은  종이를  들  수가  있다.  지갑은  미늘[札]은  종이를  접어서  만들고,  사슴가죽으로  엮어서  흑칠을  하 여  제조하였으며,30)  후에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은  형태의  갑적고리(甲赤古里)는  두터운  종이를  소금물에  네댓  번  담그는  과정을  거쳐서  제조되었다.31)  고종  연간의  병인양요(1866)  이후에는  면갑(綿甲)이  제작되었다.  이는  면포에  풀솜[細綿]을  몇  겹으로  겹쳐  누빈  후  소총  탄환을  방어하게  한  것으로  일종의  방탄복을  제작한  것이다.  실제로  이를  시험해  본  결과  열두겹의  두께를  탄환이  관통치  못하였고  결국  열세겹의  면갑이  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착용하 고  훈련이나  실제전투에  임할  때  사지를  움직이기에  극히  불편하였고  여름철의  경우에는  더위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실효는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32)  이 러한  지갑이나  면갑  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용됐던  각  종류의  갑옷의  제작방법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33) 28)  남한산성에  수장해놓은  갑주는  이  시기  갑주의  효용성  저하와  경비부담으로  인하여  제대 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남한지 》  군물) 29)《성호사설》권13,  인사문. 30)《국조오례의》오례,  군례서례,  병기. 31)《성종실록》22년  5월  기묘. 32)  李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  33)《世宗實錄》卷  123,  五禮儀,  兵器.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59&amp;vmode=full">159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62 군사연구 제127집 ①  수은갑(水銀甲)  :  쇠로  미늘을  만들고  수은을  붓고  붉은  가죽끈을  사용하여  엮어  만듦. ②  유엽갑(柳葉甲)  :  그을린  사슴가죽[鹿皮]을  엮어  만들고  검은칠을  하여  만듦. ③  피  갑(皮  甲)  :  생돼지가죽[生猪皮]으로  미늘을  만들고,  그을린  사슴가죽을  엮어  만듦. ④  쇄자갑(鎖子甲)  :  철사로  만든  작은  고리[小環]를  서로  꿰어서  만듦. ⑤  경번갑(鏡幡甲)  :  쇠미늘[鐵札]과  쇠고리[鐵環]를  사이사이  하여  엮어서  만듦 ⑥  두정갑(豆釘甲)  :  철편과  함께  푸른색  옷이나  붉은색  옷에  점점이  광두정(廣 豆釘)을  박아서  만듦. 이들  갑옷  중에  철을  소재로  하여  만든  쇄자갑과  경번갑을  제외하면  만드는데  반드시  피혁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갑옷은  크게  전쟁터에서  입을  때와  실전을  대비하여  훈련할  때에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  착용하였으며  갑옷의  착용대상은  변방의  유방군  및  수성군,  수문 장,  내금위,  충의위,  별시위,  총통위,  보갑사,  당상관,  병조판서  등이  사료상  확인 이  되며  그  외에도  무위를  나타낼  필요성이  있을  때  왕과  관료들  그리고  왕의  친 위군은  갑주를  착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갑주는  조선시대의  무기체계  및  전술이  변화ㆍ발달함에  따라  그  현실적인  효용성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세종대  이래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의  성 공이나  대형화기인  천ㆍ지ㆍ현ㆍ황자총통과  그리고  문종대의  火車의  발전으로  무 기체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선조대에  접어들어  임란을  거치면서  무기체 계는  더욱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승자총통ㆍ소승자총통ㆍ소 총통ㆍ조총  등이  그것이다.  한편  1593년(선조  26)  9월  13일에는  이순신이  조총을  제조ㆍ보급하였고,34)  특히  행주산성전투에서  권율은  전라소모사  변이중으로부터  화차  40량을  지원받아  대승을  이끌어냈다는  사실35)을  종합해  볼  때  당시  무기제 조  기술  발전과  그에  따른  전술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점차  무기체계가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이제까지  개인  방호장비로써 의  갑주는  실전장비로써의  효용성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개인장비로써  갑 34)  이강칠,〈조선  효종조  나선정벌과  피아  조총에  대한  소고〉《고문화》10  한국대학박물관 협회, 1982. 35)《望菴先生文集》.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0&amp;vmode=full">160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63 옷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며36)  결국은  17ㆍ18세기로  접어들면서  의전용이 나  지휘관의  지휘복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그리하여  점차  투구는  장식이  화려해 지고  따라서  갑옷은  속미늘이  제거되며  두정(豆釘)만이  부착되고  있음은  이러한  추세를  집약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37) 2. 조선시대 갑주의 전존실태 조선시대의  유물  중  널리  알려진  각종  갑주를  두석린갑주,  두정갑주,  피갑주,  쇄자갑주,  면갑주,  흉갑  등으로  나누어  종류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었던  갑주의  실제적인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표  1】국내ㆍ외  갑주  전존  실태38) 구분 명         칭 국내 ㆍ 외  구분   및   수 량 비           고 출 토 전 존 해 외 계 1 철  갑  주 10 18 7 35 傅存革製  4점  포함 2 철제단갑 3 3 1.  함양상백리  1점 2.  고령  지산동  1점 3.  부산  동래  1점 3 금동경갑 2 2 1.  대구달서  제38호 2.  천마총  고분 4 은제경갑 1 1 경주98호  고분 5 경  번  갑 1 1 정지장군 6 쇄  자  갑 1 1 창덕궁  소장 7 두석린갑 2 1 3 8 두  정  갑 11 3 14 9 피        갑 2 6 10 흉        갑 2 1 3 11 면        갑 3 3 12 찰        갑 1 1 유성룡  갑주 동래성  해자  출토  찰갑 計 17 43 14 74 36) 《승정원일기》682책  영조  5년  4월  8일  “束伍軍裝服色  不成模樣”. 37)  鄭忠信(1576～1636)  장군의  두정갑이나  이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1676～1728)  장군의  갑 옷은  그  속  편찰이  없는  두정갑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38)  단,  출토  유물  중  형태가  완전치  못한  것은  본  통계에서  제외(이강칠,〈한국의  갑주〉 《석주선교수  회갑기념  민속학론총》,  동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71,  p.182)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1&amp;vmode=full">161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64 군사연구 제127집 이들  중  다음에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존유물  중에서  국내의  것 에  한하여  각각에  대한  그  형태나  재질,  맨드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갑옷에  투구 를  갖춘  경우  세분하여  투구의  맨  윗부분인  정개부(頂蓋部)와  머리가  들어가는  부분인  발부(鉢部),  해  가리개와  이마  가리개인  전비(前庇),  미비(眉庇),  그리고  양 귀와  목  부분을  엄호하는  목가리개  등  4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가. 두석린갑주     두석(豆錫)이란  놋쇠로서,  두석린  갑옷은  두석의  미늘을  연결하여  만든  갑옷 으로  현존하는  것은  원수용인  것  두  점뿐이다. 1)  고려대학교  소장  갑주     *  투    구         정개부는  모두  놋쇠로  만들었는데  꼭대기의  삼지창으로  시작하여  그  밑은  당초문(唐草文)이  투조된  보주(寶珠)가  사면을  마름모로  장식한  원구와  육각의  타원구에  맞물려  있는  형태이며  이어서  봉황이  앞뒤로  부조된  원형의  놋쇠판  밑 으로  붉은색의  상모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동시에  20.5cm의  간주(幹柱)가  발(鉢) 의  윗부분에  당초문으로  장식된  개철(蓋鐵)에  꽂혀  있다.  이  개철의  윗부분에는  다섯  개의  화판(花瓣)이  간주를  중심으로  무늬가  새겨졌는데  그  주위에는  봉황  다섯  마리가  날고  있는  모습이다. 발부는  재질이  가죽제에  흑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장식은  모두  놋쇠를  사용하 였다.  형태에  있어서는  전후좌우에  각각  근철(筋鐵)을  늘어뜨렸으며  이  근철에는  당초문이  투조되고  상하로는  여의두문(如意頭文)에  둘러싸인  원형  안에  만자문 (卍字文)이  있다.  그리고  전면의  좌우에는  서로  마주보고  하향하는  두  봉황이  첨 부되어  있으며  후면의  좌우에는  용  문양이  구름과  파도를  곁들여  장식되어  있다.  아울러  근철의  사이마다  상단에  3개씩,  하단에  2개씩,  여의두문이  배치되었고  발 의  허리  부분에는  당초문과  봉황이  4마리  투조된  띠가  둘러져  있다.  전비와  미비  부분을  살펴보면  챙은  양귀로부터  7개의  모서리를  이루며  앞쪽으로  점차  챙의  넓 이를  더해가는  형태로써  화형에  휩싸인  여의주를  중심으로  용  두  마리가  마주보 게  투조하였고  미비는  산  모양으로  정가운데에는  둥근선내에  ‘원수(元帥)’라  새겨 져  있어  원수용임을  입증해  준다.  글자  위에는  여의주가  있고  양  옆에는  세  개의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2&amp;vmode=full">162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65 발톱을  가진  용  두  마리가  구름에  휩싸여  여의주를  향해  힘차게  생동하는  모습이 며  용의  밑에는  물결과  파도가  매우  정교하게  투조되어  있다.     *  갑    옷         겉감은  홍색  모직물에  배ㆍ등ㆍ상박(上膊)  부분에  이르는  중요한  부분은  황⋅적⋅흑색으로  도금한  두석린(豆錫鱗)을  작은  못을  박아  붙였고  나머지  부분 은  황두병(黃豆鋲)을  횡으로  고정시켰으며  그  밑으로  놋쇠장식이  있는데  전면의  양쪽  길이  중앙부분에는  운학(雲鶴)을  비롯한  장생문(長生紋)과  신선이  고기를  타고  노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두석린의  각  계선(界線)에는  방형  두석판 (豆錫板)에  꽃무늬를  박았다.  안감은  옥색  명주,  심지는  무명  두겹을  누벼  두석린 을  고정시킨  작은  못을  이  심지에서  마무리지었다. 형태는  깊게  파인  U자형의  깃에  합임(合袵)이며  배래와  양옆  그리고  뒷길  엉덩이  부분  이하가  모두  트인  袍形이다.  각  트임  계선에는  수달피를  둘렀고  깃에는  놋쇠로  만든  용을  4등분하여  좌우에  달았는데  합임부분에는  용머리를  장식하여  여밀  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된다.  어깨의  놋쇠로  만든  용은  머리를  소매쪽으로  두고  있고  몸통의  중앙부분은  정 철(釘鐵)로  연결시켰다.  마지막으로  합임부분의  단추는  머리를  조각하여  첨부 하였다. &lt;그림  10&gt;  투구 &lt;그림  11&gt;  두석린갑옷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3&amp;vmode=full">163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66 군사연구 제127집 2)  경주부윤  갑주39)     *  투    구         정개부분은  간주만이  당초문으로  장식된  개철에  꽂혀  있을  뿐이다.  발부는  전후좌우에  근철이  늘어져  있고  전면의  좌우에는  용이  여의주를  향하여  꼬리를  하늘로  뻗치고  있고  후면에는  좌우로  봉황이  여의주를  향하여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목가리개  가장자리에  있는  털  장식이  하얀  토끼털로  둘러져  있는  것 이  특징이다.     *  갑    옷         고대박물관  소장의  것에  비하여  덜  파인  단령의  깃에  검정색  전을  달았던  것으로  보이며  깃  주위의  모란장식은  거의  떨어져  나가  몇개  보이지  않는다.  합 임부분에는  위아래  모두  해태머리  장식  두  개를  달았으며  전면의  배부분  이하  두 정을  박은  중앙에는  해태가  좌우로  부착된  듯하나  좌측  길에만  남아  있다. 나. 두정갑주 1)  이봉상(李鳳祥  ;  1676～1728)  장군  용봉원수문  두정갑주(龍鳳元帥文頭釘甲冑)40) 가) 원수용 갑주     *  투    구         정개부는  모두  탈락하였다.  발부의  형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 는  모양이다.  재질은  여러  겹의  종이를  덧발라  겉과  안  모두  흑칠을  하여  매우  윤택하다.  전후좌우에는  놋쇠로  만든  근철이  4개  있는데  꼭대기의  개철이  없어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근철마다  상하에  여의두문에  둘러싸인  원선(圓線)이  있어  근 철을  삼등분하고  있는데  특히  전면의  것에는  나는  학과  만자문이  투조되어  있고  나머지  좌우후면의  근철에는  윗쪽의  원선내에는  사엽문(四葉文)을,  아래쪽에는  만 자문을  투조하였다.  근철의  그  밖의  삼등분된  세로  폭에는  매화,  여보(女寶),  호로 39)  이  갑주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깃과  장신구가  약간  파손되긴  하 였으나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으로  고려대학교  소장  갑옷에  비하면  장식면이나  정교함에서 는  뒤떨어지지만  그  형태와  재질면에서는  매우  흡사하므로  그  차이점만을  지적하기로  한다. 40)  현재는  육군사관학교내  육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元帥,  副元帥用  두종류가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4&amp;vmode=full">164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67 병,  구름,  꽃무늬  등이  번갈아  가면서  양각되어  있다.  이외에  하단을  둘러싼  4개 의  근철을  마무리하는  대선(帶線)  역시  전면에는  봉황과  학이  두  마리씩,  후면에 는  용의  모습이  있고  여의두문이  앞뒤로  4개씩  즉  근철마다  2개씩  솟아  있는데  여의두문  안에는  매화를  한  송이씩  배치하였다. 발에는  전후로  용과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그  전면의  좌우로는  꼬리를  하늘로  뻗친  발톱세개  달린  용이  후면의  좌우로는  봉황이  대칭으로  나타나고  여의주를  향하면서  주위에는  구름이  장식되어  있다. 전비는  있던  흔적만을  보이고  있고,  미비는  산  모양으로  정  가운데에는  원선내 에  ‘원수’라  새겨져  있어  계급을  표시하고  있다.  그  주위로는  가운데의  여의주를  향해  화염에  휩싸인  용이  좌우에서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있다.  목가리개  역시  그  흔적만  보일  뿐  남아있지  않다.     *  갑    옷          형태는  깊게  파인  U자형  깃에  직배래이며  뒤가  트인  합임식의  포형이다.  겉감은  홍색단이나  옷감의  털도  빠지고  군데군데  해진  부분이  많다.  안감은  도톰한  푸른색  명주이다.  심지는  발이  굵은  흰색  무명  두겹을  누볐고  앞ㆍ뒷길은  거단 (裾段)에서  약  67㎝  이르는  곳까지  소매는  진동까지  4.5×6.5㎝의  무쇠  철편을  겉 에서  횡선으로  나타나는  놋쇠로  만든  두정으로  이곳  심지에서  마무리해  덧대었다. 이들  겉에서  횡선으로  나타나는  두  종류의  두정은  작은  것은  횡선으로  하복부 에  이르기까지  고루  박았으나  큰  것은  횡선  사이마다에  드문드문  박았고  하복부  이하의  부분은  작은  두정을  이용해  장식을  목적으로  박은  듯하다. &lt;그림  12&gt;  두정투구                     &lt;그림  13&gt;  두정갑옷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5&amp;vmode=full">165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68 군사연구 제127집 나) 부원수용 두정갑주     *  투    구         정개부는  개철과  간주꽂이만이  남아  있다.  개철은  가운데  간주꽂이를  중심 으로  하여  화판이  둘려있고  그  아래로는  당초문을  투조하여  도금하였다.  발부의  재질은  원수용과  같이  종이를  여러  겹  덧발라  흑칠을  하였으며  장식물은  놋쇠로  되어있다.  형태는  위는  좁고  아래로  퍼지는  형인데  전후좌우에는  근철을  세웠고  각각의  근철  사이마다에는  하단에  도깨비  문양의  두상을  2개씩  배치하였다.  전비 는  있던  흔적만이  보일  뿐  떨어져  나갔고  미비는  중앙에는  부원수용임을  상징하 는  문자가  원선  내에  양각되었고  그  위로  화염에  휩싸인  여의주가  있으며  좌우에 서  발톱이  네  개  달린  용  두  마리가  구름과  함께  투조되었다. 목가리개는  좌우후면  세  가닥으로  재질은  갑옷과  같다.  이를  고정시키기  위한  대선은  발부의  하단에  부착되어  있는데  이는  운용문(雲龍文)이  양각되었고  작은  못을  사용해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  갑    옷          형태는  깊게  파인  U자형  깃에  직배래이며  합임식인  포형으로  깃에는  흑색명주를  4㎝  너비로  달았는데  우측의  상단은  떨어져  나갔다.  재질로는  겉감은  붉은  색모인데  거의가  해어져  앞길은  우측길  상단과  좌측길  어깨부분만이,  뒷길은  우측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안감은  청색  무명이며  심지는  발이  굵은  백색  무 &lt;그림  14&gt;  두정투구 &lt;그림  15&gt;  두정갑옷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6&amp;vmode=full">166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69 &lt;그림  16&gt;  정충신  장군  두정갑 명을  두겹  누볐으며  그  위에  창호지를  덧대고,  그  위로  다시  무쇠철편을  앞ㆍ뒷 길의  거단에서  50㎝  이르는  곳까지,  소매는  진동선까지  부착시켰는데  겉에서  횡 선으로  황두정(黃豆釘)을  박아  고정시켰다. 2)  정충신(鄭忠信;1576～1636)  장군  두정갑주         정충신의  갑주는  인조  8년(1630)  5월  11일  당시  수군부원수로서  총융사  이 서(李曙  :  1580～1637)와  함께  가도(椵島)의  난을  진압하러  출발할  즈음  인조가  궁시  및  검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  투    구         재질은  나무로서  형태는  위는  좁고  아래로  퍼지면서  처마가  있는  벙거지  형태의  국내  유일의  투구이다.  이와  형태가  비슷한  철제투구로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  갑곶진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황대곤(黃大坤)의  것이  있다. 전체적으로  목리문(木理文)이  뚜렷이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보이지  않으며,  정 개  부분에  장식이  있었던  흔적이  보일  뿐이다.     *  갑    옷         형태는  약간  둥그스름한  방형의  목선에  섶과  무를  달아  두루마기[周衣]의  깃과  같은  포형으로서  전투  목적을  고려하여  뒤에  트임을  하여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겉감은  황색  운문 단을  사용하였고,  안감은  자황색으로  구름이  장식된  운보단이며  심지는  무 명  세겹을  누볐다. 이밖에  어깨에는  견철(肩鐵)을  뒷중 심선을  기점으로  19.5㎝되는  곳에  달 았다.  이는  앞부분의  3.6㎝되는  곳에  경첩장치를  하여  접혔다  폈다  할  수  있도록  하며  몸통부분은  구멍을  뚫어  끈목으로  고정시켜서  어깨의  늘어짐 을  방지하는  동시에  동작의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7&amp;vmode=full">167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70 군사연구 제127집 3)  정공청(鄭公淸  ;  1567～1608)  장군  두정갑주         정공청의  갑주는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갑 옷으로  현재  그의  후손인  정창권이  보관하고  있다.41)  정공청은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백여  배에  달하 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 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  투    구         철로  만든  것으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  모양으로  부식이  심한  상태이지만  원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앞과  뒤  양옆에는  놋쇠로  만든  불 꽃모양의  첨판이  부착되어  있어  불룩하다.  정면에는  앞쪽으로  3㎝,  길이로  17㎝  정도의  해가리개를  양끝과  가운데  못을  박아  달았고  목가리개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은《세종실록》중  ‘오례’  중에  나오는  원두(圓兜)와  모습이  비슷하다.     *  갑    옷         갑옷의  길이는  110㎝,  품은  37㎝로  남자들의  겉옷인  포(袍)의  형태를  하 고  있다.  겉은  구름무늬가  있는  화려한  초록색이고  안은  명주인데  천  사이에 는  2㎝  간격으로  누빈  2겹의  무명천이  들어  있다.  앞쪽에는  매듭으로  만든  4 개의  단추가  있어  옷을  여밀  수  있으며  어깨에는  중앙에  가운데가  꺾일  수  있 도록  경첩장식을  달아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였다.  옷의  위와  아래에는  놋쇠로  만든  못을  박았고  V자형의  목둘레와  소매  끝,  아래단에는  가죽으로  단 을  대었다.  이  갑옷은  서산  정충신  장군의  갑옷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정충신의  갑 옷은  단이  넓어  겨드랑이  아래  다른  천으로  덧댄  무를  붙였으나  이  갑옷은  그 것보다  시대가  앞선  것이지만  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41)  현재  갑옷과  함께  철로  만든  투구,  지금과  모양이  같은  장갑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혁대,  일본도와  비슷한  철로  만든  도검(刀劍),  56개의  화살과  깃대  등이  있는데,  이  유물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것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8&amp;vmode=full">168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71 &lt;그림  17&gt;  철제투구             &lt;그림  18&gt;  두정갑주 4)  충열사  소장  갑주 가) 동래부사 갑주42)     *  투    구         정개부를  살펴보면  놋쇠로  만든  삼지창은  한쪽  창끝이  떨어져  나갔고  그  밑으로  4면이  마름모꼴로  장식된  구형의  보주와  육각형의  원형장식에  이어서  동그란  놋쇠판에  붉은  상모가  드리워졌고  동시에  간주가  당초문으로  장식된  개철에  꽂혀  있다.  발부는  종이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흑칠을  한  것인데  장 식은  모두  놋쇠로  만들어졌다.  전후좌우에  근철을  늘어뜨려  네  부분으로  나 누었고  근철의  중앙부에는  각각  만자문이  투조되었다.  앞면은  근철을  중심으 로  좌우에  용이  꼬리를  하늘로  뻗치고  머리는  근철을  향한  채로  대칭하고  있 으며  뒷면은  봉황이  대칭하고  있다. 발의  밑부분을  둘러싼  근철은  당초문이  새겨졌는데  크고  작은  여의두문을  장식하였다.  전비와  미비는  놋쇠로  만들어졌고  전비는  일곱  개의  각으로  변 화를  주었으며  당초문을  투조하였다.  미비는  산  모양으로  되어  있다. 42)  이  갑옷은  원래  부산대  박물관에  소장하였다가  충열사  정화계획에  의하여,  충열사기념관 으로  관리,  전환된  것으로  임란  당시  동래부사로서  성과  운명을  같이한  송상현의  제사  때  후대의  동래부사가  착용했던  것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69&amp;vmode=full">169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72 군사연구 제127집     *  갑    옷         겉감은  홍전(紅氈)이며  안감은  옥색  명주이고  심지는  무명을  누볐으며  깃과  소맷부리,  앞선과  밑단,  양옆,  뒷트임의  테두리에는  털을  장식하였다.  두정은  앞뒤에  각각  횡선으로  박았는데  앞길의  중간에  각각  1개씩의  황두 병을  장식하였고  앞길의  좌우에  각각  탄선(綻線)을  두줄씩  박고  맨  밑부분엔  십자형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뒷길도  동일하다.  견용(肩龍)은  우측어깨에만  남 아  있다. &lt;그림  19&gt;  두정투구  &lt;그림  20&gt;  두정갑옷 나) 다대포진 첨사 갑주43)     *  투    구         재질과  형태  모두  동래부사의  것과  동일하며  정개부분이  떨어져  나간  상태 이다.     *  갑    옷         겉감은  홍전이고  안감은  옥색  명주이며  심지는  무명을  누볐는데  그  위에  43)  다대진  첨사  갑옷은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임란  당시  다대진  첨사로  공을  세운  尹興信  (?∼1592)의  제사때  後代의  多大鎭  僉使들이  착용했으며  원래는  부산시에서  소장했던  갑 옷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0&amp;vmode=full">170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73 다시  철편을  달았다.  그리고  앞길의  여밈부분과  아랫단  양옆과  배래  소맷부리  등  트임의  테두리에는  모두  털을  달았다.  형태는  동그랗게  파인  깃에  합임식이며  양 옆과  배래도  겨드랑이만  2cm  남기고  모두  트인  포형이다. 두정은  위에서부터  횡으로  6cm  간격을  두고  10줄을  박았으며  줄  사이  마디에 는  황두병을  두개  혹은  한개씩을  장식하였는데  엉덩이  이하는  드문드문  문양을  넣었고  우측  길  아래의  중간부분에  윤보(輪寶)를  장식한  듯하고  깃  주위에는  꽃 무늬  장식의  흔적이  보인다. &lt;그림  21&gt;  두정투구 &lt;그림  22&gt;  두정갑옷 다) 부산진첨사 갑주44)     *  투    구         충열사  소장의  다른  투구들과  동일한  재질,  형태인데  다만  장식에  있어서  약 간의  차이가  있다.  정개부와  발부  상단의  개철은  탈락되어  없어진  상태이며  근 철의  장식이  다른  투구들은  만자문만  투조된데  비하여  상하로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발  하단의  근철도  당초문이  투조되었는데  역시  군데군데  탈락되었다.  전비 도  탈락되었고  산모양의  미비만  있을  뿐이다.  목가리개는  다른  투구의  경우,  거의가  갑옷의  겉감과  색깔이  동일한데  비하여  이  투구는  홍색전으로  갑옷(청색)과  다른  점이  특이하다. 44)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사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발  장군의  제사때  후대의  부산진첨사들이  착용했던  갑옷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1&amp;vmode=full">171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74 군사연구 제127집     *  갑    옷         겉감이  청전(靑氈)이고  안감은  옥색  명주이며  심지는  무명을  누볐는데  깃과  앞여밈선  아랫단과  옆트임,  소맷부리  등엔  털을  둘렀다.  형태는  동래부사와  같은  포형인데  색과  두정의  못을  박는  방법이  다르다. 두정은  매우  단정한  느낌이  들도록  박았는데  횡선으로  위에서부터  4.5cm  간격 으로  11줄을  박은  후에  10cm  아래로  다시  4줄을  박았는데  위에서  6째,  7째  횡선  사이에는  황두병을  1개씩  박았다.  견룡은  좌측에만  부착되어  있다. &lt;그림  23&gt;  두정투구 &lt;그림  24&gt;  두정갑옷 5)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갑주45)         겉감은  선명한  홍전이며  안감은  북청색  운보단을  댔고  심지로는  백색 무명  한겹으로  속을  받치고  그  아랫단에  45×5.5cm의  동편을  박았는데  동편의  정  가운데에는  복주머니,  윤보,  선보문을  양각한  후  옻칠을  하여  미늘식으로  연철하였는데  한줄은  두개의  못으로  좌우에  또  한줄은  중앙에만  고정시켰고  한편  어깨에는  편찰이  팔쪽으로  쏠려  겹치게  함으로써  상하로  두개의  못을  45)  이  갑옷은  1968년  8월  9일  서울에서  개인소장자에게  구입하였다.  그러나  이  갑옷이  누구 의  것이었으며  또한  어느  계층에서  착용하였느냐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투구는  없이  갑옷만이  남아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태도  현존 하는  우리나라  갑옷  중  가장  좋은  편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2&amp;vmode=full">172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75 고정시켰는데  겉의  두정과  모두  연결되어  마무리된  상태이다.  또한  깃에  연 이은  여밈의  가장자리와  아랫단,  옆트임,  소맷부리는  모피로  처리하였다. 형태는  단령의  깃에  합임식이며  양옆과  뒤가  트인  포형이다.  깃의  모피  주 위에는  택사엽(澤瀉葉)  장식이  둘러져  있으며  앞길에  두정이  횡으로  8줄,  3줄씩  번갈아  가면서  21줄이  앞길에  박혀  있고  소매에는  역시  횡으로  4개씩  9줄을  박았다.  엉덩이  이하의  앞길에는  십자형으로  좌우  2줄씩  박았으며  그  사이에 는  꼬리를  하늘로  뻗힌  오조룡(五爪龍)이  화형문과  구름모양에  휩싸인  여의 주를  바라보고  좌우로  대칭하고  있다.  한편  뒷길에는  엉덩이  부분  중앙에  좌 우로  놋쇠로  호랑이를  장식하였다. &lt;그림  25&gt;  두정갑주 6)  창덕궁  소장  갑주         투구는  없고  갑옷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겉감은  홍전이고  안감은  청색 명주이며  심지는  흰색무명을  받쳐  겉에서  박은  두정을  처리하였고  의령(衣 領)에  연이어  합임부분과  단,  옆트임,  소맷부리에는  청전으로  안까지  곱게  바 이어스로  둘렀다.  형태는  단령깃에  합임이며  양옆과  뒤가  트인  포형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3&amp;vmode=full">173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76 군사연구 제127집 &lt;그림  26&gt;  두정갑주  다. 피 갑 주     피갑에는  주로  소가죽  또는  돼지가죽이  주원료로  사용되었다.  세조때  저 피갑(猪皮甲)을  삼명일(三名日  :  왕의  생일,  1월  1일,  동지의  세  명절)의  방물 로  거두고자  하였으나  돼지의  생산이  제한된  까닭으로  저피값이  상승되어  저 피갑을  혁파하여  달라는  지방관의  요청을  받은  것46)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는  공물의  형태로  지방관이  책납하도록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1)  보상화문  피갑주47)     *  투    구         재질은  철제로서  정개는  마치  전립과  흡사하나  그  입모(立帽)  부분이  높고  아래도  약간  퍼지면서  내려와  챙[詹]에  이른다.  정개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다만  사주  근철을  마무리하기  위해  꼭대기에서  네모꼴의  철판을  대고  가운데에서  두정 을  박았다.  철판도  작은  못을  이용해  고정시켰다.  발부는  위에서  점차  소담스레  내려오다  하반부  챙과  연결시켰는데  전후좌우에는  화두형  근철을  늘어뜨려  이는  46)《세조실록》권17,  4년  8월  28일  정묘. 47)  이  갑주는  연세대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로서  투구는  철제  첨주이고,  갑옷은  보상화문피갑 위(寶相華文皮甲胃)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4&amp;vmode=full">174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77 가운데를  융기시켜서  좌우가  대칭되도록  하였다.  한편  챙은  하반부와  연결되고  너비는  5.3㎝인데  외곽  둘림은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채  그  중앙을  약간  도드 라지게  솟은  모양으로  하여  매우  세련된  기법이라  하겠다.48)     *  갑    옷         재질로서  겉감은  연황색  면직이며  지문으로  흑색  보상화당초문(寶相華唐草 文)을  소담스레  장식하고  그  안에는  청색  무명  두겹을  받쳐서  그  위에  가죽으로 만든  편찰을  연철시켰는데  부위에  따라  그  규격에  차이를  두어서,  전면  좌우길의  경우  6.5×9㎝로  1편에서  6편까지  10줄을  어깨에는  3.2×9㎝로  하여  횡으로  5편씩  2줄을  배열하였고,  배면에는  중앙을  기점으로  6×9㎝  규격으로  상단에서  좌우로  9편씩이  2열,  4편씩이  2열,  그리고  5편씩이  4열  순으로  연철시켰다.  또한  양어깨 에는  무쇠로  견철을  만들어  달았는데  이는  길이  21.4㎝로서  세  등분으로  나누어  피혁제  밑받침으로  고정하여  작동에  편리하게  하였다. &lt;그림  27&gt;  피갑주  투구 &lt;그림  28&gt;  보상화문피갑주 48)  이러한  형태의  투구는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목제투구와  병자호란  때  강화  갑곶진에서  전사한  황대곤  장군의  투구와  매우  흡사한  벙거지  형태라  하겠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5&amp;vmode=full">175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78 군사연구 제127집 2)  피갑주49)     *  투    구         정개부는  놋쇠로  만든  반타원형의  개철  위에  철제의  간주꽂이만이  남아 있고  다른  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발부의  소재는  이중으로  된  가죽에  흑칠을  하였으며  그밖의  장식물은  모두  놋쇠이다.  형태는  위는  좁고  아래는  퍼진  형으 로  전후좌우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근철이  늘어뜨려져  있고  하단에  둘러진  대선에는  근철  사이마다  여의두문을  2개씩  배치해  놓았다. 전비는  놋쇠로서  5각으로  되어  있는데  발  하단의  근철에  대고  고정시킨  곳은  삼등분을  하여  여의두문을  그리고  그  사이마다에는  두개의  능선(稜線)을  표시 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목가리개는  좌ㆍ우ㆍ후면  세가닥으로  되어  있는 데  좌우의  끝부분은  둥글게  하여  앞에서  매거나  뒤로  젖힐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발  하단에  고정시키는  방법은  다른  것처럼  대철을  덧댄  것이  아니라  편찰을  고 정시키는  두정을  이용하여  그대로  천  위에  대고  박았다.  재질은  자황색면으로  겉감을  썼고  안감은  담청색면,  심지로는  백색  무명을  대서  그  위에  소가죽의  편찰을  덧대었다.  그리고  매  가닥의  가장자리는  겉감으로  바이어스  처리해  둘 렀다.     *  갑    옷          이  갑옷은  면제품으로서  형태는  백피를  곱게  두른  둥근  목선에  합임이면 서  배래를  비롯한  양옆과  뒤가  모두  트인  포자형(袍子形)이다. 재질은  겉감으로서  자황색  면직인데  도장으로  찍은  듯한  검은색  원형의  커다 란  무늬가  군데군데  찍혔으며,  안감은  담청색  면직이고  심지로는  백색  무명을  넣었다.  안감  위에  3겹의  소가죽으로  된  10×7.2㎝  정도의  장방형  편찰을  연철하 여  표면에  나타난  두정으로  고정시켰는데  소매의  상박부(上膊部)에  미치는  편 찰은  폭을  좁게  하여  연철시킴으로써  활동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특히  정가 운데의  합임처에는  편찰  4개를  종으로  부착시켜서  좌우  길의  여밈부분에서  생 기는  공간을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도록  하였다.  한편  어깨에는  견철이  49)  육군박물관  소장.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6&amp;vmode=full">176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79 붙어  있는데  장식이  없다.  그리고  배래와  양옆의  트임에는  구형의  놋쇠단추를  배래기에  2개,  양옆에  2개씩  달았으며  가운데의  합임처  역시  같은  단추로  하여  목선에  이어  2개를  달았다. &lt;그림  29&gt;  투구 &lt;그림  30&gt;  피갑주  3)  피갑주50)         형태는  U자형으로  둥글린  목선에  소매의  길이가  다른  갑옷보다  약간은  짧 으면서  직배래이며,  배래기는  모두  텄는데  이어서  양옆  또한  터서  앞길과  뒷길의  연결은  배래에  단추  2개,  겨드랑이에서  약간  내려온  곳에  1개를  매듭고리와  함께  달아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활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트여  있다.  여밈은  합 임인  포형이다. 재질은  겉감으로  황색유문견(黃色有文絹)이고  안감은  청색  무명,  심지로는  백색  무명을  썼는데,  가죽  편찰을  안감  위에  대고  중요부분,  즉  배와  가슴부분  그리고  상박부에  연결시켰는데,  이는  표면에  나타난  두정을  이용해  고정시켰으며  두정의  아랫단에  시정된  것은  오직  장식용일  뿐이다.  목선  및  수구,  합임  등  트임부분의  외곽에  두른  바이어스  천은  안감인  청색  무명이다. 50)  고려대박물관  소장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7&amp;vmode=full">177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80 군사연구 제127집 &lt;그림  31&gt;  피갑주 라. 쇄 자 갑51)     쇠고리를  원형으로  하여  정밀하게  연환(聯鐶)시킨  것으로  반령의  깃에  가슴  정  가운데서에서  합임하며  소매는  상박부분까지  길이는  엉덩이  부분에  미치고  양 옆은  20cm  정도  트인  반비의(半臂衣)이다.  이  갑옷도  역시  개인방어장비의  일종 이기는  하지만  표면에  착용한  것이라기보다는  갑옷  속에  입었던  내갑의(內甲衣) 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52) 마. 면   갑53)     면갑은  고종초  병인양요(1886)  이후  대원군은  김기두(金箕斗)와  안윤(安潤)으 로  하여금  면제배갑(綿製背甲)을  만들게  한  바  있다.  즉  세면(細綿)을  몇  겹  누벼  소총탄을  발사  실험한  결과  열두겹이면  총탄이  관통치  못하므로  드디어  열세겹으 로  제작하였던  사실이  있다.  이  갑옷은  무명을  30장  겹쳐서  만든  것으로  도저히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실전에  있어서  과연  착용이  가능하였는지  의문이다.  이  갑옷은  양  겨드랑이  부분은  깊이  파서  활동하기  편하게  했으며  또한  어깨의  51)  창덕궁  소장. 52)  문화재관리국,《조선시대  궁중복식》  1981  p.114. 53)  육군박물관  소장.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8&amp;vmode=full">178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81 좌측이  터져  있어  매듭단추가  달림으로써  입고  벗게  되어  있고  양쪽  옆의  트임에 는  좌우에  2개씩  각각  앞뒷판으로  끈이  부착되어  매게  되어  있다.  또한  깃과  모 든  테두리에는  같은  천으로  바이어스  처리를  곱게  하였으며  앞판의  좌우로  2개,  뒷판에  상하,  좌우로  2개씩  문양을  넣었는데  검은색으로써  도장을  찍거나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인다. &lt;그림  32&gt;  창덕궁  소장  쇄자갑 &lt;그림  33&gt;  육군박물관  면갑 바. 흉   갑54)     앞면의  겉감과  안감은  흑색  목면을  댔고  심지로서  두꺼운  무쇠를  통판으로  좌우길에  달았으며  두정으로  앞선과  밑단을  마무리지었고  뒷면과  양옆부분의  겉 감과  안감은  흑색  면을  사용하였고  심지는  흰색  무명을  여러  겹  누볐다. 형태는  목은  둥그렇게  파고,  합임이며  앞길이는  배  부분에  이르고  뒷길이는  엉덩 이에  찰  정도로서  지금의  조끼와  같은  형태이다.  여밈장식은  장식고리와  같이  했으 나  부속품이  떨어져  나가  어떠한  방식으로  열고  닫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 내   갑55)     재질은  겉감으로  청색명주이며  안감  역시  청색명주인데,  심지는  무명  1겹으 54)  흉갑은  현재  육군박물관과  고대박물관  두  곳에  각각  1점씩  보관되어  있는데  서로  그  형 태나  재질이  동일하다. 55)  이  갑옷은  현재  우리나라에  1점  뿐으로  창덕궁  서행각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재질이나  상태상  겉에  착장했다기보다는  속에  입었던  내갑으로  추측된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79&amp;vmode=full">179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82 군사연구 제127집 로  여기에  4.5×5㎝의  동판을  멈치  못  두개로  상단에  고정시키고  있다. 형태는  배자형(褙子形)으로  V넥라인에  소매는  진동선에서  약간  소매  쪽으로  나온  상태이며,  양옆과  뒤가  트였는데  앞길이보다  뒷길이가  16㎝정도  더  길다.  여 밈은  역시  합임으로  목선이  맞닿은  지점과  10㎝  밑으로  고리를  만들어  매듭단추를  달아  여미도록  하였다.　 &lt;그림  34&gt;  육군박물관  소장  흉갑 &lt;그림  35&gt;  창덕궁  소장  내갑 아. 동래성 해자 출토 찰갑     2007년에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영역  부지에서  조선  전기의  찰갑과  함께  활,  화살촉과  칼,  인골  등이  발견됐다. 해당  유물이  발견된  곳은  동래성  외곽  해자로  추정되는  곳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의  유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출토된  찰갑은  거의  완벽한 보존  상태를  유지한  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전세품인  유성룡  갑주와  함께  조선  전기의  찰갑  형태의  원형 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실물  갑옷이다.  이  찰갑은  포형으로  보이며,  정면에서  좌우로  열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조선  전기의  수은갑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일부  언론에서  “수은을  섞은  철을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히  붙여  만든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건  수은갑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의례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아직  수은갑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0&amp;vmode=full">180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83 지만,  현재로선  찰갑이라는  사실  외에  추가적인  부분까지  언급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아울러  아직  어깨나  소매  부분의  형태를  논할  만큼  다양한  사진  자료는  없 는  상태지만  최소한  어깨끈이  존재한다거나  어깨  부분의  피박이  별도로  분리되는  구조는  아닌  것  같다.  &lt;그림  36&gt;  동래성  해자에서  발견된  조선  찰갑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1&amp;vmode=full">181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84 군사연구 제127집 Ⅲ. 유성룡 갑주 1. 유성룡의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 성에서  출생하였다.  유공작(柳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유중녕(柳仲濘)의  아 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金光粹)의  딸이다.  이황의  문인을  김성일과  동문수 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ㆍ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 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ㆍ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ㆍ지제교로  경연검토관ㆍ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 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ㆍ병조좌랑ㆍ이조좌랑ㆍ부 교리ㆍ이조정랑ㆍ교리ㆍ전한ㆍ장령ㆍ부응교ㆍ검상ㆍ사인ㆍ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ㆍ동부승지ㆍ지제교로  경연참찬관ㆍ춘추관 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 간ㆍ우부승지ㆍ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황화집서(皇華 集序)&gt;를  찬진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 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 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 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ㆍ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錄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 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ㆍ병조판서ㆍ지중추부사를  역임 하고  왕명을  받아〈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 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을  구제 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2&amp;vmode=full">182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85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한편  전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현감  이순신을  각각  의 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  일로  교체할  것 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과  군사에  관 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 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ㆍ경상ㆍ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 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 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서로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4월  이여송 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 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 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에  주둔하게  함으로 써  반적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가  되어《기효신서》를  강해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 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에  관둔전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 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3&amp;vmode=full">183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86 군사연구 제127집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 여졌다.  2. 전존 경위 서애  유성룡  선생의  종가인  충효당(忠孝堂)은  평생을  청백하게  지내신  유성룡 이  삼간  초려에서  별세한  후  문하생과  사림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졸재  원지 공을  도와  창건하였으며,  그  후  증손  익찬  선하공이  확장,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보물  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효당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충효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던  서애의  유    언에서  따온  당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집으로  현재  52칸이  남 아있으며  전서체의  충효당  현판은  당대의  명필인  미수  허목  공의  친필이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 랑채가  연이어  있다.  충효당  사랑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가면  서애와  관련된  유물이  전시된  영모각이  있다.  단아한  기와집의  뒤뜰에  단을  높인  시멘트  건물이다.  1966년에  건립하였고  당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체가  돋보이나,  가로로  쓴  것이  흠이다.  영모 각  안에는  풍산유씨가에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애가  임진왜란  때  일을  기록한  ‘《징비록》(국보  152호)’이  있으며  그밖에  《진사록》,《군문등록》,《침구요결》,《관화록》등  문서  19권이  보물  160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또  유성룡이  생시에  쓰던  갑주,  가죽신,  갓끈  등도  보물  460호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들  유물들은  모두  유성룡에  관계된  것인데,  크게  3종 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유성룡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이고,  둘째는  유성룡  모부인 의  곤문기(昆文記)이며,  셋째는  유성룡에게  내린  조정의  문서이다.  3. 유성룡 갑주의 형태와 특징 현존하는  조선시대  찰갑  유물은  동래읍성  해자의  찰갑과  유성룡이  도체찰사  시 절에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주뿐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갑옷의  구조와  특 징을  밝힐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갑옷은  손상이  심하여  현재로서는  원래의  갑옷  구조를  알기  어려우나  각각의  갑편(甲片)과  갑편들의  연결이  담고  있는  정 보를  수집  분석한다면  당시의  모습에  근접할  수  있겠다. ‘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4&amp;vmode=full">184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87 &lt;그림  37&gt;  유성룡  갑주의  앞면 &lt;그림  38&gt;  유성룡  갑주  뒷면 유성룡  갑주는  모두  46조각으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중  장편이  연결되 었거나  장편  조각이  22조각,  장편에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깨끈이  1조각,  단편이  연결되었거나  단편  조각이  23조각이다.  이들  갑옷  조각들은  갑편  209개가  연결된  큰  조각부터  갑편  1개가  낱낱이  떨어져  나온  경우까지  여러  양상으로  분 리되어  있다. 한편  유성룡  갑주는  과거에  몇  차례  보수된  흔적이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낚싯줄  또는  시침실로  연결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물의  가 죽끈이  부식되고  손상되어  끊어져  더  많은  수의  조각들로  분리될  위험이  있게  되 자  이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보수한  듯하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세로  연결의  길이가  주변의  가죽끈들보다  짧게  보수되어  유물이  편안하게  놓이지  않을 뿐더러  자칫  형태나  규격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는  곳도  있어  정밀  조사가  필요 하다. 갑옷은  가죽으로  갑편을  만들고  바깥쪽에  옻칠을  하였다.56)  일반적으로  피갑이  방호력을  가지기  위해서  여러  겹의  가죽을  겹쳐서  만든  것과는  달리  유성룡의  갑 주는  가죽을  겹치지  않았다.  갑편  형태는  일반적인  찰갑들과  마찬가지로  세로로  긴  장방형이며,  각  모서리를  약간  둥글리되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더  좁은  형태이다.  규격은  긴  갑편(장편)과  짧은  갑편(단편)의  2가지로  구분된다.  장편의  규격은  가로  약  3.5cm,  세로  약  10.6cm이며  단편의  규격은  가로  약  2.7cm,  세로  56)  반면에  유성룡의  투구는  가리개부분을  철로  작은  갑편들을  만들어  상하좌우로  연결하였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5&amp;vmode=full">185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88 군사연구 제127집 약  6.8cm로  장편이  단편보다  길고  넓다.  또한  갑편들을  좌우와  상하로  연결한  끈 들은  밝은  갈색의  가죽으로  이루어졌다.57)  갑편의  좌우  가장자리를  감싸는  복륜  역시  동일한  가죽끈을  사용하였으나  너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깨끈  2조각과  어깨끈을  끼우기  위한  버클이  1개  남아있는데,  버클은  철로  만들어져  있으며  어 깨끈은  갑편의  연결끈과  유사한  색상을  보이고  있으나  재질은  가죽이  아닌  다른  종류로  여겨진다.  연결끈과는  달리  좀이  많이  슬어  크고  작은  구멍이  많이  생겨 있고  가까이에서  보면  섬유들이  엉켜  있어  모직이  아닐까  싶다. 또한  문헌에  나타난  조선  초기의  찰갑은  갑편이  연결된  안쪽으로  완전한  옷이  존재했으나  유성룡  갑주는  갑편들을  가로로  한  단  연결한  후에  안쪽에  종이와  옷 감을  대어  감싸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직물의  안쪽에  종이를  받쳐  제작하였으 므로  제작  당시에는  직물만이  보였겠으나  현재는  손상된  직물  주변에서  종이가  보인다. 우리나라의  갑주의  시대별  특징과  지금까지  전해오는  유물들을  유성룡  갑주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성룡갑주와  같은  찰갑으로서  조선  전기에  사용된  갑주는  수은갑주이다.  이와  관련한  그림  자료로는《세종실록》의  오례의  군례조,《국조오례의》서례와  이를  다시  전재한《춘관통고》의  그림  등이  있다.  &lt;그림  39&gt;  세종실록의  수은갑 &lt;그림  40&gt;  국조오례의서례  규장각본의  수은갑 57)  문헌기록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갑편의  연결은  사슴가죽으로  연결하도록  되어  있으나,  유 성룡  갑주는  양가죽  혹은  돼지가죽을  사용한  것  같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6&amp;vmode=full">186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89 앞의  수은갑을  살펴보면  포형으로서  모두  정면에서  좌우로  갑옷이  열리는  구조이 고,  어깨부분이  갑옷  본체와  일체형으로  되어  있고  소매  부분도  연결되어  있다.  이 에  비해  유성룡  갑주는  어깨  부분이  분리되는  방식으로  어깨끈이  존재한다.  다만  갑 주의  앞면에서  갑옷이  열리는  구조라는  점에서는  수은갑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동래성  해자에서  발견된  찰갑과  비교이다.  이  찰갑은  아직  속단하기는  이 르지만  수은갑일  가능성도  있는  것  같다.  또한  찰갑의  갑찰  형태나  연결  형태는  일단  유성룡의  갑주의  갑찰과  차이가  있다.  유성룡  갑주의  갑찰이  좀  더  폭이  넓 고  동래성  출토  찰갑은  보다  가늘고  긴  형태이다.  아래  위를  연결하는  것도  유성 룡  갑주는  아랫단이  윗단을  덮는  방식인데  비해  동래성  해자에서  출토된  찰갑은  그  반대이다.  좀  더  자세한  분석이  요구되는  부분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셋째,  중국의  갑주에서  유성룡의  갑주와  유사한  것은  통수개와  양당갑을  들  수  있다.  통수개는  중국  삼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  초기에  걸쳐  많이  사용된  철제  갑 옷이다.  통수개는  삼국시대  촉(221～263년)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이  발명한  것이라 고  전해지는데,  정말로  그가  발명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소매가  붙어  있는  형태의  개갑은  한나라  때  이미  출현하였는데,  이것을  개량하여  완성시킨  인물이  제갈량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제갈량은  촉나라  군대의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신병기를  개발하고  개갑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lt;그림  41&gt;  한나라  통수개(복원)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7&amp;vmode=full">187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90 군사연구 제127집 이  갑옷의  특징은  철로  된  작은  비늘  모양의  미늘을  겹치듯  엮어서  만들었 다는  점과  소매가  붙어  있어  팔  윗부분과  급소인  옆구리  아랫부분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쇠뇌의  화살로도  관통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방어능력이  뛰어난  갑옷이었다.  양당갑은  삼국시대에  등장하여  남북조시대에  유행했던  개갑의  하나로서  기병들 이  주로  사용하였다.  양당개라고도  한다.  양당갑은  신체의  앞면을  보호하는  흉갑 과  등을  보호하는  배갑으로  나뉜다.  양쪽  모두  쇠  미늘을  엮어  테두리를  붙인  것 으로,  이것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여  어깨에  걸어  착용한다.  착용할  때는  벨트로  허 리를  고정시킨다.  겹쳐서  엮은  쇠미늘은  방어력이  뛰어나며  신체의  앞면과  등  양 쪽  상반신과  무릎까지  보호할  수  있다.  소매가  없고  흉갑과  배갑을  어깨로  연결 한  개갑의  원형은  일찍이  한나라의  기병용  개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수ㆍ당나라  때  고위  무관들의  의장용  개갑으로  양당갑이  사용되었다.  나 중에는  미늘을  떼어버린  형태로  무관들의  의장용  의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어깨 부터  팔까지를  방어하는  피박이나  발을  방어하는  슬군을  보완시킴으로써  방어능 력을  높였으며  한참  후인  송나라  때도  이러한  양당갑은  계속  활용되었다. &lt;그림  42&gt;  양당개 &lt;그림  43&gt;  한나라  무사(양당개)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8&amp;vmode=full">188page</a><br><br> 4 군사관리 군사연구 제127집  191 이  양당개와  유성룡  갑주는  그  형식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신체의  앞면 을  보호하는  흉갑과  등을  보호하는  배갑으로  나뉘고,  소매가  없다는  점이나  양쪽  모두  미늘을  엮어  테두리를  마감한  점,  또  이것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여  어깨에  걸어  착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양당갑의  경우에는  철  미늘을  사용 했으나  유성룡  갑주는  가죽  미늘을  사용했다는  점,  양당개의  경우에는  앞면이  통 으로  되어  있으나  유성룡  갑주의  경우에는  앞면  중앙에서  열린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통수개는  양당개와는  달리  소매부분이  달려있지만  유성룡  갑주와  앞면  중 앙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넷째로  일본  갑주의  경우에는  양당형  괘갑이  유사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양당 식  괘갑은  동환식  괘갑처럼  몸을  감싸지  않고  철이나  가죽의  소찰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앞과  뒷부분을  만들고,  양옆의  터진  부분은  몇  개의  끈으로  묶어서  이어 놓은  형태이다.  양당식  괘갑은  무관의  공식복으로서  오랫동안  그  형태가  전승되 어  왔다.  이  괘갑은  동환식  괘갑처럼  몸을  감싸지  않고  철이나  가죽의  소찰을  가 죽끈으로  엮어서  앞과  뒷부분만을  만들고,  양옆의  터진  부분은  몇  개의  끈으로  묶어서  이어놓았다.58)  세부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유성룡  갑주와  흡사한  형태를  보인다. 따라서  유성룡  갑주는  중국의  양당개와  같은  갑주가  유입되어  변화된  형태의  갑주로  보인다.  &lt;그림  37&gt;,  &lt;그림  38&gt;과  같이  앞뒷면의  갑옷이  형성되고,  두  갑 주가  옆면에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어깨를  보호하는  피박과  투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양당개와는  달리  유성룡  갑주가  앞면의  중앙 에서  열리고,  측면이  뒷면과  연결된  점은  중국  갑주가  유입된  이후  시기가  흐르 면서  변형되면서  전면  개폐  방식을  일부  적용하지  않았나  싶다. Ⅳ. 맺  음  말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갑주의  시대별  특징과  조선시대  현존  유물을  토대로  유성룡  갑주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유성룡  갑주는  현존하는  어떠한  갑주와  연계 성이  낮은  갑주로서  그  원형을  찾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복원 을  위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가능성을  견지하면서  점차  공통  분모를  형성해나가는  58)  棟方武城,  ≪日本の甲冑ㆍ武具≫,  東京美術,  2004,  p.2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89&amp;vmode=full">189page</a><br><br> 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92 군사연구 제127집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유성룡  갑주의  기본적인  형태를  추론해보면  어깨끈  부분을  제외하고  앞쪽의  갑 옷은  기본적으로  6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앞쪽에  해당하 는  편찰들  중  현존  유물에서  최하단이  다음  단과의  연결구멍이  없는  편찰이기  때 문이다.  그리고  갑주의  앞쪽의  앞트임  부분은  각  편찰의  움직임  자체가  좌우로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직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갑옷의  편찰의  수나  형태는  좌우  대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갑주의  앞면  형태는  총  6개  단으로  구성되었고,  1단은  좌우측에  각  11개의  편찰이  연결 되고,  2단은  13개,  3ㆍ4ㆍ5단은  15개,  최하단은  16개의  편찰로  구성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하면  유성룡  갑주의  원래  형태는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 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형태는  편찰의  수를  앞서  고려한  조건에  의거하여  정리한  것으로  뒷면의  경우에도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재구성한다면  유성룡  갑주 의  원형에  조금씩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을  토대로  많은  연구 가  진행되어  유성룡  갑주의  형태가  완성되기를  기대한다. &lt;그림  44&gt;  유성룡  갑주  앞면  추정도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0&amp;vmode=full">190page</a><br><br> 군사사 및 기타 &lt;a href="#191"&gt;194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lt;/a&gt; &lt;a href="#205"&gt;208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lt;/a&gt; &lt;a href="#221"&gt;224  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lt;/a&gt; &lt;a href="#246"&gt;249  전쟁사 연구실태 및 발전방안&lt;/a&gt;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1&amp;vmode=full">191page</a><br><br> 명예교수  정 토 웅 육사 군사사학과  Ⅰ.  머  리  말 Ⅱ.  군사사란  용어 Ⅲ.  군사사의  상아탑  정착 Ⅳ.  군사사의  정의와  범위 Ⅴ.  군사사의  중요성 Ⅵ.  군사사의  학습방법 Ⅶ.  맺  음  말 &lt;필자 약력&gt; 미 캔자스주립대 역사학과 대학원 졸업(군사사 박사), 육사 군사학 교수, 육사 군 사학과 명예교수(현) &lt;저서&gt; 전쟁사 101장면, 20세기 결전 30장면, 역사속의 전사들, 전쟁과 리더십, 전쟁론, 군사학 논고 194 군사연구 제127집 군사사 및 기타   1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2&amp;vmode=full">192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195 Ⅰ. 머  리  말 대부분의  학문은  이론  전개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요  용어의  개념을  명확 히  설정한다.  그것은  해당분야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편리한  방법이 다.  우리나라  학계에서  군사사란  학문은  그  용어  자체를  처음  사용한  것이  약  한  세대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군  사관학교와  국방대학교에서  먼저  군사사 에  눈을  뜨고  연구  및  교육을  해왔다.  민간대학교에서는  최근에  군사학부가  창 설되고  그  부처에서  담당한  교육과정에  군사사  분야의  교과목들을  포함하면서  군사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대되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군사사를  소개하고  발전시키는데  특별히  관심을  가져온  필자가  볼  때는  아직도  군이나  학계에서  군사사의  개념과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단  생각에  이  글을  시도 하게  되었다.1) Ⅱ. 군사사란 용어 군사사(軍事史)란  용어는  본래  영어  military  histor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많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군사사는  외국에서  도입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 한  선진국에서  military  history는  해당  분야를  대표하는  표제어(headword  또는  entry  word)가  되어  있다.  대학교에서  역사학  분야는  흔히  전공주제별로  정치 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외교사,  기술사,  종교사,  사상사,  여성사,  군사사  등 으로  나누어진다.  군사사는  전쟁,  안보,  군대  등의  주제와  관련된  역사로서  세부 적인  학과목으로  전쟁사,  군사사상,  전쟁과  기술,  군사제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주종을  이루는  것은  전쟁사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전쟁사 란  용어를  선호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선진국들을  따라  군사사를  표제어로  받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그  좋은  예로는  현재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편제표에서  종래의  전사학과의  명칭이  군사사학과로  바뀐  데서  찾을  수  있다. 1)  정토웅,  “군사사의  개념정립을  위한  연구,”《군사평론  제211호》,  육군대학,  1981.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3&amp;vmode=full">193page</a><br><br>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196 군사연구 제127집 Ⅲ. 군사사의 상아탑 정착 군사사는  역사를  각  분야별로  전문화하기  오래전부터  역사의  주류를  형성할  정 도로  본래  인기가  높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 도토스의『역사』와  투키디데스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들  수  있다.  이  두  고 전은  각기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을  다룬  군사사였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학문이  전반적으로  크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 고  군사사는  되레  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현상이  나타났다.  그렇게  된  주  이 유는  역사가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의  역사,  즉  정치사,  외교사,  사상 사,  문화사  등에  쏠리고  군사사에  대해서는  별로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당시  시대  조류가  군사사를  전공하면  마치  전쟁주의자로  낙인찍힐지  모른 다는  잘못된  선입견이  널리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역사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군사사  연구에  관한  논의를  지피기  시작 했다.  선구자는  영국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의  포테스크(J.  W.  Fortescue)  교수로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이었던  1913년에  처음으로  군사사(Military  History)란  이름으로  교과목을  개설하여  군사사의  중요성과  정의  및  범위  등을  강의하였다.2)  이때  포테스크는  군사사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전쟁과  교전 의  역사”,  “무장집단의  충돌로  표출되는  공동사회의  투쟁의  역사”,  “공동사회와  국가의  대외적  치안의  역사”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는  그  시절까지  군사 사는  주로  군인들을  위한  전쟁사로  끝났으나  전쟁은  국가와  민족의  모든  에너지 를  쏟아  붓는  최고의  시험장이  되어  왔으므로  이제  군사사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시각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사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종래의  군사사,  즉  주로  군인들의  주  관심영 역에  속한  전역,  전투,  전략,  전술,  전쟁의  원칙  등을  위주로  설명해온  군사사를  보다  더  업그레이드시키기를  바라며  상아탑  내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실시할  것 을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은  일부  동조자들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했으나  곧바로  큰  바람의  학풍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2)  John  W.  Fortescue,  Military  History(Lond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4).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4&amp;vmode=full">194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197 그러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에  군사사  연구는  큰  바람을  탔다.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전쟁에서  발생한  무지무지한  희생과  사회곳곳의  엄청난  변화와  영향  속에서  사람들의  군사사에  대한  관심이  대폭  증가한데  따른  결과였 다.  특히,  민간인  학자들은  다양한  시각에서  군사사  연구를  활발히  하였다.  민간 대학교  역사학과는  군사사에  관련된  여러  교과목들을  개설하고  석‧박사  과정  프 로그램을  도입하여  전문적인  군사사가들을  배출시켰다.  상아탑에  정착한  군사사는  크게  두  학파  간  경쟁  속에서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 다.  ‘북과  나팔’  학파(Drum  and  Trumpet  School)와  ‘생태학적’  학파(Ecological  School)의  두  학파였다.  ‘북과  나팔’  학파(Drum  and  Trumpet  School)는  전통 적인  군사사의  주류를  중시하고  주로  전역과  전투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 다.  과거에  전투는  통상  북과  나팔  소리와  함께  진행되었기에  그렇게  이름을  붙 인  것이다.  한편  ‘생태학적’  학파는  전투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양한  요소들,  특히  전쟁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환경생태와의  복합적인  관 계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생태학적’  학파의  성장은  당시  학제적  연구 (interdisciplinary  approach)가  인기를  누렸던  시대적  흐름과  일치했다.  ‘생태학적’  학파의  성장과  함께  군사사를  전공하는  대학  숫자가  증가하고  군사사  연구는  한 층  활발해졌다.  두  학파의  등장은  결코  주도권  다툼의  성격을  띤  현상이  아니다.  ‘북과  나팔’  학파가  기울고  그  대신에  ‘생태학적’  학파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두  학파는  상호대립이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다만  ‘생태학적’  학파의  등장으로  군사사의  연구  범위가  크게  확대되고  군사사가  ‘새로운  차원’(new  dimensions)의  군사사로  발전한  것은  확실하다.  학계에서  쌍두마차체제를  유지해온  양대  학파는  최근  구조주의(structuralist)와  해석주의  학파(constructionist)란  새로운  이름으로  리모델링했다.  구조주의  학파 는  전쟁에서  중대한  결정사항은  합리적이며  구조적인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고  전 제한다.  그리하여  첫째  클라우제비츠가  강조한  전쟁의  합리적  정치적  동기,  둘째  군사적  효율성과  직결되는  전쟁기술,  용병술,  전쟁의  원칙,  전략과  전술,  리더십  등을  중시하였다.  즉,  정치‧군사적  요인  중심으로  전쟁을  설명한다.  한편  해석주 의  학파는  과거의  ‘생태학적’  학파와  같이  다른  요인들,  특히  사회적,  문화적  요인 의  영향과  그  의미를  중시하며  전쟁은  단순히  전쟁의  원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 는  점들이  많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여하는  말단병사들을  단순히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5&amp;vmode=full">195page</a><br><br>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198 군사연구 제127집 지휘관을  위한  하나의  자동기계장치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행동  동기와  심리도  중요한  연구테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이들의  연구는  전쟁 사보다는  군사제도와  문화에  치중하는  편이다.3) 군사사는  한마디로  학문의  전당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우선  학자들이  연구주제 의  범위를  확대하여  전쟁사뿐만  아니라  군사제도(軍事制度),  기술,  훈련,  군사사상 (軍事思想)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또한  전쟁사에  대한  연 구에서도  군사교리에  입각한  분석의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요인들과  상호  연관성을  중시하였다.  ‘생태학적’  학파와  ‘해석주의’  학파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북과  나팔’  학파와  ‘구조주의’  학파도  여러  가지  새로운  시각과  연 구기법을  적용하여  전략,  전술,  전투  등  핵심주제들에  대하여  보다  더  심도  있게  연구를  실시했다.  Ⅳ. 군사사의 정의와 범위 이와  같이  군사사  연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게  바뀌고  연구범위는  포테스 크  이후  계속  확대되어  왔다.  자연히  군사사에  대한  정의도  시대별  연구  동향에  따라  변하였다. 2006년  모릴로(Stephen  Morillo)의  저서『What  Is  Military  History?』는    군사 사  방법론에  관한  가장  업데이트한  연구다.  모릴로는  포테스크보다는  시대적으로  확실히  유리한  위치에서  훨씬  더  명확하게  군사사를  정의하고  있다.  그는  최근까 지  광범위하게  발전된  연구동향을  잘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광의의  군사사는  단지  전쟁사만을  의미하지  않고  각종  군사  인력,  전쟁양상(육ㆍ 해ㆍ공군  작전으로  실제로  싸우는  투쟁  방식),  군사제도,  그리고  그들의  정치,  경 제,  사회,  자연,  문화와의  상호  관계를  연구의  초점이나  주제로  삼는  모든  역사적  연구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과거에  군사사는  협의의  군사사로서  전쟁사에  불과한  반면,  현재의  군사사는  광의의  군사사로서  연구  범위가  크게  확대되어  군사제도,  군사 사상,  민군관계,  군사문화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3)  Stephen  Morillo,  What  is  Military  History?(Cambridge,  UK:  Polity  Press,  2006),  pp.49～52.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6&amp;vmode=full">196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199 군사사는  정치사,  경제사,  제도사,  사상사,  사회사,  문화사  등으로  분류된  한  분야  내에서도  연구  가능함을  내비치고  있다.  여기서  모릴로의  주논지는  군사사를  광 범위하게  연구해야  하며  또한  군사사든  다른  분야의  역사든  과거의  중요한  사실 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  역사가는  추상적으로  구분된  여러  분야의  학문적인  경계선  밖으로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연구를  하는  것이  바 람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최상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4) 지금까지  군사사는  역사학의  한  분야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볼  때  군사사는  군사학의  한  분야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치  외교사를  역사학의  한  분야이며,  또한  외교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군사학이란  무엇인가?  학자에  따라  시각과  해석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일반 적으로  전쟁과  군사력의  본질  및  수행과  관련된  주제에  대한  지식과  이론을  체계 화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군사학  이론은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주로  역사적  데이터나  현재의  실험과  시뮬레이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과  가 정을  통해서  만들어낸다.  역사적  데이터를  제공하는  군사사는  군사학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초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군사사는  역사학이면서  동시에  군사학(軍事學)이므로  대학교에서  역사학과나  군사학과의  어느  쪽에서도  다  담당할  수  있는  성격의  학문이다.  다만  역사학과는  역사가  오래됐으나  군사학과는  역사가  매우  짧다.  군사학과에서는  아직  수준  높 은  교육프로그램,  즉  석‧박사  과정을  개설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민간 대학교에서는  주로  역사학과에서  군사사  전공을  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준  높 은  군사학을  교육하고  있는  군사학교에서는  군사학  담당  부서에서  군사사  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군사사의 중요성 오늘날  역사학자들과  군인들은  다  같이  군사사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한다.  하지만  강조하는  포인트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제 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군사사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인류  역사에서  전 쟁과  군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으므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  Morillo,  p.4.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7&amp;vmode=full">197page</a><br><br>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200 군사연구 제127집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역사가  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에  치우치고  군사적  측면의  활동을  소홀히  다루어 온  점을  성찰하고  그  부분을  보강하고자  하였다.  20세기  들어  역사가들은  전반적 으로  소홀했던  분야를  찾아내  역사를  재조명하는  일을  대과업으로  삼았는데  그런  시대조류  속에서  군사사의  중요성을  크게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한편  군에  몸을  담고  있는  직업군인(職業軍人)들에게  군사사는  직무수행능력을  기르는  매우  실용적인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역사학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 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위한  지혜를  습득하는  데  있다.  그래 서  군사사는  군인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한  지혜의  창고가  되어온  것이다.  “우매 한  자는  직접  체험을  통해서  배우려  하지만  현명한  자는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는  비스마르크의  금언은  군사사의  실용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  대 비하는  군인들은  평시에  직접  전쟁을  실험할  수  없으므로  군사사의  간접  경험을  통하여  유용한  지식과  교훈을  습득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모든  나라  군사  교육  훈련  학교들은  교육과정에서  군사사를  중요한  필수과목으로  택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사는  군  간부들의  전략적  통찰력과  리더십을  기르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어왔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구스타브  아돌프,  튀렌,  유진,  프리드리히의  전쟁사를  몇  번이고  음미하여  정독하라.  그리고  그들을  본받 아라.  이것은  전쟁술의  비결을  배우고  위대한  장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다”라고  말했다.5)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은  군사사광(軍事史狂)으로서  과거 의  전쟁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쌓고  훌륭한  전략들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전 장에  들어서면  승리의  전략이  섬광처럼  떠오르는  데자뷔(deja  vu)를  느꼈다고  한 다.  클라우제비츠는  명장들의  꾸되이(coup  d'oeil),  즉  전략적  혜안은  오랜  고찰과  사색을  통하여  생긴다고  말했다.  분명히  군사사의  많은  사례들은  명장들의  그런  사고  능력을  증진시키고  전장에서  부딪치는  많은  우연성을  최소화하는데  크게  도 움이  된다. 군사사는  또한  군인들의  직업의식과  소속감을  고무시키는  학과목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군인들은  과거  군인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하여  직업 에  필요한  고도의  군전문직업의식과  책임감  및  자신감을  함양시킬  수  있다.  과거  군인들이  사용한  기준잣대를  통하여  직무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며  전쟁 5)  나폴레옹,  데이비드  G.  챈들러  엮음,  원태재  옮김,  《나폴레옹의  전쟁금언》  (서울  :  책세상,  1998),  p.260.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8&amp;vmode=full">198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01 에서  요구되는  중대한  책임감과  리더십  등의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아무리  실전 과  실무에서  경험을  많이  쌓더라도  그것은  군사사를  통해서  배우는  엄청난  간접 경험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군사사를  충실히  공부한  군인은  간접 적이지만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Ⅵ. 군사사의 학습방법 상아탑에서  군사사  연구의  성과는  군사학교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가장  대표 적인  예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들  수  있는데,  1970년대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군 사사  교육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창설  이래  쭉  군사사를  핵심  필수과목으로  정하여  생도들 을  교육시켜왔다.  과목명은  『군사술의  역사』(History  of  Military  Art)로서  주요  내용은  세계전쟁사와  미국전쟁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이  과목을  전통적으로  이른바  10대  전쟁원칙을  중요한  잣대로  삼아  중요한  전쟁들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군사사를  교육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미  육사는  군사사의  개념을  보다  광 의로  해석하고  전쟁원칙의  기준을  넘어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했다.  사관생도들에게  ‘10대  맥락(脈絡)’을  제시하고  각각을  살펴보는데  역점을  두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0대  脈絡(10  Threads  of  Continuity)은  생태학 적  학파들이  주장한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며  광범위한  차원에서  전쟁의  중요한  요소들을  대부분  포함시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6) (1)  군사이론과  교리(military  theory  and  doctrine)  :  군대  조직,  훈련,  전술,  전 략의  개념과  실행을  위한  기초가  되는  아이디어들이다. (2)  군사전문직업주의(military  professionalism)  :  직업군인은  아마추어와  다른  특별한  직업의식과  복무자세로  군복무를  하고  무력  관리  전문가로서  부하 병사들과  국가에  대하여  고도의  책임감을  갖는다. (3)  용병술(generalship)  :  대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지휘  기술로서  이것은  병 력에  대한  지휘통솔과  부대관리,  그리고  전투준비,  전투감독,  전투력의  관리  및  유지  등  다양한  직능을  포함한다. 6)  John  E.  Jessup,  Jr.  &amp;  Robert  W.  Coakley,  ed.,  A  Guide  to  the  Study  and  Use  of  Military  History(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C.:  1982),  pp.47～48.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199&amp;vmode=full">199page</a><br><br>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202 군사연구 제127집 (4)  전략(strategy)  :  전쟁준비와  전쟁수행의  기술로서  전장(戰場)에서의  직접 적인  전투행위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전장에  이르는  제반과정을  뜻한다.  전략의  개념은  가변적이며  현재는  일반적으로  국가전략  또는  대전략과  군 사전략(국가  전략의  한  구성  요소)의  두  가지  개념으로  분류하여  사용하 고  있다. (5)  전술(tactics)  :  전투준비와  전장에서의  실제  전투행위를  뜻한다. (6)  군수  및  행정(logistics  and  administration)  :  국가의  경제적  역량과  군대의  유지  능력의  관계를  밝힌다. (7)  과학기술(technology)  :  군사적  의미로  과학의  전쟁에  대한  적용을  뜻한다.  과학기술은  새로운  아이디어,  기술,  장비뿐만  아니라  그  적용을  포함한다. (8)  정치적  요소(political  factors)  :  전쟁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정부의  제반  조치  사항들이다. (9)  사회적  요소(social  factors)  :  사회적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전쟁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요소들이다.   (10)  경제적  요소(economic  factors)  :  국가자원의  생산,  분배  및  소비  등에  기인 하는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요소들이다. 그렇다고  이상의  10대  맥락을  기준으로  군사사를  학습하는  방법에  대하여  그것 을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다만  군사사를  보다  광범 위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하나의  좋은  예에  불과하다.  10대  맥락을  적용할  때도  사례별  연구목적에  따라  우선순위는  크게  달라질  것 이다.  또한  전쟁마다  다른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대  맥락보다  더  의미  있는  새로운  맥락을  개발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원칙을  기준으로  공부한  과거의  방법이  오늘날  낙후되었거나  또는  효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10대  맥락  가운데  군사이론과  교리의  맥락 으로서  지금도  유용한  학습도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원칙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언제나  염두에  두 어야  한다.  군사사  내에서  군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테마로  대두되는  주제는  전역(戰役)과  전투(戰鬪)이다.  전쟁  중에  일어난  중요한  전역과  전투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마치  신문기자가  어떤  사건의  진상을  취재할  때  육하원칙에  의하여  조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0&amp;vmode=full">200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03 전역과  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매우  기초적인  질문사항을  정해놓고  각각에  대한  답변을  찾으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1)  관련인물들은?  (2)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3)  언제  일어났는가?  (4)  어 디서  일어났는가?  (5)  왜  일어났는가?  (6)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사건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이것은  군사적  사건도  일반  사건과  똑같이  육하원칙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군사사를  공부할  때는  다음과  같은  응용된  질문들을  설정해놓고  조사하고  공부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통례다.  이  방법은  군사적  사건의  특수성과  거기에  가장  밀접히  관련된  주인공인  군인들의  주요  관심사항을  설명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1)  전략적  배경  :  시대적  배경,  적대관계  발생  요인,  전쟁과  전역/전투로              발전시킨  주요  사건  (2)  전술적  배경  :  군사력  비교,  부대  배치,  지형  및  기상  분석,  군대의  성격  (3)  작전  계획  :  주요  전략과  전술  계획  비교,  공격과  방어계획 (4)  작전  경과  :  작전  개시,  작전  진행,  돌발사건사고  처리,  계획  차질,  리더십,    특징,  결과,  기타  특기사항 (5)  전투의  교훈 (6)  전투의  의의  및  평가 학습방법에서는  다양한  맥락과  적절한  질문의  틀을  이용함과  동시에  다음  유의 사항에  유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군사사  학계의  거성인  전  Oxford  대학  교 수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가  강조한  바  있는  기본적인  유의사항이다.  그는  군사사를  연구‧활용할  때는  언제나  ‘폭,  깊이,  전후관계’(width,  depth,  context)의  3대  요소에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7)    첫째,  ‘폭’이란  오랜  역사에  걸친  전쟁  변화  과정을  파악하여  폭넓은  관점을  가 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  비교해볼  때  분명히  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은  속성을  띠는  것이  있다.  용병술이  뛰어난  명장들 은  연속성(連續性)의  요소들을  활용하는  대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없이  발생 7)  Michael  Howard,  The  Causes  of  Wars  and  Other  Essays(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ssachusetts:  1984),  pp.195～197.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1&amp;vmode=full">201page</a><br><br>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204 군사연구 제127집 하는  비연속성(非連續性)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군  간부들은  군사사를  폭넓게  공부하고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잘  분별할  줄  알 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의  원칙을  고려할  때  시대별로  달라진  전쟁환경과  조 건에서  그  효용과  한계를  분명히  간파해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들은  비 연속성의  좋은  예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로이센군은  18세기의  강 한  프리드리히군  체계를  고집했다가  1806년  예나(Jena)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주요  국가  전략가들은  1세기  전의  나폴레옹  전법을  적 용했다가  마른(Marne)  전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쳐  교착된  전선에 서  무지무지한  소모전을  겪어야  했다.  전쟁의  원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지휘 관은  군사사를  폭넓게  공부하고  시대적  변화에  대한  지각력을  길러  상황에  맞는  전략과  용병술을  적절히  구사해야  성공할  수  있다.  하워드는  군인들이  군사사를  폭넓게  연구  활용했더라면  1806년  예나  전투와  1914년  마른  전투와  같은  실패를  겪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했다. 둘째,  ‘깊이’를  언급하면서  하워드는  군사사를  지나치게  요식화하는  공부  방식 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주요  사건들은  통상  피상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전개된  듯 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복잡한  사실들로  얽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전쟁사  부도  상에  깨끗하게  표시한  화살표들은  대부분  인위적인  표시들이다.  실 제로  부대기동이  화살표처럼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고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 쳤다면  반드시  정확한  사실들을  깊이  있게  조사해야  한다.  지휘관이  주저하지  않 고  정확하게  계산을  한  뒤에  결단을  내린  것처럼  보인  사실도,  그  과정을  깊이  있게  샅샅이  조사해  보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 후의  보고서,  비망록,  일기  등을  찾아보면  중요한  결정들이  반드시  특출한  직감적  판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냥  운이  좋아서  우연히  승리를  얻어낸  경우 도  많았음을  읽을  수  있다.  1757년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는  사선진(斜線陣)  전법을  구사하여  최고로  효율적으로  병력을  집중함으로써  승리를  거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자신은  ‘명예로운  패배’까지  생각하면서  전투지 휘를  할  정도로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거쳤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투를  공부할  때는  너무  한  가지  자료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 하여  교차검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한다.  셋째로  하워드는  ‘전후관계’의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란  사건  당시의  적절한  환경에  놓고  이해하고  설명해야  함을  뜻한다.  전쟁은  일정한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2&amp;vmode=full">202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05 룰에  따라  움직이는  스포츠  게임과는  다르므로  그것을  너무  쉽게  유추해석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상황들은  서로  유사할  수는  있어도  결코  정확하게  반복되지는  않는다.  또한  고정된  원칙이  언제나  똑같이  모든  전쟁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나온  전쟁  원칙들은  대부분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의  전쟁과  같은  정규전에서  적용한  것들이지만  동시대의  미국의  독립전쟁처럼  시민군이  정규군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리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군사교육기관에서는  흔히  군사교리를  취급하는  과목에서  표면적인  사실만  보고  쉽게  원칙들을  끌어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그 것은  군사사를  오용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 시  주어진  상황의  전후관계를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Ⅶ. 맺  음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군사사는  군인들의  군사전문성과  투철한  직업의식 을  함양시키는  중요한  학습도구이다.  군은  항상  군사사를  중시하고  학습방법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우선  쉽게  시도가능하 며  실행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첫째,  각  군사학교는  각각의  교육목표와  수준에  맞는  군사사  교육을  체계화하 고  강화해야  한다.  민간대학교  군사학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학과목  가운데  전쟁사  과목과  군사사  과목을  동격의  차원에서  함께  개설한  것은  군사사의  개념 을  잘못  적용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앞서  정의한  바와  같이  군사사는  전쟁사  플러스알파이다.  따라서  전쟁사를  가르치며  동시에  그밖에  알파를  가르친다면  그 에  해당하는  과목으로는  확실하게  군사제도사  또는  군사사상사를  교육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해  보인다. 둘째,  장병  교육을  할  때  소속한  부대의  역사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부대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대의  전반적인  역사와  특별히  전투사,  예를  들어  6․25전쟁  중의  활약과  같은  내용을  교육시켜야  한다.  부대역사에  대한  교육은  부대원들의  소속감과  전우애를  크게  증대시킬  것이다.  부대원들이  부대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부대와  그렇지  못한  부대  간에는  단결력에서  큰  차이가  날  것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3&amp;vmode=full">203page</a><br><br> 군사사의 중요성과 학습방법 206 군사연구 제127집 셋째,  지휘관들이  훈시를  할  때나  정신교육을  시킬  때  군사사  사례들을  최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육효과를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예 하  간부들과  장병들로  하여금  군사사의  중요성을  자연히  널리  인식하고  군사사  공부를  더욱더  열심히  하게  하는  부대분위기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간부들에게  끊임없이  군사사  서적에  대한  독서를  장려해야  한다.  위대한  군인들의  자서전,  전기,  각종  전쟁사  서적,  군사고전  등을  권장하고  수시로  독후 감  대회  같은  행사를  개최하여  학습  분위기를  유도할  수  있다.  나아가  여러  교육 과정에서  소양시험을  치르는  경우에  필수과목  가운데  하나로  군사사를  포함시키 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군사사  공부는  모든  군인들에게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군  근무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지혜로운  간부들은  군사사의  사례를  활용 하여  훌륭한  정책과  방안을  창출할  것이다.  중요한  국제  군사회의와  같은  자리에 서도  군사사에  박식한  장교들은  그렇지  못한  장교들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의 견들을  피력할  것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4&amp;vmode=full">204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07 1.  Brown,  Richard  C.  The  Teaching  of  Military  History  in  College  and  Universities  of  the  United  States.  Maxwell  AFB,  AL  :  Air  University,  1955. 2.  Cooling,  B.  F.,  ed.  Essays  in  Some  Dimensions  of  Military  History,  Vols. Ⅰ-Ⅳ.  Carlisle  Barracks: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2～1974. 3.  Craven,  W.  Frank.  Why  Military  History?(The  Harmon  Memorial  Lectures  in  Military  History,  No.1.)  Colorado  Springs  :  USAF  Academy,  1959. 4.  Dupuy,  R.  Ernest,  and  Trevor  N.  Dupuy.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form  3500  B.C.  to  the  Present.  New  York  :  Harper  &amp;  Row,  1986. 5.  Fortescue,  Sir  John  W.  Military  History.  Lond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4. 6.  Jessup,  John  E.  Jr.,  and  Robert  W.  Coakley,  ed.  A  Guide  to  the  Study  and  Use  of  Military  History.  Washington,  D.C.  :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82. 7.  Howard,  Michael.  The  Causes  of  Wars  and  Other  Essay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8.  Howard,  Michael,  ed.  The  Theory  and  Practice  of  War.  London  :  Cassell,  1983. 9.  Keegan,  John.  The  Face  of  Battle.  New  York  :  The  Viking  Press,  1976. 10. Millis,  Walter.  Military  History(a  pamphlet).  The  Service  Center  for  Teachers  of  History,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1961. 11.  Morillo,  Stephen.  What  Is  Military  History?Cambridge,  UK  :  Polity  Press,  2006. 12.  Weigley,  Rusell  F.  ed.  New  Dimensions  in  Military  History.  San  Rafael,  California  :  Presidio  Press,  1975.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5&amp;vmode=full">205page</a><br><br> 교수  이 재 범 경기대학교 교수  Ⅰ.  서        론 Ⅱ.  제1차  여원연합군의  기동로  및  전투지역 Ⅲ.  제2차  여원연합군의  기동로  및  전투지역 Ⅳ.  결        론 &lt;필자 약력&gt; 문학박사(한국사), 한국학 중앙연구원 부편수원, 국방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러시아  국립극동대학교 교환교수,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류교수 역임, 경기대 사학과 교수(현) &lt;저서&gt;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슬픈궁예, 한반도에 외국군 주둔사, 몽골의 고려 일본침공과  한일관계, 명분과 실리 서희 외교론, 후삼국시대 궁예정권, 궁예의 나라 태봉, 나의 그 리스 여행 등 다수 208 군사연구 제127집 군사사 및 기타   2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대한  고찰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6&amp;vmode=full">206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09 Ⅰ. 서      론 고려의  대몽강화  이후  전개된  여원연합군(이하  연합군)의  일본원정1)에  대한  연 구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천한  편이다.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일본사의  가 장  핵심  부분의  하나이다.2)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은  실로  세계사적  대사건이었 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그  대사건의  당사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관하여  아직까지도  개관  소개  정도에  그치고  있는  실 정이다.3)  근래에  들어  일부  국내학자들에  의하여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지만,  그  내용이 나  주제가  고려의  피해상황  등을  소개하는  정도이며,  일부에서는  동아시아적  시 각  혹은  일본사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군사사적  측면에서의  연 구는  빈약한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합군의  일본정벌은  분명히  군사적  사건 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측면의  연구가  별로  없다는  것은  전반적인  우리나라  군 사사  연구의  현주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건  자체가  치욕 적인  패배라는  인식이  우리의  의식  가운데  작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연합군의  1274년,  1281년의  두  차례에  걸친  연합군의  일본정벌  당 시의  군사  기동로와  전투지역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상당 한  연구  성과를  거둔  분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내용 이  많기  때문에  일종의  소개와  같은  의미에서의  논고를  작성하고자  하는  것이 다.4)  그리고  기동로와  아울러  전투지역과  전황에  대한  소개를  해두고자  한다.  그 1)  일본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을  ‘元寇’  또는  ‘蒙古襲來’라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일 본원정은  ‘文永의  전쟁’,  제2차  일본원정은  ‘弘安의  전쟁’이라고  한다.  문영과  홍안은  일본 의  연호이다. 2)  일본에서의  연구성과는  2001년  福岡市立博物館에서  펴낸『蒙古襲來と博多』에    수록된  蒙 古襲來關係文獻目錄(川添昭二編)에  따르면  당시가지의  논·저서가  1000편  이상이다. 3)  근래에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일문화교류기금과  동북 아역사재단에서  주최한  ‘몽골의  고려·일본  침공과  한일관계’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일  것 이다.  심포지움의  결과는  『몽골의  고려·일본  침공과  한일관계』(경인문화사,  2009)로  간 행되었다.    4)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에  관하여  필자에게  던지는  질문  가운데  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했 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체로  연합군은  현해탄을  건너는  도중에  폭 풍으로  궤멸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본고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질 문에  대한  응답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7&amp;vmode=full">207page</a><br><br>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210 군사연구 제127집 렇게  함으로써  세계사적  대사건이었던  연합군에  대한  당사국의  하나인  우리나라 에서도  그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대세 계사의  중심부에는  고려가  있었고,  고려의  역할은  전황에  있어서  매우  민감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고찰은  한국사를  자국사의  입장에서만이  아닌  다양한  측면에서의  해석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제1차 여원연합군의 기동로 및 전투지역 제1차  연합군의  구성과  일본원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  학자들에  의해 서  소개된  바가  있다.5)  따라서  본고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히  논하지  않겠 다.  단지  이들의  기동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가와  그  귀환과정에  관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6) 1274년(문영  11)  10월  3일,  연합군을  실은  900척의  군선은  합포(合浦,  마산)를  출발하였다.7)  그리고  2일  뒤인  10월  5일  오전  2시경에  쓰시마(對馬島)에  도착하 였다.  그리고  쓰시마8)에서  이들을  발견한  것은  오후  4시경이었다.  여원연합군이  도착한  곳은  쓰시마의  서쪽  해안에  있는  사스우라(佐須浦,  현재의  小茂田浜)였다.  이때  쓰시마의  슈고다이(守護代)는  58세의  노장  종조국(宗助國)이었다.  대마도의  슈고다이  종조국은  이  사실을  다자이후(大宰府)에  알리고  자신은  80여  기를  이끌고  5)  이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朴亨杓,  麗蒙聯合軍의  東征과  그  顚末,  史學硏究  第21號,  1969.       李銀圭,  元의  日本征伐  考察,  湖西史學  第1輯,  1972.       金澈珉,  元의  日本征伐과  麗·元關係,  建大史學  第3輯,  1973.       채상식,  麗·蒙의  일본정벌과  관련된  외교문서의  추이,  韓國民族文化  9,  1997.       南基鶴,  중세일본의  외교와  전쟁-몽골의  일본  침략을  소재로-,  東洋史學硏究  80,  2002.       南基鶴,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몽골의  고려·일본  침공과  한일관계,  景仁文化        社,  2009. 6) 본고의  작성에  크게  도움을  얻은  자료는  白石一郞의『蒙古襲來』(日本放送出版協會,  2001) 이다.  그리고  본고에서  인용하는  원문  관련  자료는  『日本古中世高麗資料硏究』(張東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다음에  인용시에는  장동익과  쪽수 만을  밝히도록  한다.) 7)『고려사』  충렬왕  즉위년  10월  을사. 8)  본고에서의  일본어  독음은  확실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한글식  한자어로  하였다.  그  까닭 은  본고에  나오는  일본어의  상당수가  확인하기  어려운  지명이라서  고유한  일본어로  읽어 주기에  따르지  못했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8&amp;vmode=full">208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11 연합군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산파도(山坡道)를  넘어  좌수포로  떠나고  있다.      그리고  대마도에서는  밤이  되자  통역  1인을  데리고  연합군의  선박에  다가갔으 나,  연합군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화살만  쏘아대어  접촉은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  1천여  명이  배를  타고  차례로  상륙을  하 였다.  결국  사스노우라에서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쓰시마의  수비병은  고작  80명  정도였다고  한다.  쓰시마에서의  전투는  대장인  종 조국을  비롯하여  전부  전사함으로써  끝이  났다.9)  연합군이  쓰시마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대략  10일  전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연합군이  왜  이런  기간  동안  쓰시마에  머물렀어야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 유는  모른다.  그리고  연합군이  쓰시마를  공격하였다는  사실이  하카타(박다)에  전 해진  시기는  10월  13일이었다.  그런데  연합군이  잇키(壹岐)에  도달한  때는  10월  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그러므로  하카타의  다자이후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알았 다고  하더라도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잇키섬에서  연합군의  상륙장소는  가쓰모도(勝本)에서  유노모도(湯ノ本)에  이르 는  곳이었다.  잇키(壹岐)에서는  쓰시마에서  보낸  소태랑(小太郞),  병위차랑(兵衛次 郞)의  보고로  연합군의  공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  소식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전투  능력을  가진  자들은  슈고다이  평경륭(平景隆)을  비롯하여  백여기  정도  밖에  없었다.  잇키의  남자들을  전부  모은다고  해도  3만의  연합군에게  대적하기에 는  무리였다. 잇키에서의  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쓰모도에  상륙하였다는  소식 을  들은  평경륭은  신성촌(新城村)의  통힐성(樋詰城)에서  백기(騎)의  무리를  이끌 고  전투에  임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대선(大船)  2척에서  400명만  상륙을  시켰던  상황이었다.  양군이  맞닥뜨린  곳은  장삼랑(庄三郞)이라는  사람의  성(城)  앞이었다.  성이라기보다  관(館)과  같은  곳이었다.  평경륭과  그의  무리는  선전하였지만,  중과 부적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야음을  틈  타  통힐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통힐성은  본 환(本丸)이  동서  18간,  남북이  14간이며,  굴(堀)  주위가  65간,  깊이  7척  7촌인  작 은  성채이다.  그리하여  잇키의  남은  무사들과  도민들이  싸웠으나,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사상자만  증가하였다.  잇키에서도  쓰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자이후가  있는  하카타(博多)로  사신을  급학  보냈지만,  원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9)  10월  13일  대마도에서의  패전이  하카타에  전해짐.(『감중기』,  문영  11년  10월  23일)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09&amp;vmode=full">209page</a><br><br>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212 군사연구 제127집 참고  잇키와  하카다는  해로  65킬로미터의  거리이다. 다음  날인  15일  아침  일찍,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성을  소각하고  방어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평경륭은  전사하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전사하였다.  연합군은  쓰시마와  잇키를  점령함으로써  대한해협의  제해권을  장악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잇키의  점령후,  연합군의  선단은  10월  16일에는  큐슈의  서북  해안인  희젠(肥前) 지역을  향하여  나아갔다.  연합군이  잇키에서  바로  가까운  하카타가  아닌  서북해 안의  희젠  연안지방으로  향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직도  명 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쓰라토(松浦党)와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 다.  그  설에  따르면  현재의  사가(佐賀)현과  나가사키(長崎)현에  속한  해안  일대는  이마리(伊万里)를  근거지로  한  마쓰라토(松浦黨)라고  하는  해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마쓰라토의  근거지와  같았는데,  마쓰라토는  고려의  해안을  가끔  범접 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고려는  먼저  마쓰라토의  공격을  하려고  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마쓰라토는  왜구와  밀접한  관련 을  갖는  해적으로  그  피해가  많았던  고려에서  이들을  급습하기  위해서였다는  설 이다.  이  설에  따르면  연합군은  마쓰라토를  공격하기  위하여  희젠지역으로  향했 고,  이  일대의  다카시마(鷹島)를  비롯한  키타마쓰라(北松浦)와  입야반도(入野半島) 를  공격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0)  희젠의  서북지역을  공격한  연합군은  19 일  이른  아침부터  다음  목표인  하카타를  향하여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희젠의  이마리에서  하카타까지는  해로로  약  60여킬로미터  정도이다.  순풍이라 면  그다지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연합군은  19일  오후부터는  하카다만과  가 까운  이마쓰(今津)만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마쓰만에  모습을  드러낸  연 합군의  선단(船團)은  우부원수(右副元帥)  홍다구(洪茶丘)가  인솔하는  부대로  알려 져  있다.  이들은  후속부대를  기다리며  하카타만의  지형을  정찰하고  상륙지점을  선정하기  위하여,  홍다구부대는  먼저  수천명의  군사를  상륙시켜  메이노하마(姪ノ 浜)까지의  연안을  확보하였다.  당시  일본은  하카타를  중심으로  방어하고  있었으 므로,  이  일대로  전진하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군사를  보내는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하카타에서  보낸  군사들은  전투를  벌였으나  바로  물러나고  말았다.  일본의  군사들은  실견천(室見川)까지  나와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간단히  10)  이전까지  연합군의  희젠지역  공격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현재는  이  설을  인정하는  경향이다. <br><a href="viewContents.asp?seq=111856&amp;path=&amp;page=210&amp;vmode=full">210page</a><br><br> 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13 제압되어  모모치바라(百道原)로  퇴각하였던  것  같다.11)    밤이  되면서  연합군의  후속  군선들이  희젠  다카시마  일대에서  차례로  능고도 (能古島)와  묘견갑(妙見岬)  사이의  해협을  지나  하카타만으로  나아갔다.  연합군의  총공격은  10월  20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큐슈(九州)  일대에서  모인  고께닌(御家人)들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5천에서  많아야  1만인  정도 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쓰시마와  잇키에서  일본군의  패전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당시  다자이후  슈고쇼(守護所)의  쇼니  스케요시(少貳經資)는  이러한  소식 을  가마쿠라(鎌倉)막부에  알리고  큐슈  전  지역에도  알렸으나,  당시의  교통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축후천(筑後川)의  홍수로  다리가  끊겨  군사들의  전진  속도에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의  사령관은  소이경자(少貳景資,  少貳經資의  동생)로  하였다.  소이경자는  하코자키(箱崎)에  본진을  배치하고,  연합군과의  전선을  이룬  이마쓰와  아카사카 (赤坡)에는  별동대를  두었다.  일본의  방어군들은  큐슈의  유력자인  오토모(大友),  키쿠치(菊池),  시마쓰(島津)  등이  소이경자의  지휘아래  전투  준비를  하였다.  이러 한  사정도  가마쿠라  막부에  알려졌고,  막부에서는  강한  지휘권을  가진  지휘관을  보내고자  하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호소  토키무네(北條時宗)씨가  장악하고  있었 고,  큐슈(九州)는  소이와  대우  양씨가  진서봉행(鎭西奉行)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실권은  없었다.  그리하여  막부에서는  진서탐제(鎭西探題)라는  직역을  만들어  호소  사네마사(北條實政)를  하카타로  보냈다.  연합군은  20일  이른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대마와  잇키  공격은  서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연합군의  목표는  다자이후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자신 들과는  다른  형태의  공격을  취해  오는  연합군에  의하여  처음부터  당혹감을  감추 지  못했다.  일본군은  전투를  하기  전에  자신을  소개하고  선전을  포고하는  명적 (鳴鏑)을  날린  후  무사와  무사들끼리  겨루는  전투를  하